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3.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41)
본문 : 행 20:33-35
제목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33.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록펠러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53세에는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55세에 죽을병에 걸려서 1년 이상 더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기적적으로 98세까지 장수하였는데 그를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게 하고 장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설교 제목이자 금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로 정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록펠러가 마지막 검진을 받기 위해서 병원에 왔을 때 마침 로비에 걸려 있는 액자에 글이 그의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 액자의 글이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이 있다"라는 글이었습니다. 누가 오늘 본문 말씀을 살짝 바꾸어서 실감나게 걸어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록펠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만 노력을 했지 한 번도 남을 도우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병원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는데 허름한 옷을 입은 여자가 병원 관계자와 다투고 있었습니다. 병원 측에서 그녀의 딸이 병원비를 내지 못했으니까 데리고 나가라고 했고 여인은 퇴원시키면 딸이 죽는데 어떻게 퇴원을 시키느냐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를 본 록펠러는 비서를 시켜 아무도 모르게 그 아이의 병원비를 다 내어주게 했습니다. 그 결과로 얼마 안 있어서 그 여인의 딸은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에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도 그의 병이 나았고 98세까지 살면서 이런 선한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후일 록펠러는 그의 자서전에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을 하였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 살았던 53년은 불행한 삶이었고 그 후 45년의 나누어주는 삶이 참으로 행복한 삶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착같이 노력하여서 성공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내가 가지기 위해서 내가 누리기 위해서 악착같이 노력을 하는 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남을 도와주기 위해서 악착같이 노력을 하는 삶은 행복한 삶입니다. 이 원리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해주신 원리이고 사도바울이 친히 실천했던 원리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따라야 할 귀한 삶의 원리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지 않았습니다.
본문 33절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습성 속에서 가장 악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탐심 즉 지나친 욕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을 하게 된 원인도 이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탐심 때문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탐욕 때문에 죄를 짓고 이 탐욕 때문에 망하게 되고 이 탐욕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돈에 대한 지나친 탐욕, 성에 대한 지나친 탐욕, 명예에 대한 지나친 탐욕, 이런 탐욕들 때문에 오히려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도바울은 철저하게 이런 탐욕을 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욕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은이건 금이건 의복이건 아무리 귀한 것이라고 해도 남의 손에 있는 것에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구약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시민으로 헬라의 문화에도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출세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믿게 된 후에도 얼마든지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직접 복음의 진리를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깨달은 복음의 비밀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가 받은 그 귀한 복음의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제공을 하고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면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존경받는 스승으로 지도자로 행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받은 능력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병이든지 고칠 수 있었고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쓰던 앞치마나 손수건만 환자에게 올려놓아도 어떤 병이든지 다 나았다고 했습니다. 이정도 실력을 가지고 욕심을 차리려고 했다면 어마어마한 사람을 모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어마어마한 재물도 거둘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사이비 이단들은 되지도 않은 재주들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라고 속여서 사람들을 모으고 엄청난 재물을 모읍니다.
사도바울의 능력은 요즘 사기꾼 같은 이단들이 거짓으로 꾸미거나 아주 작은 요술을 가지고 대단한 것처럼 떠벌리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이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능력이었습니다.만약에 사도바울이 이런 능력들을 가지고 자기의 이익을 찾기를 원했다면 천문학적인 부를 이룰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바울이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했다면 그런 능력도 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주는 것이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나누어주면서도 더 행복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쓸 것을 스스로 충당하였습니다.
본문 34절에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라고 했습니다.
주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쓸 것을 스스로 충당할 수 있어야 남에게 받는 것을 바라지 않고 나누어 줄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이 쓸 것을 스스로 충당하였다고 해서 모든 지도자들이 다 자기의 쓸 것을 스스로 충당하면서 일을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쓸 것을 공급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9장에는 교회의 일꾼들에게 생활비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 경우를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고전9:4)
“우리가...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전9:5)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고전9:6)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과 그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에게도 먹고 마셔야 될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내를 대동하여 다닐 권리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할 권리도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도 다 가정을 꾸리고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목회에 전념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시대에도 모든 일꾼들이 바울처럼 결혼도 하지 않고 일을 하면서 스스로 생활비를 충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고전9:7)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고전9:7)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전9:7)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생활비는 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군 복무를 하는 사람도 나라에서 주는 비용으로 삽니다. 포도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사를 지어서 그 열매를 먹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양을 키우는 사람도 양떼의 젖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원리들을 예로 들면서 모든 일꾼들이 다 자기처럼 스스로 필요한 것을 충당하라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다 사례를 받아서 먹고 살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 자신이 쓸 것을 스스로 충당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9:12)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이 이 귀한 복음을 전하면서 생활비나 요구하고 돈이나 요구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면 사람들이 장삿속으로 생각하여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임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목회자들에게 생활비를 주기 위해서 성도들의 헌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헌법에도 세례교인이 된 사람은 의무적으로 주일헌금과 감사헌금 십일조헌금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무규정을 강조하면 성도들이 시험에 들고 또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돈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오해를 할 소지가 있어서 웬만하면 헌금 이야기는 안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을 마치 돈을 받고 파는 것처럼 생각할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강조하지는 못합니다. 성도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아서 기쁨으로 헌금을 드릴 때 드리는 사람도 기쁘고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또 사도바울이 자기 스스로 필요한 것을 충당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자랑을 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바울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바울 자신의 소유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자신은 그냥 전달만 했을 뿐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자신을 자랑하거나 칭찬을 받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께 이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고 명령에 불복종하면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부득불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누구에게 대가를 받거나 칭찬을 받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너무나 귀한 일이고 그런 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생활비를 받아서 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사도바울은 스스로 자기가 필요한 것은 자신의 손으로 벌어서 충당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데 그것이 걸림돌이 될까봐서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필요한 것을 충당하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본문 35절 말씀에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주지 못하고 받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탐심 때문입니다. 지나친 탐욕을 버리지 않는 한 남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남에게 주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게으름 탓이기도 합니다.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 불로소득만 바라는 사람은 남에게 주지를 못합니다. 자기가 쓸 것을 스스로 충당할 수 있는 사람만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남에게 주지 못하는 것은 주는 자가 받는 복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고 삶속에 실천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베풀지 못합니다.
남에게 베푸는 삶을 보고 자란 사람이나 자신이 경험하면서 사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베풀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보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사람은 남에게 주는 일을, 그렇게 손해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산 사람은 나중에 부자가 되어도 남에게 주지 못합니다. 가난한 것이 너무나 힘들고 돈이 없이 사는 삶이 너무나 비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돈이 들어오면 목숨처럼 붙잡고 남에게 주지도 못하고 자신도 쓰지 못하고 삽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남에게 나누어 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준 것보다 더 많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후히 되어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해서 도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곡식을 저울에 무게로 달지 않고 되나 말로 담아서 측정을 했습니다. 되에 담을 때 그냥 담는 것 하고 누르고 흔들어서 담는 것하고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남에게 나누어 줄 때 하나님께서 다시 되돌려주실 때는 후하게 더 많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누어줄 때 우선적으로 교회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세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헌금하는 것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되돌려주시는 축복의 통로라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헌신하시는 분들은 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로된 한 형제자매들입니다. 영원토록 함께 할 형제자매이며 험한 세상에서 서로 도우며 천국까지 가야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누어주어야 할 가장 귀한 것은 우리가 받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최고의 것을 나누어주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도 우리교회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목표로 삼고 시작했습니다. 내가 가진 물질들을 교회를 위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되돌려주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 나 자신도 복을 받고 나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백성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