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9. 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34)
본문 : 요일 3:11-12
제목 : 가인같이 하지 말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최초로 낳은 가인과 아벨이라는 형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인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임으로 땅의 소산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임으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 삼아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이 일로 가인은 동생을 시기하게 되었고 광야에 홀로 있을 때에 동생 아벨을 쳐죽임으로 성경에 최초로 기록된 살인사건의 범인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 만물이 다 선하다고 하셨고 그 중에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다고 하셨는데 인류 최초의 형제 이야기를 이렇게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시작을 하는지 이해가 좀 안되실 것입니다.
최초의 두 형제가 서로 우애있게 지내며 서로 도와주면서 잘 살았다고 해야 사람들이 형제는 그런 거구나 라고 따라 할 텐데 마음에 좀 들지 않는다고 자기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 동생을 쳐서 죽이는 이런 이야기를 읽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형제간에 살인을 조장하기 위해서 이런 사건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의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에도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하셨고
13절에서부터 3장 끝 절인 24절 말씀까지 계속해서 사랑해야 한다고 그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면서 잠깐 삽입하는 말씀이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가인의 이야기가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악한 자에게 속했다.
본문 12절 말씀에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인처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했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그렇게 흉악한 죄인 살인을 저지른 것은 그것도 자기 친동생을 죽인 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도 그렇게 행한 것은 그의 소속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서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기도 하고 사탄의 자녀로 태어나기도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 사람은 창세 전에 이미 선택을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을 하셨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종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 즉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는 자로 하나님께로서 난자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또 한 종류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 즉 사탄의 자녀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없는 자로 사탄에게 속한 자로 악한 자에게 속한 자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속하지 않은 사람을 구별을 짓는 것을 좋아합니다.
항상 편가르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그렇고 이스마엘과 이삭이 그랬고 에서와 야곱이 그랬습니다.
한 아버지의 씨를 받은 형제지간에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로 구별을 했고 오늘날에는 성도와 성도가 아닌 사람을 철저하게 구별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아동센터에 다니는 아이 중에 하나가 좀 똑똑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가 있는데 부모님과 같이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의 눈으로 보면 제가 좀 편애를 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다니는 아이에게 조금 더 관심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가끔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왜 똑 같이 대우해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루는 제가 그 아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얘야 이 세상은 항상 공평한 것이 아니란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백성만 사랑하신다. 겉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신 것 같지만 하나님의 편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상을 주시려고 준비를 하고 계시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뜨거운 유황불 같은 지옥에 쳐 넣을 준비를 하고 계신단다.
하나님도 그러시는데 사람인 목사가 자기교회 성도들을 더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란다.
너는 너희 교회 목사님한테 더 사랑을 받지 않니......
그렇다고 너에게 다른 아이들처럼 해주지 않는 것은 없다.
다 같이 공부하게 해주고 다같이 밥 주고 다 같이 모든 것 해 주는데 다만 조금 더 관심 가진다고 불평하지 말아라..... "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아주 특별하게 구별을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가인이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악한 일을 한 것은 그가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처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악한 죄를 저지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소속이 악한 자에게 소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다고 하나님께 속한 우리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죄를 짓는 이유 중에 하나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질서를 지키고 법을 지키면 그렇게 살겠는데 다 안 지키는데 나만 지키면서 살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확하게 교통법규를 지키면 사람들이 법을 잘 어기지 않을 것이고 지금처럼 사고가 많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쁜 사람들이 신호도 무시하고 속도규정도 무시하고 막 달리면서 막 끼어 듭니다.
그래서 같이 손해보지 않으려고 너도나도 위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 앞에 닥칠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일이 우리 앞에 닥칠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씨를 가진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죽였다.
본문 12절 말씀에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인처럼 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사람을 죽이는 것도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죄인데 더 나아가서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악한데 같이 악하게 살지 않고 의롭게 산다는 이유를 사람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영화나 소설 같은 데서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을 찾아가서 정의의 이름으로 악당을 무찌르고 죽이면 박수를 치기도 합니다.
죄를 너무 많이 짓고 너무나 흉악하게 사는 사람은 잡아다가 사형을 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만약에 선하고 착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면 이럴 수가 있느냐고 야단을 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가 악하면서 동생이 의롭다고 가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의 일은 인간의 탈을 쓴 사람이라면 절대로 따라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인은 악하고 아벨은 의롭다고 했습니다.
악한 가인이 의로운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그것이 더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어떤 행위가 악하고 아벨의 어떤 행위가 의로운지를 본문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4절 말씀에 보면 무엇이 악하고 의로운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4장에 기록된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악함과 의로움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지은 농산물을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기르던 양을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떻게 생각을 하면 농사짓는 사람은 농산물로 짐승을 키우는 사람은 짐승으로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사람은 현금으로 하나님께 바치는데 그것이 의로움과 악함의 기준이 되겠는가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아벨은 양을 바치되 아주 정성스럽게 키운 양을 바쳤을 것이고 가인은 성의없게 아무 곡식이나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정성에도 사람의 마음을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첫 열매, 제일 좋은 것, 돈도 새돈, 새 돈이 없으면 다리미로 다려서라도 정성스럽게 바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의로움과 악함을 구별하는 것이 그런 정도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벨이 양의 새끼로 제사를 드린 것이 의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약의 제사제도를 배우면서 아셨을 것입니다.
왜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흘려서 죽게함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를 여러분은 이미 잘 아실 것입니다.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내 자신이 그 짐승처럼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짐승이 지금 내 대신 죽임을 당하고 그 대신 죽임을 통해서 잠시나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가인은 그 의미를 모르고 그저 제단에 아무 것이나 많이 올려 놓으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어머니와 아버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부모님께 부모님들이 하나님께 지은 죄의 이야기와 그 죄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제사의 원칙도 배워서 알았을 것이고 그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왜 제사를 드리는지 제사를 드릴 때 어떤 자세로 드려야 하는지 그 원리를 알고 바르게 드렸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타락할 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제사의 타락이었습니다.
아예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든지 제사를 드려도 그 의미를 모르고 드리든지 하나님을 아예 짐승의 피나 좋아하시는 분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고 죄 사함을 얻는 방법으로 제사제도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 죄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더 죄를 지으면서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오늘날 예배라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가에 따라서 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저 시간이 됐으니까 교회에 와서 앉아 있다고 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맞는 예배를 드려야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흉악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없이는 우리가 절대로 그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나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그 좋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예배학교를 하고 예배를 바르게 드려야 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예배가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의로운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 즉 예배 속에 담겨 있는 십자가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의의 기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인은 제사를 정성스럽게 바르게 드리는 아벨을 미워했다고 했습니다.
그냥 대강 적당히 하면 되지 뭐 거기 그런 의미가 중요하고 하필 꼭 짐승을 잡아야만 하는가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바르게 하는 동생을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뭘 그렇게 유난을 떨면서 신앙생활을 하느냐 대강 적당히 하면 되지.....
예배도 매주 드리는데 어떻게 시간 시간마다 정성을 다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그렇게 하느냐 시간되면 와서 앉아 있는 것만도 대단한 것이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하느냐고 불평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대강 적당히 예배를 드리고 대강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미워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기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롭게 바르게 사는 우리를 향해서 돌을 던지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악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을 죽인 가인처럼 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처음 사랑을 버렸다.
본문 11절 말씀에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데 그 사랑의 계명은 처음부터 우리가 들은 가장 핵심적인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가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야 하는 가장 큰 계명을 어긴 사람입니다.
사랑하지는 못할망정 사랑해야 할 사람을 쳐서 죽이는 끔찍한 죄를 저지를 사람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초대교회에 기독교의 복음이 시작될 때부터 강조한 것이 이 사랑이라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구약성경도 결국은 이 사랑이 핵심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는 이 사랑이 아주 중요한 핵심이 된다는 뜻을 가진 말로 이해를 하기도 하고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심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렇게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는 죄에서 구원을 받을 가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제사를 통해 예배를 통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제사제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도 이해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벨처럼 바른 제사를 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의로운 사람이 될 수도 없고 바른 예배를 드릴 수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에서의 살인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까지 포함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에 해당하는 무서운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형제를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도저히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가인처럼 해서는 안됩니다.
가인은 악한자에게 속한 사람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자기보다 의롭다고 그 형제를 죽인 아주 흉악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우리 성도의 가장 소중한 사랑의 의미를 모르고 사랑을 행치 않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벨처럼 예배의 참된 의미를 알고 예배를 잘 드림으로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알고 서로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요일 3:11-12
제목 : 가인같이 하지 말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최초로 낳은 가인과 아벨이라는 형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인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임으로 땅의 소산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임으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 삼아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이 일로 가인은 동생을 시기하게 되었고 광야에 홀로 있을 때에 동생 아벨을 쳐죽임으로 성경에 최초로 기록된 살인사건의 범인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 만물이 다 선하다고 하셨고 그 중에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다고 하셨는데 인류 최초의 형제 이야기를 이렇게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시작을 하는지 이해가 좀 안되실 것입니다.
최초의 두 형제가 서로 우애있게 지내며 서로 도와주면서 잘 살았다고 해야 사람들이 형제는 그런 거구나 라고 따라 할 텐데 마음에 좀 들지 않는다고 자기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 동생을 쳐서 죽이는 이런 이야기를 읽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형제간에 살인을 조장하기 위해서 이런 사건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의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에도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하셨고
13절에서부터 3장 끝 절인 24절 말씀까지 계속해서 사랑해야 한다고 그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면서 잠깐 삽입하는 말씀이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가인의 이야기가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악한 자에게 속했다.
본문 12절 말씀에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인처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했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그렇게 흉악한 죄인 살인을 저지른 것은 그것도 자기 친동생을 죽인 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도 그렇게 행한 것은 그의 소속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서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기도 하고 사탄의 자녀로 태어나기도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 사람은 창세 전에 이미 선택을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을 하셨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종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 즉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는 자로 하나님께로서 난자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또 한 종류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 즉 사탄의 자녀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없는 자로 사탄에게 속한 자로 악한 자에게 속한 자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속하지 않은 사람을 구별을 짓는 것을 좋아합니다.
항상 편가르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그렇고 이스마엘과 이삭이 그랬고 에서와 야곱이 그랬습니다.
한 아버지의 씨를 받은 형제지간에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로 구별을 했고 오늘날에는 성도와 성도가 아닌 사람을 철저하게 구별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아동센터에 다니는 아이 중에 하나가 좀 똑똑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가 있는데 부모님과 같이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의 눈으로 보면 제가 좀 편애를 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다니는 아이에게 조금 더 관심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가끔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왜 똑 같이 대우해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루는 제가 그 아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얘야 이 세상은 항상 공평한 것이 아니란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백성만 사랑하신다. 겉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신 것 같지만 하나님의 편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상을 주시려고 준비를 하고 계시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뜨거운 유황불 같은 지옥에 쳐 넣을 준비를 하고 계신단다.
하나님도 그러시는데 사람인 목사가 자기교회 성도들을 더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란다.
너는 너희 교회 목사님한테 더 사랑을 받지 않니......
그렇다고 너에게 다른 아이들처럼 해주지 않는 것은 없다.
다 같이 공부하게 해주고 다같이 밥 주고 다 같이 모든 것 해 주는데 다만 조금 더 관심 가진다고 불평하지 말아라..... "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아주 특별하게 구별을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가인이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악한 일을 한 것은 그가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처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악한 죄를 저지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소속이 악한 자에게 소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다고 하나님께 속한 우리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죄를 짓는 이유 중에 하나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질서를 지키고 법을 지키면 그렇게 살겠는데 다 안 지키는데 나만 지키면서 살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확하게 교통법규를 지키면 사람들이 법을 잘 어기지 않을 것이고 지금처럼 사고가 많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쁜 사람들이 신호도 무시하고 속도규정도 무시하고 막 달리면서 막 끼어 듭니다.
그래서 같이 손해보지 않으려고 너도나도 위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 앞에 닥칠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일이 우리 앞에 닥칠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씨를 가진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죽였다.
본문 12절 말씀에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인처럼 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사람을 죽이는 것도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죄인데 더 나아가서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악한데 같이 악하게 살지 않고 의롭게 산다는 이유를 사람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영화나 소설 같은 데서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을 찾아가서 정의의 이름으로 악당을 무찌르고 죽이면 박수를 치기도 합니다.
죄를 너무 많이 짓고 너무나 흉악하게 사는 사람은 잡아다가 사형을 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만약에 선하고 착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면 이럴 수가 있느냐고 야단을 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가 악하면서 동생이 의롭다고 가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의 일은 인간의 탈을 쓴 사람이라면 절대로 따라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인은 악하고 아벨은 의롭다고 했습니다.
악한 가인이 의로운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그것이 더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어떤 행위가 악하고 아벨의 어떤 행위가 의로운지를 본문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4절 말씀에 보면 무엇이 악하고 의로운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4장에 기록된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악함과 의로움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지은 농산물을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기르던 양을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떻게 생각을 하면 농사짓는 사람은 농산물로 짐승을 키우는 사람은 짐승으로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사람은 현금으로 하나님께 바치는데 그것이 의로움과 악함의 기준이 되겠는가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아벨은 양을 바치되 아주 정성스럽게 키운 양을 바쳤을 것이고 가인은 성의없게 아무 곡식이나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정성에도 사람의 마음을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첫 열매, 제일 좋은 것, 돈도 새돈, 새 돈이 없으면 다리미로 다려서라도 정성스럽게 바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의로움과 악함을 구별하는 것이 그런 정도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벨이 양의 새끼로 제사를 드린 것이 의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약의 제사제도를 배우면서 아셨을 것입니다.
왜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흘려서 죽게함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를 여러분은 이미 잘 아실 것입니다.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내 자신이 그 짐승처럼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짐승이 지금 내 대신 죽임을 당하고 그 대신 죽임을 통해서 잠시나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가인은 그 의미를 모르고 그저 제단에 아무 것이나 많이 올려 놓으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어머니와 아버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부모님께 부모님들이 하나님께 지은 죄의 이야기와 그 죄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제사의 원칙도 배워서 알았을 것이고 그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왜 제사를 드리는지 제사를 드릴 때 어떤 자세로 드려야 하는지 그 원리를 알고 바르게 드렸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타락할 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제사의 타락이었습니다.
아예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든지 제사를 드려도 그 의미를 모르고 드리든지 하나님을 아예 짐승의 피나 좋아하시는 분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고 죄 사함을 얻는 방법으로 제사제도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 죄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더 죄를 지으면서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오늘날 예배라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가에 따라서 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저 시간이 됐으니까 교회에 와서 앉아 있다고 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맞는 예배를 드려야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흉악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없이는 우리가 절대로 그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나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그 좋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예배학교를 하고 예배를 바르게 드려야 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예배가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의로운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 즉 예배 속에 담겨 있는 십자가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의의 기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인은 제사를 정성스럽게 바르게 드리는 아벨을 미워했다고 했습니다.
그냥 대강 적당히 하면 되지 뭐 거기 그런 의미가 중요하고 하필 꼭 짐승을 잡아야만 하는가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바르게 하는 동생을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뭘 그렇게 유난을 떨면서 신앙생활을 하느냐 대강 적당히 하면 되지.....
예배도 매주 드리는데 어떻게 시간 시간마다 정성을 다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그렇게 하느냐 시간되면 와서 앉아 있는 것만도 대단한 것이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하느냐고 불평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대강 적당히 예배를 드리고 대강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미워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기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롭게 바르게 사는 우리를 향해서 돌을 던지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악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을 죽인 가인처럼 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처음 사랑을 버렸다.
본문 11절 말씀에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데 그 사랑의 계명은 처음부터 우리가 들은 가장 핵심적인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가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야 하는 가장 큰 계명을 어긴 사람입니다.
사랑하지는 못할망정 사랑해야 할 사람을 쳐서 죽이는 끔찍한 죄를 저지를 사람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초대교회에 기독교의 복음이 시작될 때부터 강조한 것이 이 사랑이라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구약성경도 결국은 이 사랑이 핵심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는 이 사랑이 아주 중요한 핵심이 된다는 뜻을 가진 말로 이해를 하기도 하고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심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렇게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는 죄에서 구원을 받을 가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제사를 통해 예배를 통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제사제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도 이해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벨처럼 바른 제사를 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의로운 사람이 될 수도 없고 바른 예배를 드릴 수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에서의 살인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까지 포함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에 해당하는 무서운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형제를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도저히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가인처럼 해서는 안됩니다.
가인은 악한자에게 속한 사람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자기보다 의롭다고 그 형제를 죽인 아주 흉악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우리 성도의 가장 소중한 사랑의 의미를 모르고 사랑을 행치 않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벨처럼 예배의 참된 의미를 알고 예배를 잘 드림으로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알고 서로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