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23.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55)

  본문 : 행 22:30-23:5

  제목 :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30.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1.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제가 설교준비 하나는 정말 열심히 합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 본문이 주는 의미와 오늘날 우리가 받을 교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준비합니다. 설교를 하고 난 후에도 홈페이지를 통해서 제가 한 설교를 들어보면서 설교가 어땠는지 살펴봅니다.

  가끔 어떤 때는 제가 한 설교에 은혜를 받기도 하는데 보통은 뭔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자주 가집니다. 제 설교만 아니라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때로는 뭔가 좀 부족하다 그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런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좀 더 재미있고 좀 더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연구를 하고 설교에다가 이것저것 첨부를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인용하고, 특별한 경험담도 이야기하고 과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이야기들도 덧붙여서 설교를 흥미진진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니까 설교가 재미는 있고 삶에 유익은 더하여 주는 것 같지만 정작 성경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복음에서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복음을 말하기는 하는데 흥미를 더하거나 삶에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것을 섞다가 보니까 정작 전하여야 할 복음이 변질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반대되는 이야기들도 복음과 함께 전해짐으로서 사람들이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복음과 반대되는 것을 설교라고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 복음이 부끄러운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습니다. 내가 네 죄 대신 십자가에 죽었다고 해서 부끄러운가? 아무 공로 없이 그냥 구원해 준다니까 자존심이 상하는가? 먹고 살만하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 달갑지 않은가? 이런 생각들을 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바울이 이스라엘의 공회 앞에서 증언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군중 앞에서 변명을 했을 때 군중들은 오히려 난동을 부리고 바울을 죽이려고 하자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데리고 들어와서 스스로 심문을 하려했습니다.

  바울이 천부장에게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자 정식 재판에 회부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먼저 유대인의 지도자들을 모으고 재판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려고 하였습니다.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웠다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바울과 대제사장의 설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에게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을 회칠한 담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를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부분들이 회칠한 담처럼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 가짜들로 되어 있습니다. 회칠을 한 겉모습 때문에 진짜의 모습을 모르고 속는 일이 많습니다.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본문 22장 30절에서 23장 1절에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공회’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통치단체를 말합니다. 법적인 일이나 종교적인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산헤드린공의회라고 했고 유대 최고 법원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제사장들까지 소집을 한 것을 보면 천부장이 바울의 죄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바울의 문제를 처리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에게 확실한 죄가 있으면 구속을 하고 재판에 회부할 것이고 죄가 없거나 그 죄가 로마의 법적인 분제가 없으면 석방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 앞에서 증언할 때마다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말을 현대어성경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선한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대강 적당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산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그것도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했지만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지도자급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양심이라는 말은 좋은 말이지만 양심대로 산다고 해서 다 바른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듣고 무엇을 배우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서 양심은 각각 다릅니다.

 

  바울은 율법을 철저하게 배웠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뜻을 바르게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양심이 따르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발견하고 따른 사람입니다.

 

  본문의 대제사장 이름은 2절에 기록된 대로 ‘아나니아’였습니다. ‘아나니아’는 헬라식 이름이고 그의 유대식 이름은 ‘아난야’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사는 사람 같지만 사실은 그런 은혜 가운데서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가 대제사장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된 것이 아니라 당시 대제사장이 가진 권력이 탐이 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제사장이 된 사람입니다.

 

  대제사장이 되면 실제적인 최고의 권력가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 치부를 누리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서 운동을 많이 하고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돈을 많이 주고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렇게 자리에 오른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을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또 자신은 양심대로 산다고 생각했지만 회칠한 무덤처럼 속과 겉이 다른 사람일뿐이었고 하나님의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일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다 바울처럼 철저하게 선한 양심으로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르지 못한 양심 즉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른 복음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잡다한 것이 뒤섞인 다른 복음을 듣기 때문에 바르지 못한 양심을 가지고 그저 세상 복을 받기 위한 방법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본문 2-3절 말씀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자 거기 참석했던 아나니아라는 대제사장이 바울 곁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고 했습니다. 선한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하는 바울을 치라고 한 것은 바울의 그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그 속뜻을 알아차리고 화가 나서 바울을 치라고 명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너희들은 바르지 못한 비뚤어진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척하지만 나는 정말로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화풀이로 바울을 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그 말을 듣고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 있으면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고 하느냐고 했습니다. 네가 나를 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를 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말처럼 아나니아는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암살자에 의해서 암살을 당한 것으로 역사가들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사장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나라를 핍박하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로마의 종노릇을 했기 때문에 암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회칠한 담이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회칠한 무덤이란 무덤에 회칠을 하여서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한 것 같으나 그 무덤 안에는 썩어가는 시체가 있는 것처럼 겉으로는 깨끗하게 보이나 그 속에는 더러운 죄로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회칠한 담은 담이 튼튼하지 못하여서 곧 무너질 것 같은 연약한 담인데 거기에다가 회칠을 하여서 아주 튼튼한 새벽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회칠한 담이나 회칠한 무덤은 다같이 위선자들을 말합니다. 겉으로는 선한척 하지만 악한 마음이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회칠한 담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대제사장을 회칠한 담이라고 한 것은 대제사장이 가지고 있는 위선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다고 하면서 그 일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지금 대제사장은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재판을 하는 것은 죄가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판을 하기도 전에 먼저 그 입을 치라고 명령하는 것은 법을 위반한 처사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가려서 다시는 죄를 짓지 못하게 벌을 내리는 것이지만 억울하게 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무죄인이 되도록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죄를 지적하는 검사도 있어야 하지만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사도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 재판정입니다.

 

  대제사장은 그런 율법의 정신을 살려서 바울을 변호하고 바울이 가진 복음이 진짜 하나님의 뜻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 가진 대제사장의 자리를 지키려고 하였고 그 자리로 인한 이익만 챙기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에도 이런 회칠한 담과 같은 모습은 없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착하고 바른 삶을 사는 사람처럼 행세하지만 속에는 악한 생각들을 품고 살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복음을 알고 믿는 사람처럼 행세하지만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냥 겉으로만 신앙이 있는 체 하는 사람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런 회칠한 담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말을 하면서도 복음을 왜곡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고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본문 4-5절에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대제사장에게 비난의 말을 하자 바울 곁에 있던 사람이 바울에게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22장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22:28)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의 지도자이면서 지금은 재판장 자리에 앉아서 바울을 재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모독하거나 저주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재판을 받는 바울이 재판장이자 민족의 지도자인 대제사장을 모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의 잘못을 지적하자 바울은 즉시 사과를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치라고 한 사람이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했다고 하면서 성경에도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말 속에도 대제사장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바울이 대제사장을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눈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눈이 좋지 않아서 편지를 쓸 때에도 대필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가 입은 옷이나 그가 앉은 자리를 보고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 대제사장인 줄 짐작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자기를 재판하러 모인 공회원들을 잘 살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정말로 그에게 말한 사람이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면 그 말 속에는 숨은 뜻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 숨은 뜻은 대제사장이 대제사장으로서의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대제사장이요 그렇다면 어떻게 입을 치라고 하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대제사장으로서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기에 나도 당신이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고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런 숨은 뜻을 이해하고 부끄러워했는지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을 향하여 회칠한 담이라고 비난하고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라고 저주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말에 창피한 줄 알고 그냥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장 부끄럽고 창피한 말이 이런 말일 것입니다. 네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냐? 네가 집사냐 권사냐 장로냐? 네가 목사냐? 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제일 창피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일이 정말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일이 정말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직분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런 비난을 받는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런 교회의 직분들을 명예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일의 성격을 잘 안다면 이런 직분을 맡은 것이 참으로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직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소식 가장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보람 있는 직분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도 가장 큰 복을 주게 되는 너무나 귀한 직분입니다.

 

  이런 귀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기쁘고 즐겁게 이 직분들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직분임을 알고 최선을 다해서 맡은 일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께서 너를 치시리로다.”라는 바울의 말을 제목으로 본문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자신도 회칠한 무덤처럼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는 아닌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의 신앙고백이 이런 위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인지를 살펴보시고 진실한 고백을 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