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15.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06)
본문 : 벧전 1:8-9
제목 :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옛날에 어떤 새댁이 시집을 갔더랍니다.
하루는 냇가에 나가서 빨래를 해 가지고 돌아오는데 어떤 남자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따라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냅다 도망을 쳐서 집에 와보니까 아까 그 히죽히죽 웃던 사람이 집에까지 따라 들어오더랍니다.
결혼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신랑 얼굴을 몰랐더라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신랑과 신부가 서로 보지도 못하여도 부모님이 결혼을 하라고 하면 했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성격도 모르고 결혼을 했어도 그래도 끝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요즘은 맞선을 보고 서로 몇 년 동안이나 서로 사귀어 보고 알 것 다 알고 결혼을 해도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서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계약서니 공증이니 그런 것 필요 없이 서로의 말만 믿고도 모든 일들이 그 말한 대로 잘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뭐 좀 하려고 하면 말로만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계약서를 쓰고 그것도 못 믿어서 공증을 받고 보증인을 세우고 그렇게 해도 약속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랑은 참 계산적이고 오늘날의 사람과의 관계는 철저하게 돈이나 물질로 보증이 되어야 믿을 수 있는 그런 세상입니다.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은 찾을 수 없고 누가 보증을 서 주지 않아도 확실하게 믿어 주는 그런 믿음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이 서신서를 쓸 때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사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믿고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우리 성도님들도 그런 사랑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성도님들도 그런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글을 쓴 베드로와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다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설교, 예수님의 기적, 예수님의 죽으심,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승천, 이 모든 것을 그들의 눈으로 다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사랑하면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고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보고 안 사람들이라면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보고 바르게 안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서신을 받는 소아시아 교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참으로 대견스럽게 보였을 것입니다.
보지도 만나지도 못한 그 예수님이 좋아서 삶의 터전도 버리고 세상의 부귀영화는 생각하지도 않고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사는 것조차 포기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따르고 있는 그들이 참으로 대견스러웠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까지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수천 년 전에 오셨던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해서 지금 나에게 불이익이 돌아오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한다고 해서 뭐 나에게 지금 손해가 날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에는 희생과 헌신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 생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 없는 남편들이 아내에게 하는 말이 ‘교회에 다니기는 해도 깊이 빠지지는 말아라.’라고 한답니다.
적당히 교회에 가서 구경이나 하고 취미생활이나 하지 예수님을 사랑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무슨 근거가 있고, 생기는 것이 있고, 이익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보지도 못하고, 증거도 없고, 현실적으로 아무 이익도 없는 일에 목숨을 걸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성도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대강 적당히 교회에 왔다가 갔다고 하다가 건질 것이 있으면 좀 건지고 희생해야 할 일 내가 손해 보아야 할 일이 있으면 빠져나오고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고 사랑하겠다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뭔가 좀 눈에 보이면 하다못해 환상이나 꿈이라도 좋으니까 예수님을 한번 만나봤으면 사랑하겠는데 보이기를 합니까? 만질 수가 있습니까? 느껴지기를 합니까?
아무 형체도 증거도 없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래도 목사지만 예수님을 꿈이나 환상 가운데서라도 직접 만나거나 음성을 듣거나 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눈앞에서 뭔가 확 달라지는 소위 말하는 그런 기적한번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기적은 체험하는 것은 고사하고 기적을 행한다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만 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전 어려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너무 어려운 시절을 보낸 사람입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서 세상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하루는 산에 올라갔습니다.
하늘을 향해서 삿대질을 하면서 하나님 도대체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시고 마음이 좋으십니까?
하나님이 계시기는 하신 것입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우리 예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십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좋은 것을 너무나 쉽게 주시고 조금도 아까워하시지 않으시고 더 못주셔서 안타까워하시는 그분이 우리 예수님이라는 것은 뒤늦게 알았습니다.
세상은 참 몰인정합니다.
내가 어떤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돌아오는 것이 없는 세상입니다.
수고한 것만큼도 되돌려주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호의를 베풀면서도 생색은 되게 내는 그런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좋은 것을 주시면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면서도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귀한 자리를 주시면서도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 있는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 아름다운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면서도 어떤 조건 같은 것을 내걸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시면서도 형벌을 받게 하시지도 않고 꾸지람도 나무람도 없이 그냥 용서해 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나보지 않아도 음성을 듣지 않아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제일 우선순위를 두고 삽니다.
저도 꽤나 세상일들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돈도 참 좋아합니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일도 참 좋아합니다.
오락도 좋아하고 노름도 좋아합니다.
가끔 술에 취해서 길거리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보면 아 나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저렇게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강원도 어디에서 도박장에서 돈을 다 잃고 거지가 되어서 산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예수님 믿지 않았으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좋아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좋으신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아무리 살아봐도 예수님 같은 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책들을 뒤져봐도 우리 예수님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몰라서 그렇지 만약에 다 안다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 예수님을 직접 만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보다 훨씬 더 좋으신 예수님을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만나보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분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더 사랑해도 좋을 분이십니다.
2.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오늘 본문 말씀에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세상에 오셨던 분이시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뒤에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당연히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소아시아에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은 예수님을 불 수 없는 시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고 “지금도 보지 못하나“ 라고 한 것은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과거에도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을 지금에 볼 수는 더욱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볼 수 없다는 말은 예수님을 볼 수 없다는 말 보다는 예수님에 관한 증거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을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그 약속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을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들을 믿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고 따랐을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냥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너무너무 좋아서 말로 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노래하면서 춤을 추면서 기뻐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우리가 그대로 볼 수 있다면 그들이 전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없는 너무 힘이 들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것은 흡사 짐승이 사는 것만도 못하는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렇게 즐거워하면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들처럼 지금도 보지 못합니다.
뭐 예수님을 믿는다고 지금당장 무엇이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돈이 생기지도 않고 출세가 보장되지도 않고 뭐 특별히 더 즐거운 일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뭔가 좀 눈에 보이게 달라진다면 누가 믿지 않고 누가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믿는다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고 뭔가 신나는 일이 생긴다면 누가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이 들고 이렇게 우울한 일이 많고 이렇게 걱정되고 근심되는 일이 많은데 뭘 믿고 뭘 가지고 어떻게 기뻐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진짜 믿음만 있다면 우리에게 지금 당장 보이는 그 무엇이 없다고 해도 정말로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들이 너무나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만 안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삶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당시의 사람들에게 비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 이렇게 자유롭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지 못해서입니다.
믿음에는 지, 정, 의, 이 세 가지의 요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요소는 지 즉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모르는 것을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믿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다 알고 믿습니다.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동의하는 것 혹은 감동을 받는 것 혹은 확신을 갖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음의 첫 번째 요소는 가지고 있는데 두 번째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머리로만 믿고 가슴으로 뜨겁게 느끼지 못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냉랭하게 앉아 있는 것이 참 이상합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감정을 나타내는 일을 막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을 막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뜨거운 감동이 있어야 그 다음단계인 실천에 들어갈 텐데 느낌이 없으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도 못하고 그래서 실천에 옮기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그저 머리로만 믿는 믿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머리에 있는 것을 좀 가슴으로 끌어내려 보십시오.
좀 감격하고 감동해 보십시오.
좀 느껴보고 가슴에 와 닿거들랑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춤을 추고 해 보시라고요
뭘 그리 만날 심각하게 생각만 합니까?
우리도 그들처럼 말할 수없는 영광으로 즐거워하면서 기뻐해 보자니까요
어떻게 좀 해보세요.
성경을 다시 읽어보시든지 산속에 들어가서 더 연구를 해 보시던지 기도를 더 많이 해 보시던지 좀 어떻게 해서 진리를 더 알아보세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그 놀라운 약속들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위대한 축복들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고 기뻐하면서 즐거워하면서 춤을 추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본문 말씀에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즐거워하면서 기뻐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그것의 결국은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영혼의 구원이란 육신과 상관이 없는 영혼의 구원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육간의 온전한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을 새로운 몸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의 결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 그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대가없는 헛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지상최고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는 믿음입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데 뭘 재어보고 뭘 망설이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개만 끄덕이면 그렇게 시인만 하면 그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그대로 주어진다는데 뭘 그렇게 머리를 굴리면서 증거를 찾고 있습니까?
그냥 그렇게 믿고 다 받아가세요
믿음의 결과가 있으나 마나한 시시한 것이라면 제가 이렇게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마음이나 좀 편하고 세상에서 하는 일들이나 좀 잘 되고 하는 그런 것이라면 이렇게 주일마다 이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도 세상의 축복들과 세상의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복을 받고 야곱이 어떤 재주가 있었고 솔로몬이 어떤 지혜가 있었는지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믿음의 소중함을 알고 나니까 다른 이야기는 시시해서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구원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딴 이야기는 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결국이 영혼의 구원을 받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시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결국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소중히 여기시고 더 발전시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결과가 얼마나 귀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시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벧전 1:8-9
제목 :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옛날에 어떤 새댁이 시집을 갔더랍니다.
하루는 냇가에 나가서 빨래를 해 가지고 돌아오는데 어떤 남자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따라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냅다 도망을 쳐서 집에 와보니까 아까 그 히죽히죽 웃던 사람이 집에까지 따라 들어오더랍니다.
결혼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신랑 얼굴을 몰랐더라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신랑과 신부가 서로 보지도 못하여도 부모님이 결혼을 하라고 하면 했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성격도 모르고 결혼을 했어도 그래도 끝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요즘은 맞선을 보고 서로 몇 년 동안이나 서로 사귀어 보고 알 것 다 알고 결혼을 해도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서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계약서니 공증이니 그런 것 필요 없이 서로의 말만 믿고도 모든 일들이 그 말한 대로 잘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뭐 좀 하려고 하면 말로만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계약서를 쓰고 그것도 못 믿어서 공증을 받고 보증인을 세우고 그렇게 해도 약속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랑은 참 계산적이고 오늘날의 사람과의 관계는 철저하게 돈이나 물질로 보증이 되어야 믿을 수 있는 그런 세상입니다.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은 찾을 수 없고 누가 보증을 서 주지 않아도 확실하게 믿어 주는 그런 믿음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이 서신서를 쓸 때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사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믿고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우리 성도님들도 그런 사랑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성도님들도 그런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글을 쓴 베드로와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다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설교, 예수님의 기적, 예수님의 죽으심,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승천, 이 모든 것을 그들의 눈으로 다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사랑하면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고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보고 안 사람들이라면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보고 바르게 안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서신을 받는 소아시아 교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참으로 대견스럽게 보였을 것입니다.
보지도 만나지도 못한 그 예수님이 좋아서 삶의 터전도 버리고 세상의 부귀영화는 생각하지도 않고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사는 것조차 포기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따르고 있는 그들이 참으로 대견스러웠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까지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수천 년 전에 오셨던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해서 지금 나에게 불이익이 돌아오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한다고 해서 뭐 나에게 지금 손해가 날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에는 희생과 헌신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 생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 없는 남편들이 아내에게 하는 말이 ‘교회에 다니기는 해도 깊이 빠지지는 말아라.’라고 한답니다.
적당히 교회에 가서 구경이나 하고 취미생활이나 하지 예수님을 사랑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무슨 근거가 있고, 생기는 것이 있고, 이익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보지도 못하고, 증거도 없고, 현실적으로 아무 이익도 없는 일에 목숨을 걸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성도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대강 적당히 교회에 왔다가 갔다고 하다가 건질 것이 있으면 좀 건지고 희생해야 할 일 내가 손해 보아야 할 일이 있으면 빠져나오고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고 사랑하겠다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뭔가 좀 눈에 보이면 하다못해 환상이나 꿈이라도 좋으니까 예수님을 한번 만나봤으면 사랑하겠는데 보이기를 합니까? 만질 수가 있습니까? 느껴지기를 합니까?
아무 형체도 증거도 없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래도 목사지만 예수님을 꿈이나 환상 가운데서라도 직접 만나거나 음성을 듣거나 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눈앞에서 뭔가 확 달라지는 소위 말하는 그런 기적한번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기적은 체험하는 것은 고사하고 기적을 행한다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만 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전 어려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너무 어려운 시절을 보낸 사람입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서 세상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하루는 산에 올라갔습니다.
하늘을 향해서 삿대질을 하면서 하나님 도대체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시고 마음이 좋으십니까?
하나님이 계시기는 하신 것입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우리 예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십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좋은 것을 너무나 쉽게 주시고 조금도 아까워하시지 않으시고 더 못주셔서 안타까워하시는 그분이 우리 예수님이라는 것은 뒤늦게 알았습니다.
세상은 참 몰인정합니다.
내가 어떤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돌아오는 것이 없는 세상입니다.
수고한 것만큼도 되돌려주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호의를 베풀면서도 생색은 되게 내는 그런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좋은 것을 주시면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면서도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귀한 자리를 주시면서도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 있는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 아름다운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면서도 어떤 조건 같은 것을 내걸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시면서도 형벌을 받게 하시지도 않고 꾸지람도 나무람도 없이 그냥 용서해 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나보지 않아도 음성을 듣지 않아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제일 우선순위를 두고 삽니다.
저도 꽤나 세상일들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돈도 참 좋아합니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일도 참 좋아합니다.
오락도 좋아하고 노름도 좋아합니다.
가끔 술에 취해서 길거리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보면 아 나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저렇게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강원도 어디에서 도박장에서 돈을 다 잃고 거지가 되어서 산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예수님 믿지 않았으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좋아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좋으신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아무리 살아봐도 예수님 같은 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책들을 뒤져봐도 우리 예수님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몰라서 그렇지 만약에 다 안다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 예수님을 직접 만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보다 훨씬 더 좋으신 예수님을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만나보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분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더 사랑해도 좋을 분이십니다.
2.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오늘 본문 말씀에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세상에 오셨던 분이시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뒤에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당연히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소아시아에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은 예수님을 불 수 없는 시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고 “지금도 보지 못하나“ 라고 한 것은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과거에도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을 지금에 볼 수는 더욱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볼 수 없다는 말은 예수님을 볼 수 없다는 말 보다는 예수님에 관한 증거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을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그 약속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을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들을 믿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고 따랐을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냥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너무너무 좋아서 말로 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노래하면서 춤을 추면서 기뻐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우리가 그대로 볼 수 있다면 그들이 전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없는 너무 힘이 들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것은 흡사 짐승이 사는 것만도 못하는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렇게 즐거워하면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들처럼 지금도 보지 못합니다.
뭐 예수님을 믿는다고 지금당장 무엇이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돈이 생기지도 않고 출세가 보장되지도 않고 뭐 특별히 더 즐거운 일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뭔가 좀 눈에 보이게 달라진다면 누가 믿지 않고 누가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믿는다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고 뭔가 신나는 일이 생긴다면 누가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이 들고 이렇게 우울한 일이 많고 이렇게 걱정되고 근심되는 일이 많은데 뭘 믿고 뭘 가지고 어떻게 기뻐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진짜 믿음만 있다면 우리에게 지금 당장 보이는 그 무엇이 없다고 해도 정말로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들이 너무나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만 안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삶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당시의 사람들에게 비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 이렇게 자유롭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지 못해서입니다.
믿음에는 지, 정, 의, 이 세 가지의 요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요소는 지 즉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모르는 것을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믿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다 알고 믿습니다.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동의하는 것 혹은 감동을 받는 것 혹은 확신을 갖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음의 첫 번째 요소는 가지고 있는데 두 번째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머리로만 믿고 가슴으로 뜨겁게 느끼지 못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냉랭하게 앉아 있는 것이 참 이상합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감정을 나타내는 일을 막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을 막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뜨거운 감동이 있어야 그 다음단계인 실천에 들어갈 텐데 느낌이 없으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도 못하고 그래서 실천에 옮기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그저 머리로만 믿는 믿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머리에 있는 것을 좀 가슴으로 끌어내려 보십시오.
좀 감격하고 감동해 보십시오.
좀 느껴보고 가슴에 와 닿거들랑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춤을 추고 해 보시라고요
뭘 그리 만날 심각하게 생각만 합니까?
우리도 그들처럼 말할 수없는 영광으로 즐거워하면서 기뻐해 보자니까요
어떻게 좀 해보세요.
성경을 다시 읽어보시든지 산속에 들어가서 더 연구를 해 보시던지 기도를 더 많이 해 보시던지 좀 어떻게 해서 진리를 더 알아보세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그 놀라운 약속들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위대한 축복들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고 기뻐하면서 즐거워하면서 춤을 추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본문 말씀에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즐거워하면서 기뻐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그것의 결국은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영혼의 구원이란 육신과 상관이 없는 영혼의 구원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육간의 온전한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을 새로운 몸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의 결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 그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대가없는 헛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지상최고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는 믿음입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데 뭘 재어보고 뭘 망설이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개만 끄덕이면 그렇게 시인만 하면 그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그대로 주어진다는데 뭘 그렇게 머리를 굴리면서 증거를 찾고 있습니까?
그냥 그렇게 믿고 다 받아가세요
믿음의 결과가 있으나 마나한 시시한 것이라면 제가 이렇게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마음이나 좀 편하고 세상에서 하는 일들이나 좀 잘 되고 하는 그런 것이라면 이렇게 주일마다 이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도 세상의 축복들과 세상의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복을 받고 야곱이 어떤 재주가 있었고 솔로몬이 어떤 지혜가 있었는지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믿음의 소중함을 알고 나니까 다른 이야기는 시시해서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구원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딴 이야기는 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결국이 영혼의 구원을 받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시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결국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소중히 여기시고 더 발전시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결과가 얼마나 귀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시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