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10.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전 18)
본문 : 딤전 3:2
제목 :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감독의 자격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감독은 오늘날의 목사나 장로를 말하는 것이며 넓은 의미에서 성도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일꾼이 된 우리 모두가 실천해야 하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탓할 것이 없는, 나무랄 것이 없는, 비난받을 일이 없는, 아무에게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허물이 없는.... 이런 뜻을 가진 말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복잡한 인간관계를 이루고 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책망받을 일이 없게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책망을 받으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가 다 칭찬받고 싶어 하고 칭찬받기 위해서 좋은 일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칭찬받기는 어렵고 책망받을 일만 많은 것이 세상의 일입니다.
옛날 부모님들은 칭찬에 참 인색했습니다. 교육해야 한다고 잘못한 일만 늘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이 부모님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칭찬은 받아 본 기억이 없고 늘 책망만 받으면서 산 것 같습니다. 청소년 시절도 거의 혼자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칭찬은커녕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살았습니다.
사업을 할 때도 돈 없이 어렵게 사업을 하다가 보니까 사람들에게 욕만 먹으면서 산 것 같습니다. 종업원 월급 줘야지요, 사무실 월세 내야지요, 대출금 이자 줘야지요, 시시때때로 세금이니 공과금이니 해서 사업하는데 돈이 참 많이 들어갑니다. 보통으로 돈을 벌어서는 이런 모든 것을 착착 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회사 사장은 늘 욕을 먹고 삽니다.
목회를 해도 작은 교회 목회자는 칭찬을 받지 못합니다. 성도가 많고 교회당도 크게 짓고 구제사업이나 장학사업이나 좋은 일을 많이 해야 칭찬을 받을 것인데 작은 교회는 그런 일을 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하면서 웬만하면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작은 일이라도 칭찬할 일이 없는가를 늘 살피면서 삽니다. 칭찬하고 격려하는 일이 어렵게 사는 성도들에게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되려는 사람에게도 칭찬받을 일을 하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책망받을 일은 없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비난받지 않고 손가락질받을 일만 하지 않아도 지도자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오늘 본문에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라고 했습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면서 책망받기 쉬운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책망받기 쉬운 것들입니다. 모든 일에 다 완벽할 수 없지만 이런 일들은 관심을 가지고 책망받지 않게 조심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1)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이 본문을 가지고 여러 가지의 의미로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목사 임직을 받을 때에 결혼하지 않은 남자에게 안수하지 않습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하는데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를 할 때 아내의 도움이 없이는 목회가 힘들고 또 이성적인 문제가 생기기 쉽기 때문에 목사가 되기 전에 반드시 결혼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가지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재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내가 있어야 목회를 하기 쉽다고 하면서 재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이상한 주장이고 또 본문이 의도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혼을 금하는 것으로 본문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도 부득이한 경우에 이혼을 허락하고 있기 때문에 꼭 그런 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혼을 조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혼한 후에는 서로 잘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한 남편이 한 아내에게 서로 충실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편이 아내가 서로에게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임무를 잘 감당하면서 서로에게 주어진 임무대로 잘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축첩을 하면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일부다처제가 합법적이었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많은 아내를 두고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는 양반들 집안에는 첩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여러 아내를 두고 있는 것을 예로 들어서 첩을 두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아내가 있을 때 아들을 낳기 위해서 첩을 두었고 아내가 죽고 난 후에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다고 했습니다. 야곱도 여러 아내로부터 낳은 아들들로 열두지파를 이루었고 솔로몬 왕은 아내 외에 후궁을 1000명이나 두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구약시대의 풍습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런 첩을 두는 행위는 금해야 합니다. 특별히 목사와 장로와 같은 교회의 지도자는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가장의 의무를 잘 이행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2) 절제하며
자제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이런저런 욕심들이 있습니다. 그 욕심들은 잘 사용하면 인간이 살아가는데 유익한 것들이지만 너무 지나칠 때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다른 사람들의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진 욕심이 식욕입니다. 식욕은 우리 육신의 삶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식욕이 떨어지면 죽습니다. 그러나 그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건강도 해치게 되고 나누어서 함께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됩니다.
성욕도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서로 사랑하면서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절제하지 못하면 그 가정이 오히려 파탄이 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고 비난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 욕심이 있을 때 열심히 일도 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욕심이 지나칠 때 남의 것을 탐내게 되고 남의 명예를 가로채려고 하고 거짓으로 자신을 꾸미기도 합니다.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적당히 절제할 수 있을 때 모든 사람과 더불어서 사는 세상에서 책망받지 않고 칭찬받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들은 욕심을 통해서 이기주의적인 삶을 사는 것보다 절제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3) 신중하며
신중하다는 것은 사례가 깊고 지혜로움을 말합니다. 절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 신중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욕심대로 무조건 행할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일을 잘 추진합니다. 그런데 실수를 많이 합니다.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바로 결단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사기꾼들에게 비교적 잘 속아 넘어갑니다. 욕심 때문에 신중함을 잃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믿음에 대하여 적극적인 사람들이 설교를 들을 때 아멘도 잘하고 믿음도 좋습니다. 그런데 신중함이 없기 때문에 이단이나 거짓 선생에게도 잘 넘어갑니다. 설교를 들을 때나 주의 일을 할 때 신중하게 지혜롭게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4) 단정하며
예의가 바르고, 품위가 있어야 하고, 존경받아야 하고, 좋은 태도를 지니고,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신중한 것이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단정은 외형으로 나타나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속마음이 좋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 속마음이 밖으로 나타나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마음은 한없이 착한데 겉모습이나 겉으로 행하는 행동이 예의 바르지 못하면 안 됩니다.
마음만 바르면 되지 외형적인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시기 때문에 외형적인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외형적인 것도 참 중요합니다. 외형적인 형식이 마음의 단정함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외형적인 것도 참 중요합니다. 외형적인 것이 우리 마음의 표현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것을 무시하는 사람이 진짜 속 신앙이 좋다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이고 속 신앙이 좋은 사람은 외형적으로도 신앙의 예의범절이 좋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본문에서 감독의 자격을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라고 했습니다.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말하는 것이라면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나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하느냐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1) 나그네를 대접하며
손님 대접을 잘한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여관이나 숙박 시설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은 남의 집에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는 사도들이나 전도자들은 가는 도시마다 숙식할 곳이 필요했습니다. 또 당시의 기독교인 중에는 생활이 어려운 고아나 과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직업을 버리고 가정을 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그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감독은 이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했습니다. 감독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도 그렇게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초대교회 일곱 집사도 그런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뽑은 일꾼들이었습니다. 구제를 하되 모든 사람에게 고르게 온정을 나누기 위해서 뽑은 직분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은 그 시절처럼 그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일은 그런대로 살지만 가난한 것 때문에 차별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들처럼 누리며 살지 못하고 겨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작은 교회 목회자들 가운데는 최저생계비도 받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창피해서 수급자 신청은 하지 못하지만, 수급자보다 못한 목회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어려운 목회자들을 대접해야 합니다. 이번에 코로나 19사태로 인해서 작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더 많이 당합니다. 시도에서 국가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코로나를 극복하라고 도움을 주고 있어서 조금은 다행입니다.
우리 노회에서도 좀 큰 교회들이 작은 교회를 돕고 있습니다. 신정교회에서 어려운 교회 10개 교회를 선정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신정교회 장로님 한 분이 사업을 하시는데 우리 노회 작은 교회 22개 교회의 노회비를 대납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재철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초원교회에서도 어려운 교회 10개 교회를 선정하여 도움을 주셨습니다.
우리 노회에서 제일 큰 교회인 선두교회에서는 노회 산하 도움을 받아야 하는 17개 교회에 월세를 부담하는 뜻으로 3개월간 30만 원씩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 돈은 성도들 17명이 한교회 3개월 지원금 90만 원씩 헌금해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노회장 교회로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도 형편이 좋지 않기 때문에 못 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목회자들에게 식사나 한번 대접하고 힘내라고 격려하는 일이나 하고 있습니다.
배려(配慮)라는 좋은 글이 제 마음 같아서 소개합니다.
식사 후, 적극적으로 밥값을 계산하는 이는 돈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돈보다 관계를 더, 중히 생각하기 때문”이고. 일할 때, 주도적으로 하는 이는. 바보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다툰 후, 먼저 사과하는 이는. 잘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당신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대접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인 것 같이 생각됩니다. 늘 밥값을 내니까 돈이 많아서 그런 줄 압니다. 늘 앞장서서 일하니까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늘 먼저 미안하다고 하니까 죄가 많은 줄 압니다. 돈이 많아서도 아니고 어리석어서도 아니고 잘못한 것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우리가 할 일에 책임감을 느끼고 상대방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배려하는 마음 대접하는 마음이 감독이 가져야 할 마음이고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2) 가르치기를 잘하며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칠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성경의 진리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1장 7절의 말씀에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했는데 자기가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은 자격이 없습니다.
가르치는 것은 은사라고 했습니다. 다양한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잘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잘 설명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그런 삶을 삶으로써 가르쳐야 합니다. 삶이 따르지 않는 가르침은 그저 지식의 전달일뿐이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우리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진리인 줄 알고 믿고 따르는 것은 그의 삶이 복음과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천국을 사모하고 영생을 사모하는 사람처럼 이 세상의 삶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희생하면서 헌신하면서 끝까지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가 전한 복음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감독이 갖추어야 할 자질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가 실천해야 할 덕목들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서 가정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나그네 대접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며 그들을 배려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남을 가르칠 수 있도록 진리를 잘 배우시고 먼저 실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