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9. 1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종합 5)
본문 : 요일 5:1-2
제목 :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그동안 요한일서를 75회에 걸쳐 공부를 하셨습니다.
각 절의 설교를 71회에 걸쳐 들으셨고 그리고 각 장의 요약설교를 4장까지 4회에 걸쳐서 들으셨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5장을 핵심을 요약하여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1절에서 12절까지는 믿음과 사랑에 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13절 이하에는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이라고 정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의 말씀처럼 사랑이 제일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겨서 믿음이 제일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장을 중요하게 여겨서 소망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믿음은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을 빼놓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없이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또 믿음도 소망도 때가 되면 소용이 없는 것이 되지만 사랑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가 가진 믿음도 사랑도 별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소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세 가지는 다 같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고 어느 것 하나 없어도 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성도에게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마감하면서 이 세 가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 세 가지의 중요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배운 요한일서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신앙에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믿음은 하나님의 의의 기준입니다.
1절 말씀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라고 했습니다.
5절 말씀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했습니다.
1)바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바르게 믿음을 고백해야 됩니다.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인용한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라고 했고 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요한일서 4장에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을 어떤 예수님으로 믿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음을 배웠습니다.
5장 5절에도 같은 말씀을 반복하고 있음을 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이 하나님이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주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구주로 오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라고 했습니다.
4장 14절 말씀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간증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 되심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어 보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을 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칭찬을 하시기를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이 복이 있는 것은 단순히 베드로사도가 그렇게 고백을 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하신이가 그런 사실을 믿게 하신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셨고
그런 신앙의 고백을 하는 자에게 천국열쇠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2)믿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이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주여, 주여 하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기만 하면 다냐?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아야지 양심을 똑바로 가져야지 믿는다고만 하면 다 되는 것이냐고 비웃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의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계시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당연히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즉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의이 기준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라고 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의 사상가들이 철학자들이 도덕론 자들이 나름대로 의의 기준을 세우고 그것이 옳다고 말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 우주만물의 주인이 되시고, 천국의 주인이 되시고,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만 따라가면 됩니다.
그 의의 기준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성경말씀대로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느냐 그러면 의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자기 마음대로 믿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고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가 됩니다.
죄인은 사탄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3)믿음은 삶이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난 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낳다, 출생하다. 라는 말이고 이 말에서 자녀 자식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낳아주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했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낳아주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 중생 즉 거듭난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다 한 번씩 태어나고 그리고 죽는 것이지만 우리 성도들은 다시 한 번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배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는 부분이 믿음을 삶으로 행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에는 삶이 행함이 수반이 되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이나 삶은 믿음의 결과이지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삶으로 행함으로 말할 때 그 믿음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택하심을 받은 자들만 가지게 되는 특권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내가 믿음을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나에게 보내 주셨고 하나님께서 나를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양과 염소에서의 비유처럼 믿음이란 염소가 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양으로 태어난 양이 자기가 양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믿음이란 내가 고행을 하고 선행을 하고 수도를 해서 깨닫는 것이고
내가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지 나의 행함과 상관이 없이 거저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유교나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 스스로 그렇게 단정을 하는 것이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로마서나 에베소서를 공부하면서 수십 번 반복해서 들었듯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믿음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따라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은혜로 받는 것이요, 우리의 행함에 관계가 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요,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와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미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사랑은 성도가 행하여야 할 삶의 기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어주는 것이라면 사랑은 그 믿음을 가진 자가 행동에 옮겨야 할 삶의 기준입니다.
본문 2절 말씀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인 줄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5장 3절 말씀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관계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처럼 진정한 사랑에는 상대방의 말에 순종하려는 종의 자세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연애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애인이 예쁘고 사랑스러우면 무슨 말을 하든지 다 들어주고 싶습니다.
하늘의 별을 따다가 달라고 해도 따다가 준다고 말합니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아이들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을 잘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작은 심부름을 시켜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 말씀에 순종을 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이 나에게 유리하든지 불리하든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명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잘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씀은 그 이상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형제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는 아무리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의 하나님의 계명을 벗어난 사랑이라고 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안에 있는 사랑은 신실한 사랑입니다.
사랑에 거짓이 있거나, 사랑에 변질이 있거나, 사랑에 위선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 안에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을 따라 신실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 안에 있는 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진정으로 용서해 줄줄 알 때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 안에 있는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까지도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악랄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까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누군가가 나를 이용하고
누군가가 나를 배신하고
누군가가 나에게 심한 손해를 입혔을 때도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을 잘 배우시고 이해하시어서 하나님의 계명들을 바르게 지킴으로 참된 형제 사랑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3절 말씀에는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즐겁고 기쁜 것입니다.
육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시기와 질투가 나오고 오히려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는 항상 기쁨이 수반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참으로 힘이 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법을 만들고 계명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르게 행복하게 살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가볍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주는 계명이라면 그것이 무거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워하는 자들에게 주는 계명이라면 힘들고 어려운 계명을 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자녀들을 위해서 주시는 계명이기 때문에 무게는 최소한의 것이고 그로 인한 혜택은 최대한의 것으로 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할 때 예수님의 친구로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13절 말씀에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생이라는 것이 있으니 한번 알아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그렇게 해서 영생을 얻어 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그 영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그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생명이 이미 영생하는 생명으로 바뀌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가졌다고 선언을 하고 있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 성도의 삶입니다.
만약에 이 영생이라는 것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거기에 대한 증명서나 계약서는 확인서 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소망으로만 간직으로 하고 그 날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이미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 그 삶이 달라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1) 무엇보다 영생을 얻게 해 준 이 믿음을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 외에는 도무지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돈도 권력도 선행이나 고행도 그 어떤 것도 믿음이 가지고 있는 이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살다가 보면 세상살이가 너무 힘이 들어서 왜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 믿음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능력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이 이 믿음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얻게 하는 이 믿음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2) 이 세상보다 영원한 세상을 소망하면서 삽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삽니다.
이 세상의 삶에 그렇게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그렇게 목을 매지 않습니다.
그저 주어진 대로 형편대로 삽니다.
남들보다 좀 못한 삶을 살면서도 부끄럽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목적지는 따로 있고 이 세상은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 인생을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3) 보람된 삶을 삽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마지막 세상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마지막이 아니고 영원한 세상이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남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좀 양보도 하고 좀 희생도 하면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보람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의 기준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가 지켜야 할 기본 계명입니다.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면서 그 나라를 향해서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바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가지고사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요일 5:1-2
제목 :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그동안 요한일서를 75회에 걸쳐 공부를 하셨습니다.
각 절의 설교를 71회에 걸쳐 들으셨고 그리고 각 장의 요약설교를 4장까지 4회에 걸쳐서 들으셨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5장을 핵심을 요약하여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1절에서 12절까지는 믿음과 사랑에 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13절 이하에는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이라고 정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의 말씀처럼 사랑이 제일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겨서 믿음이 제일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장을 중요하게 여겨서 소망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믿음은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을 빼놓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없이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또 믿음도 소망도 때가 되면 소용이 없는 것이 되지만 사랑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가 가진 믿음도 사랑도 별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소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세 가지는 다 같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고 어느 것 하나 없어도 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성도에게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마감하면서 이 세 가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 세 가지의 중요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배운 요한일서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신앙에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믿음은 하나님의 의의 기준입니다.
1절 말씀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라고 했습니다.
5절 말씀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했습니다.
1)바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바르게 믿음을 고백해야 됩니다.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인용한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라고 했고 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요한일서 4장에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을 어떤 예수님으로 믿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음을 배웠습니다.
5장 5절에도 같은 말씀을 반복하고 있음을 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이 하나님이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주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구주로 오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라고 했습니다.
4장 14절 말씀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간증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 되심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어 보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을 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칭찬을 하시기를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이 복이 있는 것은 단순히 베드로사도가 그렇게 고백을 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하신이가 그런 사실을 믿게 하신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셨고
그런 신앙의 고백을 하는 자에게 천국열쇠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2)믿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이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주여, 주여 하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기만 하면 다냐?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아야지 양심을 똑바로 가져야지 믿는다고만 하면 다 되는 것이냐고 비웃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의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계시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당연히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즉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의이 기준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라고 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의 사상가들이 철학자들이 도덕론 자들이 나름대로 의의 기준을 세우고 그것이 옳다고 말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 우주만물의 주인이 되시고, 천국의 주인이 되시고,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만 따라가면 됩니다.
그 의의 기준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성경말씀대로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느냐 그러면 의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자기 마음대로 믿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고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가 됩니다.
죄인은 사탄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3)믿음은 삶이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난 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낳다, 출생하다. 라는 말이고 이 말에서 자녀 자식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낳아주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했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낳아주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 중생 즉 거듭난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다 한 번씩 태어나고 그리고 죽는 것이지만 우리 성도들은 다시 한 번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배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는 부분이 믿음을 삶으로 행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에는 삶이 행함이 수반이 되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이나 삶은 믿음의 결과이지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삶으로 행함으로 말할 때 그 믿음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택하심을 받은 자들만 가지게 되는 특권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내가 믿음을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나에게 보내 주셨고 하나님께서 나를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양과 염소에서의 비유처럼 믿음이란 염소가 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양으로 태어난 양이 자기가 양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믿음이란 내가 고행을 하고 선행을 하고 수도를 해서 깨닫는 것이고
내가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지 나의 행함과 상관이 없이 거저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유교나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 스스로 그렇게 단정을 하는 것이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로마서나 에베소서를 공부하면서 수십 번 반복해서 들었듯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믿음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따라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은혜로 받는 것이요, 우리의 행함에 관계가 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요,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와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미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사랑은 성도가 행하여야 할 삶의 기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어주는 것이라면 사랑은 그 믿음을 가진 자가 행동에 옮겨야 할 삶의 기준입니다.
본문 2절 말씀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인 줄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5장 3절 말씀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관계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처럼 진정한 사랑에는 상대방의 말에 순종하려는 종의 자세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연애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애인이 예쁘고 사랑스러우면 무슨 말을 하든지 다 들어주고 싶습니다.
하늘의 별을 따다가 달라고 해도 따다가 준다고 말합니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아이들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을 잘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작은 심부름을 시켜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 말씀에 순종을 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이 나에게 유리하든지 불리하든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명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잘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씀은 그 이상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형제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는 아무리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의 하나님의 계명을 벗어난 사랑이라고 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안에 있는 사랑은 신실한 사랑입니다.
사랑에 거짓이 있거나, 사랑에 변질이 있거나, 사랑에 위선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 안에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을 따라 신실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 안에 있는 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진정으로 용서해 줄줄 알 때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 안에 있는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까지도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악랄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까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누군가가 나를 이용하고
누군가가 나를 배신하고
누군가가 나에게 심한 손해를 입혔을 때도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을 잘 배우시고 이해하시어서 하나님의 계명들을 바르게 지킴으로 참된 형제 사랑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3절 말씀에는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즐겁고 기쁜 것입니다.
육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시기와 질투가 나오고 오히려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는 항상 기쁨이 수반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참으로 힘이 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법을 만들고 계명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르게 행복하게 살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가볍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주는 계명이라면 그것이 무거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워하는 자들에게 주는 계명이라면 힘들고 어려운 계명을 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자녀들을 위해서 주시는 계명이기 때문에 무게는 최소한의 것이고 그로 인한 혜택은 최대한의 것으로 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할 때 예수님의 친구로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13절 말씀에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생이라는 것이 있으니 한번 알아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그렇게 해서 영생을 얻어 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그 영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그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생명이 이미 영생하는 생명으로 바뀌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가졌다고 선언을 하고 있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 성도의 삶입니다.
만약에 이 영생이라는 것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거기에 대한 증명서나 계약서는 확인서 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소망으로만 간직으로 하고 그 날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이미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 그 삶이 달라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1) 무엇보다 영생을 얻게 해 준 이 믿음을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 외에는 도무지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돈도 권력도 선행이나 고행도 그 어떤 것도 믿음이 가지고 있는 이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살다가 보면 세상살이가 너무 힘이 들어서 왜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 믿음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능력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이 이 믿음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얻게 하는 이 믿음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2) 이 세상보다 영원한 세상을 소망하면서 삽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삽니다.
이 세상의 삶에 그렇게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그렇게 목을 매지 않습니다.
그저 주어진 대로 형편대로 삽니다.
남들보다 좀 못한 삶을 살면서도 부끄럽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목적지는 따로 있고 이 세상은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 인생을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3) 보람된 삶을 삽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마지막 세상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마지막이 아니고 영원한 세상이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남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좀 양보도 하고 좀 희생도 하면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보람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의 기준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가 지켜야 할 기본 계명입니다.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면서 그 나라를 향해서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바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가지고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