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17.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45)
본문 : 행 21:15-21
제목 :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
“15.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17.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요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었다가 잘못을 깨닫고 목사가 된 사람의 간증이 여러 편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분이 서울대학교에 들어갈 정도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는데 어쩌다가 친구들의 소개로 공산당을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공산당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연구를 했는지 그 책들이 한 방에 가득 쌓일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이 공산당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왜 공산당을 좋아하고 주사파가 되려고 하는가를 보았더니 백성들이 다 잘 사는 그런 사회를 위하기보다는 공산주의가 되면 자기들이 다 감투 한자리 하게 된다는 것 때문에 목숨을 걸고 그런 운동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전향을 해서 더 이상 그들과 만나지 않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엄청난 책을 보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려면 그것을 이길 수 있도록 더 많은 공부를 해서 그 사상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되는 것에 대해서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더 많은 지식을 가져야 옛날 생각이 잘못된 것인 줄 알고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배우고 알고 체험했던 것들은 항상 우리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다른 것이 들어오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전에 배웠던 것 보다 더 많이 배우거나 더 많이 체험을 하거나 더 큰 확신을 가져야 옛날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시작될 때 제일 걸림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교였습니다. 기독교의 뿌리는 유대교이고 유대교가 믿는 그 하나님께서 아주 핵심적으로 하신 일인데도 유대교가 기독교의 방해세력이 된 것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조상대대로 수천 년 동안 배워왔던 율법과 제사와 각종 유대교 관습들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 특별히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수천 년 동안 율법에 대해서 성전제사에 대해서 많은 교육을 받았고 그것을 최고의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도 바울은 결국 이 유대교인들에 의해서 결박을 당하여야 했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끌려가야만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유대교를 배반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배반한 반역자였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까지도 바울을 비난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의 관습 때문에 복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과 사도 바울의 갈등관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 갈등관계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에 열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 배우고 경험했던 고정관념들 때문에 율법에 열성을 가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본문 15-20절에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반대하고 만류하였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1차, 2차, 3차에 걸쳐서 소아시아지방과 유럽의 입구인 마게도니아 지방에서 선교를 했습니다. 한번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난 후에 다른 도시에 갔다가 그 교회에 거짓 선생들이 들어오고 다른 복음을 따른다는 소식을 들으면 또 그 도시를 방문하여 복음을 바로 전하고 믿음을 굳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대강 소아시아 지방과 마게도니아 지방에 복음이 정착되고 있음을 확인한 사도 바울은 이제는 전에 결심한 유럽의 중심지인 로마로 또 땅 끝이라고 생각한 스페인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했습니다.
당시의 패권국가인 로마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이 길은 험난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은 그래도 하나님을 아는 유대인들이 흩어져 있는 도시들을 다니면서 선교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로마는 다른 도시였습니다. 잘못하면 붙잡혀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믿는 형제들에게는 그동안 자신이 한 선교보고를 통하여 복음이 세계만방에 전해지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해 주셨음을 보고 함으로 믿음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동족인 유대인들이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는 유월절 절기를 택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 가지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으나 아직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다시 한 번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율법에 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율법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른 믿음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처음 머물렀던 구브로 사람 나손은 오랜 제자라고 했습니다. 오랜 제자라는 말은 처음부터 제자가 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셔서 교회가 시작되던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예루살렘교회에 중요한 지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함께 한 형제들이나 장로들 역시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이 행한 선교보고를 하였습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다닌 것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일을 하신 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바울 자신은 그저 심부름꾼이고 일꾼일 뿐이고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도 바울 자신이 만든 복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이며 그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여서 이방인들까지도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 보고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 복음을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특별한 은혜임을 알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
본문 20-21절에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기독교인으로 개종을 했으면서도 율법에 열성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고 유대인들의 관습을 지키는 것을 계속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 바울을 그런 것들을 금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모세를 배반하고 모세를 보낸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 언약을 따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조상들을 통해서 특별히 모세를 통해서 주신 옛 언약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갈등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 사이에서 혼란이 있습니다. 복음을 따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에 대해서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서신에 수없이 반복되어 있는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그러면서도 율법은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며 믿음으로 인하여 율법은 폐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율법이 없었으면 우리가 죄인인줄 도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이 있기 때문에 율법에 비추어보아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그 뜻을 바르게 알고 율법을 따라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가장 근본적이 목적은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인 줄을 깨닫고 그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대강령이라고 하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죄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그 죄의 흉악함을 아는 사람이 다시 죄를 짓고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고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난 후의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고 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믿음보다 우위에 두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결국은 율법을 지켜야 되니까 율법을 행함으로 예수님 믿는 사람이 되고 구원을 받는 사람이 되니까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9)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방법으로서는 이미 죽은 것이며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는 기능도 이미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도 못하고 우리를 정죄하지도 못합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 그 믿음을 따라 살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너무 소홀하게 생각하면서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쁜 짓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과거에 유대인들은 율법의 종이었습니다. 율법이 시키는 대로 하면 살고 율법을 어기면 죽어야 하는 종과 같은 신세였습니다. 율법 때문에 죄의 종이 되어야 했고 죽음의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자유를 주셨습니다. 율법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하지 못합니다. 율법에서 죄에서 죽음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제는 율법을 지키는 것도 자유입니다. 율법이 시켜서 율법이 우리를 억압해서 죽지 않으려고 억지로 마지못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한 일을 하고 바르게 살려고 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서 보람된 삶을 위해서 내가 선택해서 내 스스로 착하게 삽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착하게 사는 것이나 교회에 충성을 하는 것을 억지로 하면 그것은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람된 일인 줄 알고 스스로 하는 것은 자유인으로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자진하여서 착하게 살고 교회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이렇게 율법을 지키고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억지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배우고 익히고 실천해 왔던 생활 습관 때문에 과거의 일들을 버리지 못하고 율법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렇게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놓지 않고 얽매여 있는 것은 우리들도 그들처럼 종교애 대한 고정관념들을 버리지 못해서입니다. 우리의 유교가 유대교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착하게 살고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복을 받는 길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불교나 무속신앙도 우리가 복음을 따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인들입니다. 고행을 해야 하고 신비한 일을 행해야 복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따르지 못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율법에 사로 잡혀서 복음을 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유사 종교와는 전혀 다른 진리의 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너무나 귀한 진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종교적 관습에서 벗어나서 자유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유롭게 선한 일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