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31.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후5)
본문 : 딤후 1:10-11
제목 :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
“10.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불행한 것은 뭘 잘 볼 수 없고 잘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잘 모르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공부하고 책을 읽고 인생을 먼저 산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음으로써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예측을 잘하고 대비하면서 사는 사람은 비교적 성공한 삶을 살고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은 실패자로 살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나 이 세상의 삶이 아닌 영원한 세상에서의 삶은 우리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가게 될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알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잘 알고 대비하면서 사는 사람과 잘 모르고 그냥 사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그런 면에서 저와 여러분은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생의 과거나 미래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가는 방법도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잘 알고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고 사는 사람은 비교적 이 세상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고 살면 확실하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타나심”, “나타났으니”, “드러내신지라”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었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알게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본문 10절에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절을 “이제는”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지난주에 배운 9절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지난주 설교 제목 생각나십니까?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심”이 지난주 설교 제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받을 자리로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을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심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받을 자리로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이 우리의 행위대로 부르심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지명하여 불러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대로 시작되고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제는”은 그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그 구원이 이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계획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실행되어가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나타내어서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서 영원 전부터 예정하신 그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나타나심’은 ‘출현’, ‘현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눈에 보이게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탄생이라는 말로 쓰지 않고 나타나심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지금 아이로 새 생명으로 태어나신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라고 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로 태어나심을 사실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님이 누구인지 태어난 장소가 어디인지 태어날 때 일어난 특별한 현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관심을 가지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고 로고스 즉,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오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나타나심”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드디어 우리에게 나타나시어 그 모습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아이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계획대로 약속대로 이 세상에 나타나셔서 그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여기에 나타나심이라는 단어가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에 있는 “예수의 나타나심”에서 나타나심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뒤에 나오는 “나타났으니”라는 단어는 앞의 단어와 그 뜻이 다른 단어입니다. “나타났으니”는 나타내다, 보이게 하다, 밝히다, 명백하게 보여주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즉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냥 오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오셔서 무엇을 하실지를 확실하게 알도록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나타나신 분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금방 듣고도 잊어버리고 또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버리는 일이 많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이나 직책이나 별명에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구주”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구원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지난주에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으로부터 구원인지 자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그 구원을 실행하기 위해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역시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내주셨다고 약속하신 메시야를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 믿음 고백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도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사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 뜻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구원자이고 그 구원을 더 자세히 설명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대표적인 호칭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는 모든 단어가 다 구원을 의미하고 죄에서의 구원을 의미하는 단어들입니다.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서 메시야이신 구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음을 모든 사람에게 밝히 나타내어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라고 했습니다.
“드러내신지라”라는 말은 빛이나 광명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밝게 하다, 비추다, 조명하다, 드러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나타났으니”와 비슷한 말이 “드러내신지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셔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러 오신 분인지를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라고 했는데 그 말을 현대인 성경에서 좀 쉽게 번역했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없애 버리시고 기쁜 소식으로써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망을 폐하시고”라고 했는데 “죽음을 없애버리시고”라는 말입니다. “없애버렸다”라는 것은 “무기력한 것이 되게 하다, 쓸모없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의 생명이 죽는 것 자체를 없애버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죽음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무기력한 것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죽인다고 해도 다시 살 수 있다면 그 죽임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사망인 지옥의 형벌로 들어가는 것을 없애버리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다 육신의 생명이 죽는 것뿐만 아니라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없애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실을 입증해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죽는 것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슬퍼할 일이기는 하지만 더 나은 생명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죽음은 오히려 더 좋은 것이 됩니다.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라고 했습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만 많은 의미들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 그 구원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확실히 밝혀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 부활하여 다시 받을 생명은 썩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받은 영원한 생명은 썩어지거나 없어지거나 변질되지 않는 영원하고 확실한 생명입니다. 지옥의 형벌도 받지 않고 영원한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게 될 완전한 생명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본문 11절에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라고 했습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복음을 알고 난 후에 그 복음을 위해서 평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했지만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복음을 위하는 삶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고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삶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우선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착하고 바르게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얼른 말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큰 구원을 받은 사람이 대강 적당히 살면 안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음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바르게 당당하게 선하게 살았다고 자랑하는 사람 중에는 잘못하면 이 복음을 과소평가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충성도 많이 하고 주일도 잘 지키고 율법도 잘 지키고 산다고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진 사람 중에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선행이나 종교적 행위들은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그런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 수 없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는 것은 복음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사실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선을 행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조금 잘한 것 가지고 다 잘했다고 착각하거나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위선자일 뿐입니다.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받고 그 직무를 잘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선포자나 사도나 교사는 어떤 직분을 말하기보다는 사역을 말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바울은 사도라고 세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사도로서 선포자로서 교사로서 하는 일을 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주님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위탁하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도로서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사역도 이 복음을 선포하고 이 복음에 대해서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진리의 복음이 아닌 오히려 복음과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은 목회자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른 설교에 '아멘' 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를 도와주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우리를 구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나타내어 보여주시고 드러내 주심을 살펴보았습니다.
구원의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늘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위하여 사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는 일에 전도하며 선교하는 일에 함께 힘쓰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