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14.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58)

  본문 : 행 23:12-15

  제목 :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12.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13.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14.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15.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사도행전 후반부를 살펴보면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는 가정도 포기했고 평안하게 사는 삶도 포기했습니다. 오히려 핍박을 당할 줄 알면서도 죽임을 당할 줄 알면서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온힘을 다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한 이유를 빌립보서 3장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3:7-8)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정통적인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유대인들 중에 하나님의 일에 제일 열심을 내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전통적으로 율법을 공부한 사람이고 당시에 가장 강대국인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정도의 신분이면 유대교 지도자로 출세도 할 수 있었고 권력이나 돈이나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평안한 삶을 살기에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런 육신적으로 유익한 모든 것들을 다 해로운 것으로 여겼고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것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가지게 되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바울과 대조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모르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반대하고 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종교를 이용하여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누리고 살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었다면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시며 그렇게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았다고 한다면 아무리 미련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악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이런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바울시대처럼 그렇게 바울적이거나 그렇게 유대교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하고 육신적인 평안함과 안일을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미련하고 악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악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의로운 사람들이며 의로운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라고 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서 맹세를 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인지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본문 12-13절에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라고 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성전에서의 제사가 의미가 없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한다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큰 문제가 됩니다. 그동안 지켜온 신념이 무너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직업이나 지위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의 주장을 따르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지위와 기득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하나님이시고 메시야가 되신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한 천하에 흉악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당을 지어 맹세한 40명의 유대인들은 그런 유익도 없이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는 말에 속아서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는 말이 진짜인지 바울이 하는 말이 진짜인지 한번 생각해 보고 행동하였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냥 맹목적으로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따른 것입니다.

 

  “당을 지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당을 짓고 연합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정치를 함에 있어서도 각기 정당이 있어서 자신의 뜻과 맞는 정당을 선택하여 활동해야 합니다.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어느 라인에 줄을 서는 것이 좋은가를 살펴보고 줄을 잘 서야 합니다. 장사를 할 때도 잘나가는 업체와 체인을 맺고 그들이 공급하는 물건을 가지고 그들이 추구하는 영업 방식대로 해야 장사가 잘 됩니다.

 

  그런데 그런 당을 지을 때 그것이 선한 일인가 악한 일인가를 잘 알아보아야 합니다. 고향 사람들이 있다고, 잘 아는 사람이 거기 있다고,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내 취향에 맞는다고, 그것이 선한지 악한지 구별하지 않고 당을 지어서는 안 됩니다.

 

  뭘 잘 모르고 악한 일에 동원이 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앞에서 선동하는 사람들에게 속아서 악한 일에 이용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도 이런저런 당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에는 왜 이렇게 많은 교파들이 있는가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장로교니 감리교니 침례교니 하는 것은 나름대로 더 하나님을 바르게 잘 섬기고 더 바르게 교회를 운영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인간의 감투 때문에 이익 때문에 교단이 교파가 갈라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더 잘 하기 위해서입니다.

 

  문제는 교회라는 간판을 가지고 교회 행세를 하는 이단들입니다. 또 교회 내에도 거짓선생들이 많이 침투하여서 거짓교훈을 퍼트리고 당을 짓는 것입니다. 그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기 때문에 바른 복음 바른 진리는 사라지고 교회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이단들이나 거짓 선생들과 함께 당을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동조하거나 한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뜻을 바르게 따르고 있는지 바른 복음을 따르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맹세하되”라고 했습니다.

  맹세라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서 많이 있었던 것이고 좋은 일에 사용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맹세입니다.

 

  하나님의 맹세는 주로 우리들과 맺은 언약을 지키겠다는 맹세에 대한 언약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4:3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맹세는 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언약에 대한 맹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시고, 그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시고, 그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게 하시고 메시야를 통해서 구원해주시겠다는 언약에 대한 맹세들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사람들의 맹세는 그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맹세와는 반대되는 일을 하기 위한 맹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신 은혜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맹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정의를 내세워서 바른 일을 하겠다고 하는 맹세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는 흉악한 일에 맹세를 한 것입니다. 이런 흉악한 죄를 짓는 일에 맹세를 하고 덤벼드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잘못된 일에 맹세를 하고 지키지도 못할 일에 맹세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바른 일인지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고 또 그 맹세를 지킬 수 없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아시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맹세까지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 자기 주장하는 일에 끝까지 고집을 세우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념을 가지고 변함없이 그 일을 따른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 신념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것인가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맹세할 것이 없어서 사람을 죽이는 일에 맹세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에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일에 맹세를 한다는 것은 매우 악한 일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십계명에 아주 뚜렷하게 나와 있는 엄한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살인의 법위를 넓혀서 형제에게 욕을 하는 일이나 미련한 사람이라고 비웃는 일이나 미워하는 일에까지 이 살인죄를 적용시키셨습니다.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주시고 그 속에 율법이나 계명을 주신 목적은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사랑까지는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엄연한 계명을 두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살인까지 하려고 맹세하는 일은 어떻게 보더라고 매우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면서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억압받고 살던 삶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온갖 잡신들을 섬기던 것을 이제는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애굽사람들에게 당한 핍박과 착취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인간답게 사로 사랑하라고 법을 제정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법을 가지고 그런 정신을 따르지 않고 형제를 이웃을 정죄하고 벌을 주고 억압하는 일에 사용을 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워하기 위해서 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율법이 있습니다. 율법 외에도 각종 법들과 규칙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지만 이런 법과 규칙들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면서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런 법들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사용을 하는 일이 많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만든 법을 가지고 남이 잘 되는 일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도 이런 목적입니다. 도둑처럼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가끔 잘못된 교회들이 교인들을 정죄하고 내쫓는 일이 있습니다. 그만한 사연이 있기는 하겠지만 교회가 하는 일은 살리는 일입니다. 육신도 살리고 영원한 생명도 살리는 일이 교회가 하는 일입니다. 죽이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우리가 비록 사람의 목숨을 죽이는 살인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미워하고 정죄하고 욕하는 일도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 같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여 영원한 생명을 살리는 일을 맡은 교회가 다른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죄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본문 14-15절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로 당을 지어 맹세한 40명의 유대인들이 그 실천방법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부장에게 가서 바울에게 더 자세히 물어 볼 말이 있으니까 공회 앞에 다시 한 번 바울을 데리고 나오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공회에 나오는 길목에 있다가 죽일 준비를 다 해놓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면서도 그 방법이 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을 진행하는 방법도 올바르게 해야 됩니다. 그 과정 또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진행하는 과정을 바르게 하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말일 것입니다. 어차피 나쁜 짓을 하는데 방법이 옳던 그르던 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인을 계획한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옳은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에 그들 생각대로 바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방법도 바른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정식으로 재판을 거치든지 다른 의결 기관의 결의를 거치든지 합당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죽이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안중에는 이미 선이고 악이고 하나님의 뜻이고 아니고는 의미가 없습니다. 무조건 자기들의 생각대로 바울을 죽이기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받을 교훈은 그 목적이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이 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과정들도 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고 그 결과가 좋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이 바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한 방법으로 돈을 벌면 안 됩니다. 출세를 하는 것도 권력을 잡는 것도 그 과정이 중요합니다. 불법으로 돈을 벌거나 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출세를 하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의 부흥까지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대형교회만 되고 사람만 많이 모으면 잘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나 과정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과정이 아니고 불법으로 결과만 좋게 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부활과 영생을 소망하면서 살게 만드는 곳입니다. 그런 것이 아닌 다른 복음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불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는 어리석은 유대인들이 공모를 하고 맹세를 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가는 길은 바른 길인가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도 바른 과정인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른 길로 가는 것은 다 잘못된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