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15.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후31)
본문 : 딤후 4:6-8
제목 :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6.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지난 시간에 6~7절 말씀을 가지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의 생애는 믿음을 지키기 위한 생애였습니다. 전제가 포도주를 제물 위에 붓는 것처럼 자신의 삶도 마지막까지 이 믿음을 지키는 일에 헌신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믿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싸웠고 믿음을 위해서 끝까지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기 위해서이고 또 이 믿음이 거짓 선생들에 의해서 변질되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음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은 그 믿음을 지킨 결과가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자신이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도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끝까지 달렸는가 하면 그 믿음을 지킨 사람에게 주어지는 엄청난 것이 무엇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자신을 위해서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사도바울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이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본문 8절 말씀 앞부분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의 삶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삶이었고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한 삶이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하여 죽을힘을 다하여 달려왔다고 했습니다.
본문 8절의 말씀은 그런 삶을 산 결과를 이야기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확실히 믿은 것처럼, 그 믿음의 결과로 인해서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 보면 불확실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도쿄 올림픽이 막을 내렸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4년 동안 준비했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금메달의 꿈을 가슴에 품고 엄청난 훈련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올림픽에 참가했고 최선을 다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량을 다 발휘해서 끝까지 죽을힘을 다해 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1등을 해서 금메달을 목에 건 사람은 그 종목에 한 사람만 받게 됩니다. 나머지 많은 사람은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동안 노력했던 것이 아무런 결과도 내놓지 못하고 헛된 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런 금메달 정도가 아닌 의의 면류관을 받는 일을 아주 자신 있게 당연하게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제 이후로는 다시 더 노력할 것도 없고 애타게 초조하게 기다릴 것도 없이 당연하게 받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즘 텔레비전 프로는 서로 경쟁시켜서 경선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노래를 불러도 다 평가를 하고 점수를 매기고 1등을 정합니다. 그냥 재미있게 노래만 부르면 되지 왜 그렇게 서로 경쟁을 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경선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1등을 한 사람은 기분이 좋겠지만 나머지는 다 기분이 나쁩니다. 합격한 사람은 기뻐서 울고 떨어진 사람은 기분 나빠서 웁니다. 노래를 불러놓고 평가를 기다리고 점수 발표를 기다리는 순간은 참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참가만 하면 다 1등이 되고 참가만 하면 모든 사람이 다 기뻐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서로 경쟁을 해서 이긴 사람에게만 면류관을 준다면 참 힘들게 믿음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가만 하면 모든 사람이 다 1등이 되어 면류관을 받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믿음만 있으면 승리자요 다 1등처럼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믿음을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라고 하신 것처럼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믿음만 있으면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돈도 없고 배경도 없습니다. 특별히 남들보다 잘난 것도 없습니다. 특별히 남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 덕분에 이 믿음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그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의의 면류관”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면류관”은 당시 운동경기의 승리자에게 주는 것으로 월계수 나무나 상수리 나뭇잎을 엮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믿음을 지키고 승리한 사람에게 주는 승리의 관을 말합니다.
“의의” 면류관이라고 한 것은 믿음을 가진 자에게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이신칭의”의 의를 말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해주시겠다고 했는데 그 의로움을 인정해주신다는 약속대로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이 의의 면류관은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앞서 배운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서 취하는 것은 영생이라고 했기 때문에 여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받는 의의 면류관은 그 영생을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믿음은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요 3:3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라고 했습니다.
“예비 되었으므로”라는 말은 단순히 준비하고 있다는 말보다 더 강한 의미인 따로 떼에 놓았다, 결정되어 있다, 보존하고 있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미 준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확실하게 결정해서 따로 보존해 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본문 8절 말씀 중간에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주님이 되신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들어서 잘 아시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의로우신 재판장이 되실 것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여기 ‘그날’이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그 날을 말합니다.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그때는 아주 화려한 모습으로 천군 천사를 거느리고 영광중에 오실 것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이나 몰랐던 사람이나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처음 오셨을 때는 메시야로 구원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다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재림하실 때는 심판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시면서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그 구원의 복음을 제자들을 통해서 전도자들을 통해서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믿지 않고 죄악 중에서 그대로 사는 사람들을 심판하여서 지옥 불에 던지기 위해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의의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 오시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가 행한 행위대로 심판하기 위해서 벌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오십니다.
우리 예수님을 재판장이라고 하면서 “의로운 재판장”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공정하게 바르게 재판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검사나 판사들은 정확하지도 못하고 공정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사람이 행한 것을 사실대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알아도 뇌물을 받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편을 봐주기도 하기 때문에 불공평한 재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다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모든 것을 공정하게 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믿는 자에게 특혜를 베푸셔서 불공정한 것처럼 생각하실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잘한 것 가지고 상을 주시고 안 믿는 사람은 잘못한 것만 가지고 벌을 주시니까 불공정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공의로우신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심판의 기준을 세상 사람들에게 다 공포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그 의의 기준은 믿음이라고 이미 세상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문서로 기록해서 사람들이 다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제가 수시로 인용하는 로마서 1장 17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 되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저는 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말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의 기준은 “믿음에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믿음이고 끝까지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이고 오직 믿음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의롭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아무리 의로운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것을 구원에 이를만한 의로움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존경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을 의의 기준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두 가지 면에서 의로운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 선행 못지않게 악한 것도 있으며 사람은 그 죄를 보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다 보시고 아시기 때문에 그런 몇 가지 선한 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좋은 생각으로 다른 사람의 선한 일을 보면 칭찬도 해주고 격려도 해줍니다. 그런데 몇 가지만 잘하고 잘못하는 것이 많은 사람을 칭찬만 하면 사람들도 비웃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더 잘 아는데 그런 것 가지고 칭찬받을 사람이 아니고 나쁜 일도 많이 하는데 조금 잘한 일 가지고 칭찬만 하면 오히려 그 사람에게 욕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만 가지고 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그 기준을 정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베소서 2장 8~9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때가 되면 우리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나에게 있는 믿음을 보시고 이미 은혜로 선물로 주신 그 믿음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의의 면류관 영생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비록 추악하지만 죄가 엄청나게 많지만 별로 잘한 것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칭찬받지 못한 삶을 살았지만 오직 그 믿음만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본문 8절 말씀 끝부분에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 같은 사람은 의의 면류관을 받기에 충분한 사람입니다. 믿음도 소중하게 여기고 끝까지 지켰지만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쓴 것만 보아도 그런 사람에게 면류관을 안 주면 누구에게 주겠습니까?
그래서 만약 사도바울이 여러분도 의의 면류관을 받으려면 나처럼 사세요. 그래야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흉내라도 내어보려고 노력해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까지 하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포기하시겠습니까?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그렇게 헌신한 자신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면서 기다리고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이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모하면서 기다리면서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일까요? 아닙니다. 정말로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사모하면서 애정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워하면서 반갑게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사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절망 가운데서 참되고 기쁜 일에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스러운 일은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죽을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대책 없이 기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아파서 수술할 날을 받아놓고 기다리거나 입학시험이나 입사시험날을 받아놓고 그날을 기다리거나 해결할 수 없는 재난의 날을 기다리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그런 고통스러운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최악의 날이 될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을 사모하면서 사는 것이 뭐 어렵습니까? 그날을 사모하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는데 얼마나 즐거운 기다림입니까? 세상 근심 걱정 고통 괴로움은 다 물러가고 멋있고 행복한 세상이 시작된다는데 뭐가 두렵습니까?
우리가 가진 믿음 속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매주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에는 이 재림을 믿고 기다린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나의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늘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사모하면서 기다리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다리기만 하면 기다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의의 면류관 영생의 면류관을 받을 줄 확신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시고 여러분이 가진 이 믿음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믿음을 지키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다시 오시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우리가 다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오시기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모든 사람이 이 면류관을 받고 기뻐 뛰며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믿음을 지키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