2009. 5. 1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17)
본문 : 벧전 2:5
제목 :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오래전에 일이지만 우리 교회에 가끔 찾아오는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전기공사를 하는 청년이었는데 공사를 하다가 감전이 돼서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서 태어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살던 사람인지를 모르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다가 보니까 정삭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헛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A.W. 토저 목사님이 지은 “이것이 예배이다“라는 책에 보면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이렇게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어디서 왔는지 왜 살고 있는지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잊어버리고 방황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영적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어디서 오셨는지 왜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를 아십니까?
그걸 아시는 분이면 기억 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고 그것을 모르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신 것도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른 예배 즉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일에 관심이 없거나 예배를 드리는 일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인생의 의미나 목적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은 “신령한 집과 신령한 제사“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사람들이고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신령한집으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신령한 집이 무엇인지 신령한 제사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신령한 제사 즉 참된 예배를 드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바로 앞 절에 있는 말씀을 배우면서 “산돌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할 때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산돌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싫어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정하시고 소중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산 돌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산 돌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산 돌이 된 우리가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신령한 집이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지은 집을 말합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이 지었던 성막이나 성전 같은 집에 비유해서 우리도 산 돌로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전처럼 세워져 나가야 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령한 집을 세우고 신령한 집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성막을 세우고 성막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광야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막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유대인들은 다윗에게 임한 계시를 따라 솔로몬 시대에 성전을 세우고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 그들의 모든 사람의 최 우선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도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세우고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구약은 신약 시대를 사는 신자들을 위한 비유요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내용을 통해서 신앙생활의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특히 성전 건축과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은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신령한 집을 세워야 함을 보여주는 좋은 비유며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신령한 집과 예수님이 오신이후의 신령한 집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구약시대는 눈에 보이는 건물을 신령한 집 거룩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신령한 집인 성전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짓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제일 큰 영광으로 생각을 하면서 성전예배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 그 성전의 의미는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그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헤롯성전을 보시면서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우시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성전이 바로 자신의 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이라고 하시면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과거 구약시대 때는 성전을 건축하고 거기에 하나님을 모셨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집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는 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신령한 이라는 말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신령은 영적이라는 뜻인데 영이란 성령님 혹은 성령님을 모신 우리의 영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어서 성령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돌들이 모여서 하나의 건물이 된다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며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그 목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들이 우리를 창조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런 창조 목적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타락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죄인들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도 우리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서 그대로 두시지 않으시고 점점 더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을 시키셔서 마침내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답게 그 목적에 부응하는 삶을 살도록 성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자 성령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두 손 들고 회개하고 겸손하게 나아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점점 더 성장하게 하셔서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하십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서 신령과 진정으로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게 하는 것이 우리 성도의 최종의 목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신령한 집입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와 계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돌 하나하나가 모여서 건물이 완성이 되듯이 예수님처럼 산 돌이 된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약시대의 성도들처럼 건물을 꾸미려고 애를 씁니다.
교회당 건물을 화려하게 짓고 거기에 멋진 장식을 하고 아주 신비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꾸미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인 건물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성도들의 연합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화려한 교회당이 있어도 거기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없다면 즉 하나님을 모신 성전들이 없다면 그것은 화려한 건물일 뿐이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어서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힘써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면 그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은 참으로 특별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레위지파, 레위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집안, 아론의 집안 중에서도 가장 좋은 아들들만 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엘리트중의 엘리트이며, 가장 거룩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일평생을 성전에 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그들의 전 삶을 헌신할 수 있도록 구별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던 직분이 신약 시대에 와서 우리 성도들에게 넘어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9절 말씀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거룩한 제사장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워주셨는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귀한 신분을 주셨는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야 봐라 나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다,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라고 자랑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우리를 이런 신분이 되게 하셨는가를 알고 그 일을 수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라고 했습니까?
“신령한 제사를 드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제사장이 된 것은 신령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 신령한 제사가 무엇인지 알고 그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먼저 “신령한“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령한 이란 헬라어에서 '프뉴마(πνευ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프뉴마라는 말은 성령님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의 영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쉬운 성경에서는 “영적인 예배“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예배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예배를 말씀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우리의 참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신령한 예배 즉 영적인 예배란 우리의 육신이 중심이 되지 아니하고 우리의 영혼이 중심이 된 예배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몸은 아무렇게나 하고 마음만 바르게 해서 예배를 드리면 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바른 자세를 하고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이라고 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마음의 상태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몸이 바른 자세를 갖추듯이 마음도 바르게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시고 우리의 마음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에 따라서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바르게 드려야 한다,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 라고 말은 많이 하지만 막상 참된 예배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잘 모르면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예배를 바르게 드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토저목사님께서 “이것이 예배이다”라는 책에서 예배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소개를 해 드리겠습니다.
1)예배는 내적인 태도이다.
예배는 내적인 태도 즉 정신적인 태도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육체적인 태도가 아니라 정신적인 태도 즉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몸만 여기에 와 있고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를 드리는 많은 사람들이 몸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은 예배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예배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입으로만 중얼거릴 뿐 거기 온 마음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앞에선 사람이 기도를 하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마음을 합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도 아멘이 없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그 가사의 내용에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아예 노래조차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새 노래를 자꾸 부르라고 했습니까? 늘 새로운 마음으로 타성에 젖지 않고 의미를 생각하면서 찬송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잘 아는 노래를 그저 습관처럼 부른다면 그것은 노래이지 찬송이 아닙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설교시간만 되면 잘 됐다 자자. 라고 하는 사람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졸지는 않더라도 집중해서 설교를 듣지 않는 사람도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아닙니다.
설교를 듣지 않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2)예배는 지속적인 행동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진정으로 잘 드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피곤하기도 하고 때로는 기분이 잡쳐서 교회에 올 때도 있고 때로는 까닭이 없이 우울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들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참된 예배를 드리지 말아도 될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어도 늘 예배는 바르게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가 행동이라고 할 때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남들이 예배드리는 것을 구경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몸을 움직여서 행동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3)예배는 감정적인 것이다.
예배는 감정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그냥 덤덤하게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짜 예배를 드리면서 무덤덤합니다.
기쁘면 춤을 추고 마음에 감동이 오면 아멘도 하고 슬프면 눈물도 흘리고 마음에 와 닫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꿔다놓은 보리짝처럼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냥 몸만 왔다가 아무 느낌도 없이 그냥 가버리려면 뭐 하러 교회에 옵니까?
4)겸손한 감탄과 기쁨의 표현이 예배이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오라고 했더니 교회에 가면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못 간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나서 교회에 가니 어떠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목사님 말씀대로 앞 사람이 일어서면 일어서고 앉으면 앉고 그러다가 왔다고 하더랍니다.
물론 처음교회에 가니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오랫동안 교회에 다닌 사람들 중에도 의미도 모르고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하다가 그냥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배시간에 일어설 때는 하나님 앞에서 예의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손을 들고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거기 진심의 고백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나에게 주어진 은혜에 대해서 기쁨을 나타내는 것이 예배입니다.
제가 복지선교를 하다가 보니까 여기저기 가서 후원금이나 지원금을 받아와야 합니다.
어떤 때는 저도 사람인지라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기쁜 얼굴을 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돈 주는 사람이 기분이 되게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감사하다고 하고 잘 쓰겠다고 하고 기쁜 얼굴을 해야 또 주지 시원찮게 하다가는 다음에 끊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그 까짓것 후원금 몇 푼 받는 것하고 비교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엄청난 은혜를 하나님께 받은 사람들입니다.
감사 감사 감격 또 감격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춤을 출 만한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태도를 보면 꼭 뭐 빼앗긴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 마음들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알고 보면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십니다.
엄청난 은혜를 우리에게 특별히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영적인 예배와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좋아하시고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예배의 참된 의미를 바르게 알고 신령한 예배 영적인 예배를 드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산 돌이신 예수님처럼 산 돌이 되어서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한 제사장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신령한 예배 즉 영적인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즉 영적인 예배 진리 안에서 드리는 이 예배를 드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 벧전 2:5
제목 :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오래전에 일이지만 우리 교회에 가끔 찾아오는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전기공사를 하는 청년이었는데 공사를 하다가 감전이 돼서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서 태어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살던 사람인지를 모르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다가 보니까 정삭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헛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A.W. 토저 목사님이 지은 “이것이 예배이다“라는 책에 보면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이렇게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어디서 왔는지 왜 살고 있는지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잊어버리고 방황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영적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어디서 오셨는지 왜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를 아십니까?
그걸 아시는 분이면 기억 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고 그것을 모르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신 것도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른 예배 즉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일에 관심이 없거나 예배를 드리는 일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인생의 의미나 목적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은 “신령한 집과 신령한 제사“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사람들이고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신령한집으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신령한 집이 무엇인지 신령한 제사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신령한 제사 즉 참된 예배를 드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바로 앞 절에 있는 말씀을 배우면서 “산돌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할 때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산돌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싫어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정하시고 소중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산 돌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산 돌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산 돌이 된 우리가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신령한 집이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지은 집을 말합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이 지었던 성막이나 성전 같은 집에 비유해서 우리도 산 돌로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전처럼 세워져 나가야 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령한 집을 세우고 신령한 집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성막을 세우고 성막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광야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막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유대인들은 다윗에게 임한 계시를 따라 솔로몬 시대에 성전을 세우고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 그들의 모든 사람의 최 우선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도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세우고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구약은 신약 시대를 사는 신자들을 위한 비유요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내용을 통해서 신앙생활의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특히 성전 건축과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은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신령한 집을 세워야 함을 보여주는 좋은 비유며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신령한 집과 예수님이 오신이후의 신령한 집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구약시대는 눈에 보이는 건물을 신령한 집 거룩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신령한 집인 성전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짓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제일 큰 영광으로 생각을 하면서 성전예배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 그 성전의 의미는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그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헤롯성전을 보시면서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우시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성전이 바로 자신의 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이라고 하시면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과거 구약시대 때는 성전을 건축하고 거기에 하나님을 모셨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집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는 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신령한 이라는 말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신령은 영적이라는 뜻인데 영이란 성령님 혹은 성령님을 모신 우리의 영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어서 성령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돌들이 모여서 하나의 건물이 된다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며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그 목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들이 우리를 창조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런 창조 목적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타락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죄인들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도 우리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서 그대로 두시지 않으시고 점점 더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을 시키셔서 마침내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답게 그 목적에 부응하는 삶을 살도록 성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자 성령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두 손 들고 회개하고 겸손하게 나아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점점 더 성장하게 하셔서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하십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서 신령과 진정으로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게 하는 것이 우리 성도의 최종의 목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신령한 집입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와 계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돌 하나하나가 모여서 건물이 완성이 되듯이 예수님처럼 산 돌이 된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약시대의 성도들처럼 건물을 꾸미려고 애를 씁니다.
교회당 건물을 화려하게 짓고 거기에 멋진 장식을 하고 아주 신비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꾸미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인 건물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성도들의 연합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화려한 교회당이 있어도 거기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없다면 즉 하나님을 모신 성전들이 없다면 그것은 화려한 건물일 뿐이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어서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힘써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면 그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은 참으로 특별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레위지파, 레위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집안, 아론의 집안 중에서도 가장 좋은 아들들만 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엘리트중의 엘리트이며, 가장 거룩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일평생을 성전에 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그들의 전 삶을 헌신할 수 있도록 구별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던 직분이 신약 시대에 와서 우리 성도들에게 넘어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9절 말씀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거룩한 제사장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워주셨는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귀한 신분을 주셨는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야 봐라 나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다,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라고 자랑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우리를 이런 신분이 되게 하셨는가를 알고 그 일을 수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라고 했습니까?
“신령한 제사를 드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제사장이 된 것은 신령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 신령한 제사가 무엇인지 알고 그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먼저 “신령한“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령한 이란 헬라어에서 '프뉴마(πνευ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프뉴마라는 말은 성령님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의 영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쉬운 성경에서는 “영적인 예배“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예배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예배를 말씀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우리의 참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신령한 예배 즉 영적인 예배란 우리의 육신이 중심이 되지 아니하고 우리의 영혼이 중심이 된 예배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몸은 아무렇게나 하고 마음만 바르게 해서 예배를 드리면 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바른 자세를 하고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이라고 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마음의 상태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몸이 바른 자세를 갖추듯이 마음도 바르게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시고 우리의 마음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에 따라서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바르게 드려야 한다,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 라고 말은 많이 하지만 막상 참된 예배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잘 모르면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예배를 바르게 드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토저목사님께서 “이것이 예배이다”라는 책에서 예배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소개를 해 드리겠습니다.
1)예배는 내적인 태도이다.
예배는 내적인 태도 즉 정신적인 태도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육체적인 태도가 아니라 정신적인 태도 즉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몸만 여기에 와 있고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를 드리는 많은 사람들이 몸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은 예배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예배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입으로만 중얼거릴 뿐 거기 온 마음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앞에선 사람이 기도를 하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마음을 합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도 아멘이 없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그 가사의 내용에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아예 노래조차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새 노래를 자꾸 부르라고 했습니까? 늘 새로운 마음으로 타성에 젖지 않고 의미를 생각하면서 찬송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잘 아는 노래를 그저 습관처럼 부른다면 그것은 노래이지 찬송이 아닙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설교시간만 되면 잘 됐다 자자. 라고 하는 사람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졸지는 않더라도 집중해서 설교를 듣지 않는 사람도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아닙니다.
설교를 듣지 않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2)예배는 지속적인 행동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진정으로 잘 드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피곤하기도 하고 때로는 기분이 잡쳐서 교회에 올 때도 있고 때로는 까닭이 없이 우울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들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참된 예배를 드리지 말아도 될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어도 늘 예배는 바르게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가 행동이라고 할 때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남들이 예배드리는 것을 구경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몸을 움직여서 행동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3)예배는 감정적인 것이다.
예배는 감정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그냥 덤덤하게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짜 예배를 드리면서 무덤덤합니다.
기쁘면 춤을 추고 마음에 감동이 오면 아멘도 하고 슬프면 눈물도 흘리고 마음에 와 닫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꿔다놓은 보리짝처럼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냥 몸만 왔다가 아무 느낌도 없이 그냥 가버리려면 뭐 하러 교회에 옵니까?
4)겸손한 감탄과 기쁨의 표현이 예배이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오라고 했더니 교회에 가면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못 간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나서 교회에 가니 어떠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목사님 말씀대로 앞 사람이 일어서면 일어서고 앉으면 앉고 그러다가 왔다고 하더랍니다.
물론 처음교회에 가니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오랫동안 교회에 다닌 사람들 중에도 의미도 모르고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하다가 그냥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배시간에 일어설 때는 하나님 앞에서 예의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손을 들고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거기 진심의 고백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나에게 주어진 은혜에 대해서 기쁨을 나타내는 것이 예배입니다.
제가 복지선교를 하다가 보니까 여기저기 가서 후원금이나 지원금을 받아와야 합니다.
어떤 때는 저도 사람인지라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기쁜 얼굴을 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돈 주는 사람이 기분이 되게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감사하다고 하고 잘 쓰겠다고 하고 기쁜 얼굴을 해야 또 주지 시원찮게 하다가는 다음에 끊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그 까짓것 후원금 몇 푼 받는 것하고 비교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엄청난 은혜를 하나님께 받은 사람들입니다.
감사 감사 감격 또 감격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춤을 출 만한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태도를 보면 꼭 뭐 빼앗긴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 마음들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알고 보면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십니다.
엄청난 은혜를 우리에게 특별히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영적인 예배와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좋아하시고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예배의 참된 의미를 바르게 알고 신령한 예배 영적인 예배를 드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산 돌이신 예수님처럼 산 돌이 되어서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한 제사장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신령한 예배 즉 영적인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즉 영적인 예배 진리 안에서 드리는 이 예배를 드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