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9.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33)

  본문 : 행 20:7-12

  제목 : 유두고라 하는 청년.

 

 

  “7.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사도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에 마게도냐에서 드로아에 이르는 중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드로아에서 일어난 일 중에 청년 유두고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드로아에 유두고라는 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드로아를 떠나기 직전에 드로아에 있는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긴 강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앉을 자리가 없었는지 창에 걸터앉아서 바울의 강론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낮에 일을 너무 피곤하게 해서인지 바울이 너무 오랫동안 강론을 해서인지 졸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3층에서 떨어졌는데 가서 일으켜보니 죽어있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 소식을 들었는지 강론을 하다가 말고 아래로 내려가서 그 죽은 청년 위에 엎드렸습니다. 바울이 그를 껴안고 하는 말이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올라가서 떡을 떼어먹고 오랫동안 날이 새기까지 강론은 계속되었고 강론이 끝난 후 바울은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이 청년 유두고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받을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본문 7-8절에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라고 했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은 옛날 성경(개역한글)은 “안식 후 첫날”이라고 번역했던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 즉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 안식일이 지난 다음 첫날은 일요일 즉 주일을 말합니다. 이 날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 다음날이 안식일(토요일)이었고 그리고 그 다음 일요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날을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라 하여 ‘주의 날’, ‘주일’로 부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것이 차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안식일이 아닌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이나 18장에서까지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서 강론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안식 후 첫날, 그 주간의 첫날에 모여서 강론을 한 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안식 후 첫날 즉 주일날에 모여서 강론을 하고 떡을 떼고 한 것은 오늘 본문이 공식적인 첫 기록으로 보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갈 때는 그들이 모인 안식일에 가서 강론을 했지만 비록 가정집에서 모였지만 그곳이 교회당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날 정식으로 모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 것은 하나님께서 따로 정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교회가 믿는 가장 핵심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그 핵심적인 일이 일어난 주일에 모인 것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사람들이 직접 목격한 역사적 사실이며 우리가 믿는 믿음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하면서 까지 부활의 증인이 되었으며 모든 기독교인들이 자연스럽게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떡을 뗀다는 말은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성찬식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찬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좁은 곳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만찬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시의 성도들은 모일 때 마다 예수님께서 제정해주신 성찬예식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 다음날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한 마디라도 더 해주고 떠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밤이 새도록 말씀을 강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라고 했습니다. 왜 등불을 많이 켰는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밤중이니까 환하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비록 좁은 집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열심히 바울의 강론을 경청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바울로 하여금 쉽게 강론을 끝낼 수 없게 하였을 것입니다. 요즘은 다들 바쁘고 또 그동안 설교들을 많이 들어서 30분만 지나면 지루해하고 시계를 자꾸 보려고 하지만 당시에는 말씀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 것을 최고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본문 9절에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유두고가 창에 걸터앉지 않고 안에 들어가 있었으면 떨어질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 안에 들어가서 앉지 않고 창에 걸터앉았느냐고 비난을 합니다. 유두고가 창에 걸터앉은 것은 장소가 비좁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자신은 젊었으니까 창문에라도 걸터앉은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착한 마음 때문에 자신이 희생을 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깊이 졸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을 들을 때 졸지 말아야지 아무리 피곤하다고 졸면 안 된다고 지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귀한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라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도 나름대로 할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낮에는 힘들게 일을 했기 때문에 피곤해서 졸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 바울이 너무 오랫동안 강론을 해서 졸았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너무 어렵고 딱딱한 말로 설교를 하니까 졸음이 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것은 조는 것을 합리화 하려고 기록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사정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졸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이 너무 피곤하거나 지난밤에 잠을 자지 못한 사람은 졸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은혜로운 말씀이라고 해도 잠을 자지 않으면 졸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리 졸지 않도록 준비를 해야 합니다. 토요일은 주일을 위해서 무리하게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토요일은 주일을 위해서 잠을 푹 자야 합니다. 이런 준비가 없이 피곤하다 잠을 못 잤다,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일주일의 삶은 주일날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이런 정도의 교훈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건을 통해서 영적인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의 끝자리에 앉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적극성을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정말로 위대한 것이고 그 믿음을 진실 되게 고백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소중한 것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적극적이어야 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앉는 자리를 보아도 여러분이 얼마나 적극적인지를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뒤에만 앉는 사람, 눈에 잘 안 띄는 구석자리에 만 앉는 사람은 소극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예외는 있습니다. 아이가 있는 부모님이나 안내를 맡은 분들이나 예배의 수종을 들어야 하는 분들은 예외입니다.

 

  예배시간에 일찍 오는가 늦게 오는가 하는 것을 보고도 그 사람의 신앙이 적극적인지 소극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외는 있습니다. 멀리서 오시는 분들은 차가 막히기도 하고 어린아이를 키우는 분들은 준비시간이 더 많이 걸리기 때문에 예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수로울 것 같지 않은 이런 일들에도 적극적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이런 소극적인 마음 때문에 믿음 전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할 때 그것이 큰 믿음으로 성장하는 요인이 됩니다.

 

  뒷자리에 앉는 것이 지각하는 것보다 낫고, 결석하는 것보다 지각하는 것이 낫습니다. 가끔 결석은 하지만 신앙을 버리지 않고 가끔이라도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예 안 나오는 사람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그런 양보들이, 그런 소극적인 행동들이 창가에 앉았다가 떨어져서 죽은 유두고처럼 우리를 이 믿음에서 떨어지게 해서 영원한 죽음을 당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조는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아예 오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습니다. 피곤하다고 아예 교회에 안 오는 사람보다는 와서 졸고 있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버릇이 되어서 매일 존다면 자신에게 엄청난 손해가 됩니다. 전에 우리교회 어떤 분이 교회에 오면 좁니다. 교회에 빠지지도 않고 지각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좁니다. 설교 시간에 조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남들이 기뻐 춤을 추고 찬송을 할 때도 좁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서 영의 양식을 주는데 하나도 안 먹습니다. 자신은 뭘 잘 안다고 목사 설교를 안 듣지만 엄청난 교만입니다. 설교 한번 듣고 평생 간다면 누가 걱정을 하겠습니까? 듣고 또 듣고 평생을 들어야 되는 것이 설교이고 평생 알아야 할 것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설교를 안 듣는 사람은 망합니다. 육신의 삶도 망하고 영적인 삶은 더 망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교회에 온 사람이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 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하세요. 믿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든지 믿음을 가지기 위해선 노력을 하시고 정 안되면 세상에 나가서 세상에 살 때라도 쾌락을 누리면서 사세요.

 

  어중간하게 교회에 다닌다고 나쁜 짓도 못하고 살고 그렇다고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천국백성도 못된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저 끝에 아슬아슬하게 따라오다가 잘리지 말고 확실하게 앞자리에 오셔서 적극적으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유두고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본문 10-12절에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 시원치 않게 한다고 제가 좀 꾸지람을 한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분 나빠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쩨쩨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런 연약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유두고가 그렇게 소극적으로 하다가 3층에서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마음이 나쁜 사람들 같으면 잘 죽었다 창가에 앉아서 졸 때부터 알아 봤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들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라고 하면서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비록 그가 그렇게 소극적으로 행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귀하게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유두고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죽음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가 다시 삶으로 인해서 그 자신도 생명을 되찾았고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유두고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유두고 보다 나은 점이 있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유두고 보다 못한 면들이 많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런 못된 행동들을 보고 벌을 내리신다면 벌을 받지 않고 살아남아 있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런 연약함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연약한 육신 속에 있는 믿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비록 질그릇 같은 연약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그 연약한 질그릇 안에 보배로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질그릇을 보시지 않으시고 그 그릇 안에 있는 믿음을 보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시지 않으실 것이고 우리가 비록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위대한 믿음입니다. 이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두고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왕 신앙생활을 하시려면 적극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낙락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하지 말고 확실하게 적극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좀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도 실망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믿음이 위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믿음을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