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6.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67)
본문 : 요일 5:16-17
제목 :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미국의 유명한 리폼드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이고 성경의 교훈들을 실제적인 차원에서 적용할 줄 아는 설교자로 잘 알려진 ‘스티브 브라운’이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이 쓴 “다 알았다고 생각한 이후 내가 배운 것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성경을 많이 알고 경험도 많은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도 자신이 다 알았다고 생각한 그 이후에도 더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파격적이시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폭넓게 역사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에 대하여 아주 작은 지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르게 안다면 이보다 훨씬 더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악하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선하게 보이고 다 바르게 사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막상 그 내면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참 악한 생각들을 가지고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 바르게 살지 못하고 다 죄를 지으면서 살더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 보면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그 사람의 도덕성입니다.
그 사람이 정치를 할 만한 지식이나 경험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능력이 있는가를 따지기 보다는 그 사람의 도덕성을 많이 따집니다.
아들을 군대에 잘 보냈는가, 세금은 잘 냈는가, 부동산 투기는 하지 않았는가……. 이런 도덕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을 다 착한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적어도 지도자가 되려면 이런 도덕적인 결함이 없는 사람이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을 따지고 보면 한 사람도 그런 도덕적 기준에 맞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다 악한 성품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그 도덕적 기준은 더 엄격해집니다.
교인들이 목사나 장로나 교회의 지도자들을 보면 뭐 저런 사람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도덕적으로 좀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을 문제 삼아서 쫓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목사의 눈으로 성도들을 보면 똑 같습니다.
아이고 저것도 성도인가 당장 치리를 하거나 쫓아내고 싶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좋은 점만 보고 혹 잘못이 있어도 사랑으로 덮어주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지 우리 중에 누가 서로의 잘못을 들쳐 내기 시작한다면 여기 이렇게 태연이 앉아 있을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다릅니다.
저는 그래도 참 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저는 조사해도 죄 지은 것이 없는 사람이요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라고 생각이 되는 사람은 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거나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사는 우리들에게 큰 은혜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본문 16절 말씀에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물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라는 단서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에 무게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보통으로 지을 수 있는 모든 죄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죄가 영원한 사망에 이를만한 아주 중요한 죄가 아니라면 죄 지은 사람보고 정죄하고 비판하고 하지 말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범죄한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것입니다.
1. 모든 사람이 죄를 짓습니다.
로마서 3:10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입으로 범하는 죄가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입 하나만 가지고도 이렇게 악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 모두가 죄인이요 우리 모두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 나 자신도 포함이 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거나 모든 사람이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보면 비웃고 손가락질을 하고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나름대로 자기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교회의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잘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으니까 자기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 일만큼은 바르게 잘 하려고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도 다 자기와 같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가 잘 하는 분야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비교적 사회생활을 잘 못합니다.
특별히 교회 생활을 잘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는 사람이 교회에 가서 주여 주여만 하면 되나 가정에 충실해야지 라고 말합니다.
교회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비교적 사회에서나 가정에서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말합니다.
교회중심으로 살아야지 가정에서 식구들끼리 잘 지내면 다냐? 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일은 다 잘하는데 국가에서 내라는 세금은 잘 안냅니다.
세금 안내고 교회에 헌금은 잘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약속은 잘 지키는데 교통신호는 잘 안 지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교통신호를 잘 안 지키는 것은 살인미수죄에 속합니다.
운이 좋아서 잘 넘어갔지 여차하면 대형사고가 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한두 가지는 잘하기도 하지만 모든 면에 완벽하게 잘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잘 하는 한두 가지로 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사는 것이고 남이 잘 못하는 한두 가지를 보고 형편없는 죄인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지금까지는 특별히 죄를 지은 일이 없이 잘 넘어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이지 나의 자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에 노출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가 그들처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다면 우리도 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범위가 넓습니다.
남의 것을 보고 욕심을 내는 것도, 속으로 욕을 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도, 다 죄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연약하여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쩌다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중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나면 그 죄 짓기 좋아하는 입술들이 모입니다.
죄를 지어서 그랬다. 벌을 받았다. 바르게 살았으면 그랬겠느냐? 입방아들을 찧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특별하게 사랑하시는 경우를 제외하고 웬만한 죄에 대해서는 반응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것 다 반응을 하신다면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한 사람도 성하게 살 날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중에 누가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흉보고 비웃고 욕하지 말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실 때는 무조건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이해하고 동정심을 가지게 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심을 가지고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로 엄청난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냉소주의란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나의 생각으로 판단을 하면서 좋지 않은 것만 들추어내어서 비판만 일삼는 것을 냉소주의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이해하려거나 동정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어디 가서 말 한마디 잘 못합니다.
말 한마디 실수했다가는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비판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 실수로 엄청난 욕을 먹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이런 각박한 세상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행복입니다.
죄를 범함 형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과 긍휼히 여기는 것 차이를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동정할만한 이유가 있을 때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것은 동정할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악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푸시는 것을 긍휼히 여긴다는 말로 씁니다.
우리가 우리보다 약한 사람이나 죄를 범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가지신 이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못나고 부족하고 이해되지 않는 삶을 산다고 해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이런 기도를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죄를 범함 형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지만 기도해 보면 나 자신도 그와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런 기도를 할 때 우리도 그와 같은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기도하고 난 후에 나는 선해 보이고 다른 사람의 죄가 눈에 보인다면 그 사람은 기도를 잘 못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장기간 기도하고 난 후에 꼭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옵니다.
나는 잘 하는데 목사님 때문에 일이 잘 안 된다 나는 잘 하는데 장로님 때문에 일이 잘 안 된다 모든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바르게 한 사람은 나 자신의 문제를 깨닫게 되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나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깁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죄를 범함 형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는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망 대신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범한 사람을 보면 더 정죄하고 더 비판해서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적으로도 다시 회생할 수 있는 기회와 용기를 주어야 하고 영적으로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앞으로 우리 가운데서 죄를 범하거나 인생의 실패자가 있다면 비웃고 흉보고 저주하지 말고 그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범죄한 그 형제에게도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모든 불의가 죄지만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다고 했습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지으면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지만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는 사람은 기도도 해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형제가 죄를 지으면 사망에 이르는 죄인가 사망에 이른 죄인가를 구별하여 사망에 이르는 죄 같으면 기도하지 말아야 겠다. 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우리가 그런 죄를 짓지 말아야 되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란 어떤 것일까요
혹자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아주 흉악한 죄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보혈은 강도와 같은 흉악한 죄도 다 용서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도덕적인 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사하심을 얻지 못할 죄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는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 훼방 죄가 거기에 해당되는 죄입니다.
마태복음 12:31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죄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와 그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제일 큰 성령님 훼방 죄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와 부활과 영생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 히브리서 6:4절 이하에 나오는 죄로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비췸을 받은 자의 타락에서 온 죄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은혜를 체험하고 천국을 소망하고 살다가 타락해서 믿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떠나는 사람은 그 죄를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짓지 말아야 할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지 않는 죄와 믿다가 십자가를 버리는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길이 없고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고 천국에 갈 길이 없기 때문에 이 죄만큼은 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짓지 말아야 하 죄가 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을 어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제일 큰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라고 하신 말씀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으로 가지는 못하겠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최선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이요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일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다고 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지은 형제를 보면 진심으로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도가 사망으로 빠져가는 형제를 구원하는 길이며 우리 자신도 은혜를 받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 : 요일 5:16-17
제목 :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미국의 유명한 리폼드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이고 성경의 교훈들을 실제적인 차원에서 적용할 줄 아는 설교자로 잘 알려진 ‘스티브 브라운’이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이 쓴 “다 알았다고 생각한 이후 내가 배운 것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성경을 많이 알고 경험도 많은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도 자신이 다 알았다고 생각한 그 이후에도 더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파격적이시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폭넓게 역사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에 대하여 아주 작은 지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르게 안다면 이보다 훨씬 더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악하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선하게 보이고 다 바르게 사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막상 그 내면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참 악한 생각들을 가지고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 바르게 살지 못하고 다 죄를 지으면서 살더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 보면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그 사람의 도덕성입니다.
그 사람이 정치를 할 만한 지식이나 경험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능력이 있는가를 따지기 보다는 그 사람의 도덕성을 많이 따집니다.
아들을 군대에 잘 보냈는가, 세금은 잘 냈는가, 부동산 투기는 하지 않았는가……. 이런 도덕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을 다 착한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적어도 지도자가 되려면 이런 도덕적인 결함이 없는 사람이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을 따지고 보면 한 사람도 그런 도덕적 기준에 맞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다 악한 성품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그 도덕적 기준은 더 엄격해집니다.
교인들이 목사나 장로나 교회의 지도자들을 보면 뭐 저런 사람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도덕적으로 좀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을 문제 삼아서 쫓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목사의 눈으로 성도들을 보면 똑 같습니다.
아이고 저것도 성도인가 당장 치리를 하거나 쫓아내고 싶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좋은 점만 보고 혹 잘못이 있어도 사랑으로 덮어주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지 우리 중에 누가 서로의 잘못을 들쳐 내기 시작한다면 여기 이렇게 태연이 앉아 있을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다릅니다.
저는 그래도 참 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저는 조사해도 죄 지은 것이 없는 사람이요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라고 생각이 되는 사람은 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거나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사는 우리들에게 큰 은혜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본문 16절 말씀에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물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라는 단서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에 무게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보통으로 지을 수 있는 모든 죄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죄가 영원한 사망에 이를만한 아주 중요한 죄가 아니라면 죄 지은 사람보고 정죄하고 비판하고 하지 말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범죄한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것입니다.
1. 모든 사람이 죄를 짓습니다.
로마서 3:10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입으로 범하는 죄가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입 하나만 가지고도 이렇게 악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 모두가 죄인이요 우리 모두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 나 자신도 포함이 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거나 모든 사람이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보면 비웃고 손가락질을 하고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나름대로 자기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교회의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잘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으니까 자기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 일만큼은 바르게 잘 하려고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도 다 자기와 같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가 잘 하는 분야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비교적 사회생활을 잘 못합니다.
특별히 교회 생활을 잘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는 사람이 교회에 가서 주여 주여만 하면 되나 가정에 충실해야지 라고 말합니다.
교회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비교적 사회에서나 가정에서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말합니다.
교회중심으로 살아야지 가정에서 식구들끼리 잘 지내면 다냐? 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일은 다 잘하는데 국가에서 내라는 세금은 잘 안냅니다.
세금 안내고 교회에 헌금은 잘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약속은 잘 지키는데 교통신호는 잘 안 지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교통신호를 잘 안 지키는 것은 살인미수죄에 속합니다.
운이 좋아서 잘 넘어갔지 여차하면 대형사고가 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한두 가지는 잘하기도 하지만 모든 면에 완벽하게 잘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잘 하는 한두 가지로 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사는 것이고 남이 잘 못하는 한두 가지를 보고 형편없는 죄인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지금까지는 특별히 죄를 지은 일이 없이 잘 넘어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이지 나의 자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에 노출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가 그들처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다면 우리도 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범위가 넓습니다.
남의 것을 보고 욕심을 내는 것도, 속으로 욕을 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도, 다 죄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연약하여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쩌다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중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나면 그 죄 짓기 좋아하는 입술들이 모입니다.
죄를 지어서 그랬다. 벌을 받았다. 바르게 살았으면 그랬겠느냐? 입방아들을 찧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특별하게 사랑하시는 경우를 제외하고 웬만한 죄에 대해서는 반응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것 다 반응을 하신다면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한 사람도 성하게 살 날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중에 누가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흉보고 비웃고 욕하지 말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실 때는 무조건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이해하고 동정심을 가지게 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심을 가지고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로 엄청난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냉소주의란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나의 생각으로 판단을 하면서 좋지 않은 것만 들추어내어서 비판만 일삼는 것을 냉소주의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이해하려거나 동정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어디 가서 말 한마디 잘 못합니다.
말 한마디 실수했다가는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비판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 실수로 엄청난 욕을 먹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이런 각박한 세상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행복입니다.
죄를 범함 형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과 긍휼히 여기는 것 차이를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동정할만한 이유가 있을 때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것은 동정할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악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푸시는 것을 긍휼히 여긴다는 말로 씁니다.
우리가 우리보다 약한 사람이나 죄를 범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가지신 이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못나고 부족하고 이해되지 않는 삶을 산다고 해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이런 기도를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죄를 범함 형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지만 기도해 보면 나 자신도 그와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런 기도를 할 때 우리도 그와 같은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기도하고 난 후에 나는 선해 보이고 다른 사람의 죄가 눈에 보인다면 그 사람은 기도를 잘 못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장기간 기도하고 난 후에 꼭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옵니다.
나는 잘 하는데 목사님 때문에 일이 잘 안 된다 나는 잘 하는데 장로님 때문에 일이 잘 안 된다 모든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바르게 한 사람은 나 자신의 문제를 깨닫게 되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나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깁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죄를 범함 형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는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망 대신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범한 사람을 보면 더 정죄하고 더 비판해서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적으로도 다시 회생할 수 있는 기회와 용기를 주어야 하고 영적으로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앞으로 우리 가운데서 죄를 범하거나 인생의 실패자가 있다면 비웃고 흉보고 저주하지 말고 그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범죄한 그 형제에게도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모든 불의가 죄지만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다고 했습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지으면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지만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는 사람은 기도도 해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형제가 죄를 지으면 사망에 이르는 죄인가 사망에 이른 죄인가를 구별하여 사망에 이르는 죄 같으면 기도하지 말아야 겠다. 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우리가 그런 죄를 짓지 말아야 되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란 어떤 것일까요
혹자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아주 흉악한 죄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보혈은 강도와 같은 흉악한 죄도 다 용서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도덕적인 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사하심을 얻지 못할 죄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는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 훼방 죄가 거기에 해당되는 죄입니다.
마태복음 12:31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죄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와 그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제일 큰 성령님 훼방 죄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와 부활과 영생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 히브리서 6:4절 이하에 나오는 죄로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비췸을 받은 자의 타락에서 온 죄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은혜를 체험하고 천국을 소망하고 살다가 타락해서 믿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떠나는 사람은 그 죄를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짓지 말아야 할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지 않는 죄와 믿다가 십자가를 버리는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길이 없고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고 천국에 갈 길이 없기 때문에 이 죄만큼은 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짓지 말아야 하 죄가 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을 어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제일 큰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라고 하신 말씀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으로 가지는 못하겠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최선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이요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일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다고 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지은 형제를 보면 진심으로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도가 사망으로 빠져가는 형제를 구원하는 길이며 우리 자신도 은혜를 받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