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 2.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51)
본문 : 요일 4:11-12
제목 :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이 세상에는 하지 말아야 할 악한 일이 있고, 해야 하는 선한 일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하지 말아야 할 악한 일이 무엇인지 해야 할 선한 일들이 무엇인지를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해서는 안 될 악한 일들을 행하면서 삽니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좋은 일들이 참 많이 있는데 그 좋은 일들을 다 놔두고 해서는 안 될 일들만 골라서 하는 불쌍한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나 일반법에서 하지 말라고 금지해 놓은 일들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참 하기 좋은 재미있는 일들입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일, 간음을 하는 일, 남을 흉보고 욕하는 일,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도박을 하는 일, 이런 나쁜 일들은 양심의 가책만 없다면 너무나 하기 좋은 일이고 하면 할수록 빠져드는 일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은 그래도 그런 악한 일들은 잘 하지 않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법을 지키면서 계명을 지키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말하기를 나는 죄 지은 일이 없다. 남에게 피해를 준 일도 없고 남을 괴롭힌 일도 없다. 남에게 욕먹을 만한 일을 하진 안았다. 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가 다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죄라고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사람이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나 사실은 다 같은 죄인입니다.
다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데 대해서는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라고 한다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일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해야 할 일을 더 적극적인 계명으로 알고 실천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는 일만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늘 그대로 거기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려면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행할 때 신앙이 성숙해지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요즘 새 정부가 들어서서 총리나 장관급 일꾼들을 임명하면서 인사청문회라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경력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일 좀 하겠다싶어서 내정해놓고 보면 재산이 너무 많아서 안 된다고 하고 아이들이 외국에 나가서 시민권을 받았다고 해서 안 된다고 하고 땅 투기를 하거나 아이들 공부 때문에 위장전입을 하거나 해서 부적격 판정을 받곤 합니다.
사실 소극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만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할 만한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뭔가 적극적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총리나 장관의 직무를 수행 할 만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하지 말아야 할 일도 하지 않았으면 좋았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일을 적극적으로 하다가 보면 자의 또는 타의로 하지 말아야 할 법을 어기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일을 적극적으로 하다가 생기는 작은 실수들을 어디까지 용납을 해야 하는지 아예 나쁜 사람으로 취급을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일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판단하실 때 어떻게 하실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착한 사람에게 많은 점수를 주실까요?
아니면 실수는 좀 있어도 적극적으로 일을 한 사람에게 많은 점수를 주실까요?
모르긴 해도 좀 실수가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행하라는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사람에게 많은 점수를 주실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서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다가 서론이 좀 길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마땅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빚지다, 의무가 있다, 당연하다, 해야 한다, 라는 말로도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냥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빚진 자가 빚을 갚듯이, 의무가 있는 자가 그 의무를 수행하듯이, 당연하게 꼭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막무가내로 명령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타당한 이유를 설명하시고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가 받는 유익도 설명을 하시면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우리가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와 그 결과로 얻어지는 축복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우리가 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지 서로 사랑할 때 얻어지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시고 서로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가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서로에게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거나 사랑을 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해주셨는지 반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나대신 죽게 하신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시키시는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어가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은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사탄을 따라 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먼저 선택을 해 주시고, 먼저 불러 주시고, 먼저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믿게 하시고, 먼저 거듭나게 해 주시고,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먼저 은혜를 베푸시고 먼저 사랑해 주시는 그 사랑이 우리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아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사랑입니다.
조급하시지도 않고 언제나 거기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사랑입니다.
부모가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한없이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사랑입니다.
철이 들 때까지, 진리를 알 때까지, 스스로 깨닫고 눈물을 흘릴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긍휼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불쌍히 여기기는 하지만 긍휼히 여기지는 않습니다.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때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어도, 동정할만한 여지가 전혀 없어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것이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너무나 쉽게 너무나 좋은 것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고행을 요구하시거나 선행을 요구하시거나 우리가 하기 어려운 조건을 내걸고 흥정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저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기만 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행
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삶에도 너무나 소중한 것이 되기 때문에 서로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산다고 하나님께 특별하게 이익이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생의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살고,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살고, 자기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살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자기가 일등이 되어야 하고 자기만 박수를 받아야 합니다.
자기를 확신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은 항상 옳으며 남이 하는 일은 항상 나쁘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지나치게 변호를 하지만 남이 하는 일은 야무지게 비판을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은 로맨스고 남이 하는 일은 불륜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옳게 생각하고 자기를 내세우며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은 참으로 피곤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만 내려놓으면 삶이 참 평안하고 오히려 남에게도 칭찬을 받는데 그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아옹다옹하며 싸우며 시기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나는 죄인 중에 괴수죄인이다“라고 고백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다른 사람을 나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며 사랑하면 그것이 나에게 큰 행복이 됩니다.
내가 중심이 아닌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사랑하면서 살면 그것이 우리에게 큰 행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우리 서로는 영원한 생명을 같이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대상은 주님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상속자들입니다.
우리는 함께 이 순례자의 길을 가다가 함께 천국에 이르러서 함께 영원토록 살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빚진 자로서 함께 탕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 빚을 탕감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에게 빚을 탕감해 주지 않으면 즉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우리도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한편이 되어 함께 힘을 합해서 사탄과 싸우기 위해서 서로에게 힘을 주며 용기를 주며 도와주며 사랑하면서 살아야 할 특별한 사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큰 행복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함께 살아야 할 특별한 관계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늘 눈에 보이는 것을 신뢰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늘 마음에 원하는 것도 하나님을 한번 만나봤으면 하는 것입니다.
음성이라도 들려주시던지 어떤 환상이라도 보여 주시던지 우리가 느껴서 알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다가 못해 기적을 통해서라도 신비한 현상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확인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하지만 그것을 볼 수가 없어서 알 수가 없어서 늘 의심을 하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냥 하나님 한번 시원하게 보고 믿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한번 어떤 방법이라도 확인하고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났지만 하나님의 모습을 바로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음성으로 때로는 천사를 대신 보내시고 때로는 어떤 상징으로 보여주셨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육신의 눈에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인간들을 위하여 성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주셨지만 영이신 하나님의 참 모습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확인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 사랑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신 참 사랑이라면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께서 와 계시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지 아니하고서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저 자신을 보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저와 딴판인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래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저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성격적으로도 원래 인자하거나 온화한 사람이 못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할만한 여유도 가지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이 변했습니다.
어디가든지 먼저 헌신할 마음이 생기고 바보처럼 손해보고 희생해도 다른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몸에 배어버렸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속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서 악한 저를 착한 행동을 하도록 운행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조정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끝부분에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그의 사랑”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목적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목적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시오 사랑의 근본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사랑을 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요 진실한 사랑인지를 배워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가 닮아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행하여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내 속에서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명령을 따라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너무나 마땅한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확인할 수 있게 되고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졌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하시고 서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도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요일 4:11-12
제목 :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이 세상에는 하지 말아야 할 악한 일이 있고, 해야 하는 선한 일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하지 말아야 할 악한 일이 무엇인지 해야 할 선한 일들이 무엇인지를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해서는 안 될 악한 일들을 행하면서 삽니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좋은 일들이 참 많이 있는데 그 좋은 일들을 다 놔두고 해서는 안 될 일들만 골라서 하는 불쌍한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나 일반법에서 하지 말라고 금지해 놓은 일들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참 하기 좋은 재미있는 일들입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일, 간음을 하는 일, 남을 흉보고 욕하는 일,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도박을 하는 일, 이런 나쁜 일들은 양심의 가책만 없다면 너무나 하기 좋은 일이고 하면 할수록 빠져드는 일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은 그래도 그런 악한 일들은 잘 하지 않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법을 지키면서 계명을 지키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말하기를 나는 죄 지은 일이 없다. 남에게 피해를 준 일도 없고 남을 괴롭힌 일도 없다. 남에게 욕먹을 만한 일을 하진 안았다. 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가 다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죄라고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사람이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나 사실은 다 같은 죄인입니다.
다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데 대해서는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라고 한다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일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해야 할 일을 더 적극적인 계명으로 알고 실천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는 일만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늘 그대로 거기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려면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행할 때 신앙이 성숙해지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요즘 새 정부가 들어서서 총리나 장관급 일꾼들을 임명하면서 인사청문회라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경력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일 좀 하겠다싶어서 내정해놓고 보면 재산이 너무 많아서 안 된다고 하고 아이들이 외국에 나가서 시민권을 받았다고 해서 안 된다고 하고 땅 투기를 하거나 아이들 공부 때문에 위장전입을 하거나 해서 부적격 판정을 받곤 합니다.
사실 소극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만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할 만한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뭔가 적극적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총리나 장관의 직무를 수행 할 만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하지 말아야 할 일도 하지 않았으면 좋았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일을 적극적으로 하다가 보면 자의 또는 타의로 하지 말아야 할 법을 어기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일을 적극적으로 하다가 생기는 작은 실수들을 어디까지 용납을 해야 하는지 아예 나쁜 사람으로 취급을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일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판단하실 때 어떻게 하실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착한 사람에게 많은 점수를 주실까요?
아니면 실수는 좀 있어도 적극적으로 일을 한 사람에게 많은 점수를 주실까요?
모르긴 해도 좀 실수가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행하라는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사람에게 많은 점수를 주실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서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다가 서론이 좀 길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마땅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빚지다, 의무가 있다, 당연하다, 해야 한다, 라는 말로도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냥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빚진 자가 빚을 갚듯이, 의무가 있는 자가 그 의무를 수행하듯이, 당연하게 꼭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막무가내로 명령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타당한 이유를 설명하시고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가 받는 유익도 설명을 하시면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우리가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와 그 결과로 얻어지는 축복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우리가 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지 서로 사랑할 때 얻어지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시고 서로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가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서로에게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거나 사랑을 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해주셨는지 반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나대신 죽게 하신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시키시는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어가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은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사탄을 따라 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먼저 선택을 해 주시고, 먼저 불러 주시고, 먼저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믿게 하시고, 먼저 거듭나게 해 주시고,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먼저 은혜를 베푸시고 먼저 사랑해 주시는 그 사랑이 우리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아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사랑입니다.
조급하시지도 않고 언제나 거기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사랑입니다.
부모가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한없이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사랑입니다.
철이 들 때까지, 진리를 알 때까지, 스스로 깨닫고 눈물을 흘릴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긍휼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불쌍히 여기기는 하지만 긍휼히 여기지는 않습니다.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때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어도, 동정할만한 여지가 전혀 없어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것이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너무나 쉽게 너무나 좋은 것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고행을 요구하시거나 선행을 요구하시거나 우리가 하기 어려운 조건을 내걸고 흥정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저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기만 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행
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삶에도 너무나 소중한 것이 되기 때문에 서로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산다고 하나님께 특별하게 이익이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생의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살고,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살고, 자기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살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자기가 일등이 되어야 하고 자기만 박수를 받아야 합니다.
자기를 확신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은 항상 옳으며 남이 하는 일은 항상 나쁘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지나치게 변호를 하지만 남이 하는 일은 야무지게 비판을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은 로맨스고 남이 하는 일은 불륜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옳게 생각하고 자기를 내세우며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은 참으로 피곤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만 내려놓으면 삶이 참 평안하고 오히려 남에게도 칭찬을 받는데 그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아옹다옹하며 싸우며 시기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나는 죄인 중에 괴수죄인이다“라고 고백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다른 사람을 나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며 사랑하면 그것이 나에게 큰 행복이 됩니다.
내가 중심이 아닌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사랑하면서 살면 그것이 우리에게 큰 행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우리 서로는 영원한 생명을 같이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대상은 주님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상속자들입니다.
우리는 함께 이 순례자의 길을 가다가 함께 천국에 이르러서 함께 영원토록 살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빚진 자로서 함께 탕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 빚을 탕감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에게 빚을 탕감해 주지 않으면 즉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우리도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한편이 되어 함께 힘을 합해서 사탄과 싸우기 위해서 서로에게 힘을 주며 용기를 주며 도와주며 사랑하면서 살아야 할 특별한 사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큰 행복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함께 살아야 할 특별한 관계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늘 눈에 보이는 것을 신뢰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늘 마음에 원하는 것도 하나님을 한번 만나봤으면 하는 것입니다.
음성이라도 들려주시던지 어떤 환상이라도 보여 주시던지 우리가 느껴서 알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다가 못해 기적을 통해서라도 신비한 현상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확인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하지만 그것을 볼 수가 없어서 알 수가 없어서 늘 의심을 하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냥 하나님 한번 시원하게 보고 믿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한번 어떤 방법이라도 확인하고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났지만 하나님의 모습을 바로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음성으로 때로는 천사를 대신 보내시고 때로는 어떤 상징으로 보여주셨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육신의 눈에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인간들을 위하여 성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주셨지만 영이신 하나님의 참 모습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확인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 사랑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신 참 사랑이라면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께서 와 계시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지 아니하고서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저 자신을 보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저와 딴판인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래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저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성격적으로도 원래 인자하거나 온화한 사람이 못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할만한 여유도 가지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이 변했습니다.
어디가든지 먼저 헌신할 마음이 생기고 바보처럼 손해보고 희생해도 다른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몸에 배어버렸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속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서 악한 저를 착한 행동을 하도록 운행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조정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끝부분에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그의 사랑”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목적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목적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시오 사랑의 근본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사랑을 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요 진실한 사랑인지를 배워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가 닮아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행하여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내 속에서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명령을 따라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너무나 마땅한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확인할 수 있게 되고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졌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하시고 서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도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