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1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이 05)
본문 : 요이 1:12-13
제목 :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에이든 토저(A. W. Tozer) 목사님은 “20세기의 선지자라고 불림을 받았지만 그의 글은 21세기에 더욱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가 타락하고 부패하여 본질을 잃어갈수록 그의 메시지는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책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에서 기독교가 부패해져가는 과정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단계는 “기계적인 상태”라고 했습니다.
아무런 느낌이 없이 기계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아무런 감정이나 느낌도 없이 의미나 감탄도 없이 어떠한 행복한 놀라움이나 기대감도 전혀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반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단계는 “습관적인 상태”라고 했습니다.
기계적 상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습관적인 상태가 된다고 했습니다.
기계적인 상태가 오래되면 자기 자신이 기계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습관적으로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무런 감정이 없이 기계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것이 심각한 병인지도 모르고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3단계는 “부패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부패를 재정적인 부패나 도덕적인 부패로만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정말로 심각한 부패는 내 마음의 부패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의 부패는 영적으로 경직된 상태라고 했습니다.
더 좋은 것을 기대하거나 더 성장하기를 원하지 않고 기계적이거나 습관적인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심각한 부패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가 이런 심각한 부패에 빠진 것 같습니다.
교회가 기쁨이 없습니다. 교회가 소망이 없습니다. 교회가 영적인 부흥이 없습니다.
그저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로 심각한 부패상태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현대교회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강해설교를 하는데 있어서 좀 어려울 때가 오늘과 같은 본문을 만날 때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단순히 인사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옛날에 편지를 쓸 때 다 써놓고 마지막에 “할 말은 많지만 나중에 만나서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라고 썼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단순한 인사말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현대어로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잉크로 쓰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기쁨을 충만하게 나누길 원합니다.
택하심을 받은 그대 자매의 자녀들이 그대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할 말이 많지만 글로 쓰는 것은 그만 쓰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찬 진리의 말씀을 그저 글 몇 자로 적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계가 있는 글로 몇 마디 더 쓴다고 해서 그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말로 표정으로 온 몸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 그래도 좀 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만나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 하면 글로 읽어서 기쁨을 누리는 것 보다는 훨씬 더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사회의 문제가 얼굴을 대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온라인상의 일들 때문에 심각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화로 컴퓨터 통신으로 의사를 소통하고 일을 보기 때문에 인간의 정이 없어지고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사회가 되고만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이나 사랑이 없는 세상의 풍토가 우리 교회 내에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교회도 방송으로 설교를 하고 컴퓨터로 상담을 하고 헌금은 은행구좌로 온라인 송금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대면의 기회가 점점 없어지는 세상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고 보는 것이 참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진리는 글로 전달하는 것보다는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 할 때 그 진실이 더욱 잘 전달이 되기 때문입니다.
1.대면할 때 진리가 더욱 확실해집니다.
본문 말씀에 “면대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종이에 먹물로 쓰는 것 보다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면대라는 말 보다는 대면이라는 말을 씁니다.
얼굴을 마주대하여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는 “입과 입을 맞대고(mouth to mouth) “라고 했고 영어성경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face to face)"라고 했습니다.
글을 대하는 것 보다는 직접 말을 하는 것이 더 진실성이 있고 또 목소리만 듣는 것 보다는 얼굴의 표정을 보면서 이야기는 하는 것이 더 진실성이 있습니다.
진리는 단순히 글로 설명문으로 논문으로 설명을 하기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이라면 이렇게 교회에 모여서 서로 얼굴을 대하는 것이나 설교라는 것을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 진리의 확실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해가 생기고 문제가 생기면 직접 만나기를 싫어합니다.
전화로 해결하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문제가 해결이 되기보다는 오해가 더 쌓이기 쉽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얼른 만나서 마주보면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얼굴을 보면서 그 사람의 진실을 알게 되고 오해도 풀리고 문제도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는 더욱 그렇습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오해를 하고 상처를 받고 시험에 넘어가는 것은 얼굴을 대하지 않고 남의 말만 듣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매주 오는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주 빠지는 사람은 시험에 잘 들고 잘 넘어집니다.
교회에 와서 늘 서로 얼굴을 대하면 오해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진리의 말씀은 거짓말을 조금이라도 보탤 필요가 없는 참된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해도 됩니다.
오히려 거기에다가 쓸데없는 말들을 첨가하는 것이 진리를 거짓말로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진리의 말씀 십자가의 복음 천국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 진리를 확실하게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진리를 이야기 하면 그 얼굴에 거짓이 없어집니다.
진리를 이야기 하면 그 얼굴만 보아도 사실인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진리를 이야기 하면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너무나 좋은 길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서로마주대하고 진실을 이야기해도 정말로 확실하게 믿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1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고 과거에 동판으로 만든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지만 그 때가 되면 즉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그곳에서 우리 주님을 대면하고 보면 온전히 모든 것을 다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진리 가운데 행하는 우리가 서로 자주 만나야 합니다.
마주보면서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서로에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가슴속에 있는 진실함으로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서로에게 용기가 되고 확신이 되고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2.대면할 때 진리 속에 있는 따뜻함을 느낍니다.
우리가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진리 속에 있는 사랑 그 사랑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진리 속에는 너무나 크고 위대한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교회가 멀어지고 하나님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서로 나누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진리 속에서 이 진리를 행하고 산다고 하면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명절이 되어도 보모님을 잘 찾아가지 않습니다.
용돈 몇 푼 보내주고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돈 몇 푼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갚지 못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그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돈 보다는 가서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뜻입니다.
가까이에서 자주 대하고 보는 것이 서로를 잘 알고 서로에게 정을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잘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면 손해를 보게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경건생활을 해야 되기 때문에 세상을 재미있게 살지도 못하고 고행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늘 죄와 더불어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면하기가 두려운 것 같습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기보다는 그저 형식적으로 살짝 왔다가 슬그머니 가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슴을 열지도 않고 뜨겁게 사랑을 하지도 않고 정을 나누려고 하지도 않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면서 멀리 떨어져서 살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돈이나 좋아하고 우리에게 지키기 어려운 명령이나 잔뜩 해 놓고 그것을 지키나 안지키나 감시하는 분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헌금이나 하고 주일이나 지키고 명령을 어기지 않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을 잘 알고 보면 너무나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가까이 할수록 좋으신 분이십니다.
진리를 알면 알수록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서 하나님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일서를 배우면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하나님과 사귀면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3.대면할 때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을 닮아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악된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가진 성도들이 거기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새로운 삶을 말로 글로만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형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 설명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누군가가 삶의 모범이 되어줄 때 그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 쉽고 빠릅니다.
전통적인 교회는 선배들이 어떻게 했나를 많이 보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하면 됩니다.
그러나 새로 시작한 교회는 신안생활을 잘 하는 모범적인 사람이 없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사실 오래 동안 교회에 다닌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가 우리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처럼 나를 본 받아라 나를 따르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서 존경하고 따를만한 스승이 어디 없을까 하고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완벽하게 잘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설교를 잘하면 삶이 별로고,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은 사랑이 부족한 것 같고, 사랑이 많은 사람은 진리를 잘 모르는 것 같고, 세상 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은 성질이 괴팍하기도 하고 딱 이분이 나의 모델이다.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성도들도 어떤 분은 주일은 잘 지키지만 다른 것은 부족하고 어떤 분은 기도는 잘 하지만 삶은 부족하고 모든 면에 잘 하는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교회에 와서 서로에게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아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아 천국이 있구나. 라는 마음이 들 수 있도록 성실한 믿음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몸소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말씀으로도 가르치셨지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예수님의 삶은 일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짧은 3여 년 동안에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성도들은 사생활을 보여주기 싫어합니다.
그저 교회에 와서 예배는 드리고 헌금은 할 테니까 내가 어떻게 살든 간섭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형교회 목사님들은 성도들이 밖에서 무엇을 하면서 사는지 어떤 자세로 사는지 잘 모를 것입니다.
그저 교회에만 오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에서의 신앙 활동만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전반에 걸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 나가도 품위를 잃지 않고 살도록 가르치는 곳이 교회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도 살펴보고 지도해 주어야 바른 교회요 바른 목사일 것입니다.
목사들도 사택을 교회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기를 좋아합니다.
사생활이 교인들에게 노출이 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삶은 다르게 설교는 다르게 하고 싶어 합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그의 삶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입으로는 천국을 가르치지만 그의 삶을 보면 천국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 같습니다.
이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나기를 꺼려하고 삶을 보여주기를 싫어하는 이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가 만나자 만나서 서로 대면하자 그러면 확신을 가질 수 있고 사랑이 넘치게 되고 본받는 삶을 살 수 있다. 라고 말하기가 참 어렵고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바른 진리의 말씀 속에서 행한다면 이렇게 되는 것이 참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대면할 때 충만한 기쁨이 넘칠 줄 믿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탈피해서 정말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성도들과 참된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 교제하는 삶을 살도록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잘 되고 교회가 대형교회가 되고 뭔가 열매가 많아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해서 성공을 해서 짠하고 나타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세상의 성공이 신앙의 성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실패가 신앙의 성공일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게 살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면서 감사하고 살 때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좌절하고 사람들이 보기에 저 사람은 무슨 힘으로 살까라고 생각할 때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바르게 살려고 할 때 그들의 마음에도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큰 교회당이 없어도 많은 성도들이 없어도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많지 않아도 교회가 당당히 할 일을 할 때 목사가 당당하게 십자가의 복음을 외칠 때 그 교회가 그 성도들이 정말로 멋있는 교회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얼굴을 대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만날 때 우리가 가진 진리가 서로에게 전달되어서 신앙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대할 때 사랑이 넘치고 주님을 향한 뜨거운 가슴이 불타오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실함으로 서로 대할 때 서로에게 본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 요이 1:12-13
제목 :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에이든 토저(A. W. Tozer) 목사님은 “20세기의 선지자라고 불림을 받았지만 그의 글은 21세기에 더욱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가 타락하고 부패하여 본질을 잃어갈수록 그의 메시지는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책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에서 기독교가 부패해져가는 과정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단계는 “기계적인 상태”라고 했습니다.
아무런 느낌이 없이 기계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아무런 감정이나 느낌도 없이 의미나 감탄도 없이 어떠한 행복한 놀라움이나 기대감도 전혀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반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단계는 “습관적인 상태”라고 했습니다.
기계적 상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습관적인 상태가 된다고 했습니다.
기계적인 상태가 오래되면 자기 자신이 기계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습관적으로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무런 감정이 없이 기계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것이 심각한 병인지도 모르고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3단계는 “부패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부패를 재정적인 부패나 도덕적인 부패로만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정말로 심각한 부패는 내 마음의 부패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의 부패는 영적으로 경직된 상태라고 했습니다.
더 좋은 것을 기대하거나 더 성장하기를 원하지 않고 기계적이거나 습관적인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심각한 부패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가 이런 심각한 부패에 빠진 것 같습니다.
교회가 기쁨이 없습니다. 교회가 소망이 없습니다. 교회가 영적인 부흥이 없습니다.
그저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로 심각한 부패상태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현대교회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강해설교를 하는데 있어서 좀 어려울 때가 오늘과 같은 본문을 만날 때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단순히 인사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옛날에 편지를 쓸 때 다 써놓고 마지막에 “할 말은 많지만 나중에 만나서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라고 썼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단순한 인사말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현대어로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잉크로 쓰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기쁨을 충만하게 나누길 원합니다.
택하심을 받은 그대 자매의 자녀들이 그대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할 말이 많지만 글로 쓰는 것은 그만 쓰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찬 진리의 말씀을 그저 글 몇 자로 적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계가 있는 글로 몇 마디 더 쓴다고 해서 그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말로 표정으로 온 몸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 그래도 좀 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만나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 하면 글로 읽어서 기쁨을 누리는 것 보다는 훨씬 더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사회의 문제가 얼굴을 대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온라인상의 일들 때문에 심각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화로 컴퓨터 통신으로 의사를 소통하고 일을 보기 때문에 인간의 정이 없어지고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사회가 되고만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이나 사랑이 없는 세상의 풍토가 우리 교회 내에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교회도 방송으로 설교를 하고 컴퓨터로 상담을 하고 헌금은 은행구좌로 온라인 송금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대면의 기회가 점점 없어지는 세상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고 보는 것이 참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진리는 글로 전달하는 것보다는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 할 때 그 진실이 더욱 잘 전달이 되기 때문입니다.
1.대면할 때 진리가 더욱 확실해집니다.
본문 말씀에 “면대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종이에 먹물로 쓰는 것 보다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면대라는 말 보다는 대면이라는 말을 씁니다.
얼굴을 마주대하여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는 “입과 입을 맞대고(mouth to mouth) “라고 했고 영어성경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face to face)"라고 했습니다.
글을 대하는 것 보다는 직접 말을 하는 것이 더 진실성이 있고 또 목소리만 듣는 것 보다는 얼굴의 표정을 보면서 이야기는 하는 것이 더 진실성이 있습니다.
진리는 단순히 글로 설명문으로 논문으로 설명을 하기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이라면 이렇게 교회에 모여서 서로 얼굴을 대하는 것이나 설교라는 것을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 진리의 확실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해가 생기고 문제가 생기면 직접 만나기를 싫어합니다.
전화로 해결하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문제가 해결이 되기보다는 오해가 더 쌓이기 쉽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얼른 만나서 마주보면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얼굴을 보면서 그 사람의 진실을 알게 되고 오해도 풀리고 문제도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는 더욱 그렇습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오해를 하고 상처를 받고 시험에 넘어가는 것은 얼굴을 대하지 않고 남의 말만 듣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매주 오는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주 빠지는 사람은 시험에 잘 들고 잘 넘어집니다.
교회에 와서 늘 서로 얼굴을 대하면 오해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진리의 말씀은 거짓말을 조금이라도 보탤 필요가 없는 참된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해도 됩니다.
오히려 거기에다가 쓸데없는 말들을 첨가하는 것이 진리를 거짓말로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진리의 말씀 십자가의 복음 천국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 진리를 확실하게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진리를 이야기 하면 그 얼굴에 거짓이 없어집니다.
진리를 이야기 하면 그 얼굴만 보아도 사실인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진리를 이야기 하면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너무나 좋은 길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서로마주대하고 진실을 이야기해도 정말로 확실하게 믿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1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고 과거에 동판으로 만든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지만 그 때가 되면 즉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그곳에서 우리 주님을 대면하고 보면 온전히 모든 것을 다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진리 가운데 행하는 우리가 서로 자주 만나야 합니다.
마주보면서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서로에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가슴속에 있는 진실함으로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서로에게 용기가 되고 확신이 되고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2.대면할 때 진리 속에 있는 따뜻함을 느낍니다.
우리가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진리 속에 있는 사랑 그 사랑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진리 속에는 너무나 크고 위대한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교회가 멀어지고 하나님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서로 나누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진리 속에서 이 진리를 행하고 산다고 하면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명절이 되어도 보모님을 잘 찾아가지 않습니다.
용돈 몇 푼 보내주고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돈 몇 푼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갚지 못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그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돈 보다는 가서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뜻입니다.
가까이에서 자주 대하고 보는 것이 서로를 잘 알고 서로에게 정을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잘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면 손해를 보게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경건생활을 해야 되기 때문에 세상을 재미있게 살지도 못하고 고행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늘 죄와 더불어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면하기가 두려운 것 같습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기보다는 그저 형식적으로 살짝 왔다가 슬그머니 가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슴을 열지도 않고 뜨겁게 사랑을 하지도 않고 정을 나누려고 하지도 않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면서 멀리 떨어져서 살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돈이나 좋아하고 우리에게 지키기 어려운 명령이나 잔뜩 해 놓고 그것을 지키나 안지키나 감시하는 분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헌금이나 하고 주일이나 지키고 명령을 어기지 않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을 잘 알고 보면 너무나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가까이 할수록 좋으신 분이십니다.
진리를 알면 알수록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서 하나님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일서를 배우면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하나님과 사귀면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3.대면할 때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을 닮아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악된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가진 성도들이 거기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새로운 삶을 말로 글로만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형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 설명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누군가가 삶의 모범이 되어줄 때 그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 쉽고 빠릅니다.
전통적인 교회는 선배들이 어떻게 했나를 많이 보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하면 됩니다.
그러나 새로 시작한 교회는 신안생활을 잘 하는 모범적인 사람이 없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사실 오래 동안 교회에 다닌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가 우리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처럼 나를 본 받아라 나를 따르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서 존경하고 따를만한 스승이 어디 없을까 하고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완벽하게 잘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설교를 잘하면 삶이 별로고,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은 사랑이 부족한 것 같고, 사랑이 많은 사람은 진리를 잘 모르는 것 같고, 세상 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은 성질이 괴팍하기도 하고 딱 이분이 나의 모델이다.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성도들도 어떤 분은 주일은 잘 지키지만 다른 것은 부족하고 어떤 분은 기도는 잘 하지만 삶은 부족하고 모든 면에 잘 하는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교회에 와서 서로에게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아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아 천국이 있구나. 라는 마음이 들 수 있도록 성실한 믿음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몸소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말씀으로도 가르치셨지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예수님의 삶은 일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짧은 3여 년 동안에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성도들은 사생활을 보여주기 싫어합니다.
그저 교회에 와서 예배는 드리고 헌금은 할 테니까 내가 어떻게 살든 간섭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형교회 목사님들은 성도들이 밖에서 무엇을 하면서 사는지 어떤 자세로 사는지 잘 모를 것입니다.
그저 교회에만 오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에서의 신앙 활동만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전반에 걸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 나가도 품위를 잃지 않고 살도록 가르치는 곳이 교회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도 살펴보고 지도해 주어야 바른 교회요 바른 목사일 것입니다.
목사들도 사택을 교회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기를 좋아합니다.
사생활이 교인들에게 노출이 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삶은 다르게 설교는 다르게 하고 싶어 합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그의 삶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입으로는 천국을 가르치지만 그의 삶을 보면 천국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 같습니다.
이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나기를 꺼려하고 삶을 보여주기를 싫어하는 이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가 만나자 만나서 서로 대면하자 그러면 확신을 가질 수 있고 사랑이 넘치게 되고 본받는 삶을 살 수 있다. 라고 말하기가 참 어렵고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바른 진리의 말씀 속에서 행한다면 이렇게 되는 것이 참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대면할 때 충만한 기쁨이 넘칠 줄 믿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탈피해서 정말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성도들과 참된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 교제하는 삶을 살도록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잘 되고 교회가 대형교회가 되고 뭔가 열매가 많아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해서 성공을 해서 짠하고 나타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세상의 성공이 신앙의 성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실패가 신앙의 성공일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게 살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면서 감사하고 살 때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좌절하고 사람들이 보기에 저 사람은 무슨 힘으로 살까라고 생각할 때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바르게 살려고 할 때 그들의 마음에도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큰 교회당이 없어도 많은 성도들이 없어도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많지 않아도 교회가 당당히 할 일을 할 때 목사가 당당하게 십자가의 복음을 외칠 때 그 교회가 그 성도들이 정말로 멋있는 교회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얼굴을 대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만날 때 우리가 가진 진리가 서로에게 전달되어서 신앙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대할 때 사랑이 넘치고 주님을 향한 뜨거운 가슴이 불타오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실함으로 서로 대할 때 서로에게 본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