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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20.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전 49)
본문 : 딤전 6:18-19
제목 :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18.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 세상을 부자로 사느냐 가난한 자로 사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부자로 사는 것과 가난하게 사는 것은 인생의 질을 다르게 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그래도 좀 더 멋있는 삶을 살고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잘 살아도 부자에게 비하면 어렵게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복을 많이 주어서 부자가 되게 해주시면 참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비교적 더 많은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복의 개념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고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복이고 세상의 쾌락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부자로 쾌락을 즐기면서 사는 것보다 이 세상은 하룻밤 꿈처럼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임을 알고 진정한 행복의 나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쌓아 두는 것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사람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믿음을 위해 좋은 일이지만 사람의 본성이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열심히 살다가 보면 믿음을 가진 사람도 부자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부자가 되게도 해주십니다.
어떻게 했든지 부자가 된 사람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17절 말씀에 이 세대에 부자로 사는 사람들은 특별히 잘 교육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자로 사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행복할지 몰라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믿음 생활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만해지기 쉽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보다는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기 쉽기 때문입니다. 돈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줄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믿음을 빼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계속해서 이 세대에 부한 자들에게 가르치고 권면하라는 말씀입니다. 앞 절의 말씀이 무엇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라면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적극적으로 부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렇게 사는 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라고 했는데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부자가 된 사람은 잘못하면 그 재물 때문에 가장 귀한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부자라도 이렇게 하면 참된 생명을 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이미 부자이시든지 부자가 되려고 하시든지 참된 생명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 부로 인하여 참된 생명을 취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선을 행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본문 18절 말씀에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이 선한 것이 있고 반대로 악한 것이 있습니다. 선은 하나님께 주신 것이며 악은 인간의 탐욕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악을 버리고 선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잠 13:15)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 16:24)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잠 22:9)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도 늘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서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선을 따르는 것이 바른 삶을 사는 것이며 참된 행복의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사람도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 6:12)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말씀을 대할 때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구절만 보면 마치 선을 행함으로써 의로운 사람이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황 주의자들은 이 구절에서 우리가 선한 일들에 의한 공로로 영생을 받을 수 있다는 추론을 드러내는데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어리석은 노릇이다”라고 했습니다.
중세시대의 타락한 로마 가톨릭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내세워서 행함을 강조하고 충성을 강조하여 성도들을 착취하여 자신들은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이런 선행을 강조하는 본문을 내세워서 자신들의 교리를 합리화했습니다. 칼빈은 이어서 말하기를 “그러나 우리 중에 아무리 완전한 사람이라도 각자의 완전한 임무를 백 분의 일이라도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관용은 하나님 앞에서 계산에 집어넣을 가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서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하지만 그 선행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만한 점수가 백 점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그중에 일 점이라도 점수를 따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용 즉 선행은 구원에 관한 점수를 계산할 때 거기 집어넣을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선행이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당연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우리의 믿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행이 믿음으로 사는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선한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선한 일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는 일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이 선한 일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알고 믿는 것이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선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0-11)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은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일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돈일지라도 도둑처럼 우리를 멸망시키고 죽이는 것이지만 예수님만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그 부를 가지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을 함에 있어서도 이 말이 선한 말인지 악한 말인지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앞서 인용한 잠언의 말씀처럼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 16:24)라고 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어떤 말은 듣는 사람이 꿀송이처럼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좋아요, 감사합니다, 힘내세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이런 좋은 말들은 자주 많이 하세요. 사랑을 많이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이런 말들을 잘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 한마디가 인간관계에 참 좋은 역할을 합니다.
반대로 어떤 말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육신의 건강까지 해치는 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한 말인데 듣는 사람은 두고두고 상처가 되는 말이 있습니다. 잊어버린다고 했는데도 가끔 생각이 나서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잠 22:9)라고 했습니다. 선한 눈은 남의 좋은 점을 보는 눈이고 악한 눈은 남의 나쁜 점을 보는 눈입니다. 선한 눈으로 남의 어려움을 보고 불쌍히 여길 줄 알고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라는 것은 선한 일에 부요한 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자꾸 재물을 쌓고 더 쌓아서 더 부자가 되려고 하지만 말고 선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자이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가난하면서 부자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를 위해서만 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해서 남에게 나누어줄 것이 없어서 나누어주지 못한 사람이야 어쩔 수 없지만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자기를 위해서는 많은 돈을 쓰면서 남에게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비록 가진 것이 많지 않아서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기의 것을 남에게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이 참으로 부자입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작은 것이라도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이 진짜 부자입니다.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나누어 줄줄 아는 사람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마음이 너그럽지 못한 사람은 남에게 좋은 것을 나누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평소에 그 마음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돈 앞에 서보면 그 사람의 본심이 나타납니다. 내 욕심을 차리기에 급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에게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욕심을 차리고 싶어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선한 사람입니다. 돈보다 인간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롭고 선한 사람입니다.
돈은 또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인간관계는 회복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 때문에 소중한 인간관계를 놓치고 사람에게 불신을 받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그 좋은 머리를 써서 자기의 이익을 챙깁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 지혜를 가지고 자기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잘 될 것 같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본문 19절에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는 것은 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자신은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 좋은 터를 쌓아서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터를 쌓는다는 것은 든든한 기초를 쌓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일에는 그 기초가 있고 그 기초가 든든해야 그 일이 든든하게 세워집니다. 기초가 없거나 부실하면 그 일이 쉽게 무너지고 밉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그 기초가 든든해야 합니다. 기초가 든든하지 못하면 쉽게 믿음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교회를 떠나는 사람은 대부분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든든한 믿음의 뿌리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다고 해도 다 뿌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든든한 기초는 살아가면서 믿음의 훈련을 받고 믿음을 삶에서 실천할 때 든든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 믿음을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으로 가지게 해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가지게 해주시는가는 잘 모릅니다. 또 사람마다 그 역사하심이 다르기도 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에 먼저 정지작업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정지작업이 믿음의 든든한 기초를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그 기초를 쌓는 정지작업이 우리가 선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고 나보다 남을 위해서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선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바른 믿음을 가지기도 힘들고 가져봤자 금방 변하고 금방 시들고 마는 것입니다. 복음의 씨가 그의 마음 밭에 심어진다고 해도 길가와 같이 마음이 딱딱하거나 돌밭과 같이 부정적인 것이 많이 있거나 가시떨기와 같이 세상 염려로 가득 찬 사람은 그 복음의 씨가 자라지도 못하고 열매 맺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요즘같이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세상에서 이렇게 산다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유익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익도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 말씀에서 마태복음 6장의 말씀과 병행되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0-21)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위해서 쓰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금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선을 행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든든한 기초를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참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육신의 생명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참된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주시는 생명이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참된 생명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을 위하여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육신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믿음을 가지고 믿음 생활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참된 생명이란 “열매가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도 그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생명에만 관심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세상적인 쾌락을 누리는 데 급급하지 말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사람답게 살아야 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참된 생명을 가진 사람의 보람된 삶이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든든한 기초를 쌓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부러 가난하게 살고 어렵게 살려고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부자도 되시고 좋은 일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부자가 되면 조심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높여 교만한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나누어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장래에 올 영원한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믿음의 좋은 터를 쌓으시기 바랍니다.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답게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