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3. 25.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12)
본문 : 요일 2:1
제목 :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한 주일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뿐만 아니라 성경전체의 기록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제일가는 목적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설교를 듣고 한 주일동안 좀 바르게 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는 목사니까 늘 그런 말을 하는 것이고 우리의 삶은 이 죄악된 세상에 사는 것이니까 어쩔 수 없소라고 하면서 그냥 그렇게 사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죄를 안 지으려면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면 몰라도 이 복잡한 세상 이 험한 세상 이 죄가 많은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살기란 정말 불가능할 것입니다.
죄를 안 지으면 우리에게 좋고 우리가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락한 우리의 습성으로는 죄를 짓지 않고 살기란 정말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죄를 범하고 사는 우리들을 위해서 오늘 말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우리가 사는 삶의 원리가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죄를 지었을 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에게 대언자가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대언자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들이 자녀들의 잘못을 꾸짖는 것을 보면 이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인지 별로 좋지 않은 아버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별로 좋지 않은 아버지는 자식들이 잘못하면 그 잘못을 꾸짖기만 합니다.
야 이 나쁜 놈아 네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해 하고 매를 때립니다.
자식이 잘못을 했을 때 매를 들고 다시는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꾸짖기만 하는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좋은 아버지는 회초리를 들고 때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 아이에게 왜 나쁜 짓을 하면 안 되는지를 하나 하나 잘 설명을 해 주는 아버지입니다.
더 좋은 아버지는 그 잘못한 것을 이해하고 감싸 주는 아버지입니다.
그래 그까짓 공부 좀 잘못한다고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다 실수한번 했다고 인생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공부 못하는 사람이 더 잘 될 수도 있고 말썽꾸러기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된다라고 아이를 안심시키고 힘을 주는 아버지가 정말 좋은 아버지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좋으신 아버지가 되십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
죄를 짓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고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으면 용서해 주시고 더 나아가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 주시고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 연약합니다.
이렇게 거룩한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우리 속에는 타락한 인생의 죄악된 습성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작은 유혹에 흔들리고 작은 이익에 마음이 변하기도 하고 작은 일에 쉽게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수시로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그런 연약한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참 위로가 되고 힘 되는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자신 있게 이 세상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1.범죄할 수 밖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만일이라는 말은 만에 하나 있을 수 없는 일로 표현된 말이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신앙의 위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요셉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 대단하다 우리는 왜 그렇게 살수가 없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우리 아들을 번제로 잡아서 바치라고 한다면 나는 순종할 수 있을까 못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내 아들을 죽여서 제사로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처럼 엄청난 등치에다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골리앗에게 어떻게 싸움을 걸 용기가 생기겠습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노라 라고 큰소리치면서 나갈 수 있겠습니까
요셉처럼 형제들에게 팔려서 노예신세가 되면서 억울하게 옥에 갇히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바르게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들을 깨끗하게 용서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집사나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돌이 날아와도 사자 밥이 되면서도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잘 살펴보면 사실은 그들도 하나님께 믿음의 훈련을 받기 전에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요 그들도 죄를 지으면서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굉장한 일들은 그만 두고서라도 살아가면서 만나는 작은 일들이라도 생각해 보면 참 우리가 죄짓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죄란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는데 이런 말씀들을 다 지키면서 살수가 있겠습니까
정말로 이렇게 살기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배운 요한일서 1장에도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고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위선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죄는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죄는 큰 죄나 작은 죄나 마찬가지입니다.
큰 죄는 안되고 작은 죄는 괜찮고 라고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다 같이 죄인이면서도 크고 작고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치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야 하고 또 그렇게 살지만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그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음을 자인해야 할 것입니다.
2.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을 때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여러 가지로 반응을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죄를 은폐하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죄는 죄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행한 부득이한 것이지 죄는 아니라고 생각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그것이 죄인지 조차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나는 죽어야 돼 나는 저주받을 인간이야 라고 하면서 자책을 하고 스스로를 더 죄 가운데로 몰고 가 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옳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용서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본문이 말씀을 하기를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고 용서받게 해 주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대언자에게 가면 깨끗하게 용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언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남을 돕기 위해 불려 온 자", "변호 자", "중재자",라는 뜻을 가진 말이고 요한복음에서는 성령님을 말할 때 쓴 "보혜사"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정죄를 하고 우리 곁을 떠납니다.
우리가 범죄했을 때 우리 편에 서서 우리의 사정을 이해시켜주고 변호해 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곁으로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위로해 주고 우리를 변호해 주고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벌을 받고 지옥으로 가는 것을 막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저에게 그런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그런 분이셨습니다.
내가 뭘 잘 못했을 때 아버지나 어머니가 잘못을 추궁을 하면 할머니가 나서서 대언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얘가 안 그랬다 애는 그럴 아이가 아니다라고 하시든지
아이들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런 것 가지고 야단을 치냐고 제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학교 갔다고 오면 제일 먼저 할머니가 계신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계시면 안심이고 안 계시면 그 때부터 불안하기 시작합니다.
할머니만 계시면 평안하게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평생을 사는 동안 그 할머니가 언제나 그립습니다.
저는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고 쫄땅 망하는 경험을 했던 사람입니다.
사업을 하다가 망한 사람이 제일 불상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도둑을 맞거나 사고를 당한 사람은 동정이라도 받지만 사업하다가 망하면 사기꾼이 되고 도둑놈이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사업 망하고 돈 떨어지면 아무도 나의 편이 되어 주지 않습니다.
부모 형제도 친척도 친구도 외면합니다.
그런데 그런 막다른 골목길에서 있는 저를 찾아와 주신 분은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셨습니다.
잘 나갈 때보다 더 다정하게 저를 대해 주셨습니다.
꾸중을 하시지 않고 오히려 너를 훈련시키기 위함이라고 합리화 시켜 주셨습니다.
저에게만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이 세상에서 실패를 하고 좌절을 하고 있을 때 잘 됐다 내 말 안 듣다가 잘 됐다라고 하시지 않고 우리 곁에 오셔서 진정한 사랑으로 감싸 주시고 위로를 해 주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범했을 때도 매를 들고 벌을 주시려고 하시지 않고 오히려 더 이해를 해 주시고 변호를 해 주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지쳐서 쓰러질 때
우리가 힘이 들어서 넘어질 때
누군가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할 때
그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아멘
3.그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대언자 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고 할 때 그 분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1)의롭다는 말은 먼저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우리와 같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처럼 죄가 있으신 분이시라면 우리를 변호해 주는 대언자가 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자기도 죄인이면서 남을 변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또 의로우시다는 이 말은 공의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대강 적당히 눈 감아주고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셔서 하나님께 한번만 적당히 봐 달라고 하시거나 뭘 꾸며서 용서를 받게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정정당당하게 우리가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시고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 죄를 용서 받게 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르시고 그 근거에 의해서 죄 사함을 받게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그냥 사함 받게 해 주셔도 공의롭다는 것입니다.
3)또 이 의롭다는 말은 앞서 1:9절에서 살펴 본대로 "정확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정확하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뭘 하다가도 어 잘못됐네 그러면 그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착각을 했어 그게 아니야 미안해 그러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니 주님께서 계획을 세우시고 약속을 하시고 실행을 하시는 일은 조금도 오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됐다 미안해 다시 하자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어 주시는 것은 대언자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의로움으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죄 값을 대신지시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도 우리의 죄를 변호해 주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수시로 마음이 변하고 믿을 수가 없지만 예수님은 너무나 정확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대언자로서 너무나 좋으신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하고 몸부림을 친다고 해도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너무 자책하지 말고 우리에게 대언자가가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 : 요일 2:1
제목 :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한 주일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뿐만 아니라 성경전체의 기록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제일가는 목적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설교를 듣고 한 주일동안 좀 바르게 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는 목사니까 늘 그런 말을 하는 것이고 우리의 삶은 이 죄악된 세상에 사는 것이니까 어쩔 수 없소라고 하면서 그냥 그렇게 사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죄를 안 지으려면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면 몰라도 이 복잡한 세상 이 험한 세상 이 죄가 많은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살기란 정말 불가능할 것입니다.
죄를 안 지으면 우리에게 좋고 우리가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락한 우리의 습성으로는 죄를 짓지 않고 살기란 정말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죄를 범하고 사는 우리들을 위해서 오늘 말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우리가 사는 삶의 원리가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죄를 지었을 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에게 대언자가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대언자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들이 자녀들의 잘못을 꾸짖는 것을 보면 이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인지 별로 좋지 않은 아버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별로 좋지 않은 아버지는 자식들이 잘못하면 그 잘못을 꾸짖기만 합니다.
야 이 나쁜 놈아 네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해 하고 매를 때립니다.
자식이 잘못을 했을 때 매를 들고 다시는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꾸짖기만 하는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좋은 아버지는 회초리를 들고 때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 아이에게 왜 나쁜 짓을 하면 안 되는지를 하나 하나 잘 설명을 해 주는 아버지입니다.
더 좋은 아버지는 그 잘못한 것을 이해하고 감싸 주는 아버지입니다.
그래 그까짓 공부 좀 잘못한다고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다 실수한번 했다고 인생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공부 못하는 사람이 더 잘 될 수도 있고 말썽꾸러기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된다라고 아이를 안심시키고 힘을 주는 아버지가 정말 좋은 아버지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좋으신 아버지가 되십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
죄를 짓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고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으면 용서해 주시고 더 나아가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 주시고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 연약합니다.
이렇게 거룩한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우리 속에는 타락한 인생의 죄악된 습성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작은 유혹에 흔들리고 작은 이익에 마음이 변하기도 하고 작은 일에 쉽게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수시로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그런 연약한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참 위로가 되고 힘 되는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자신 있게 이 세상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1.범죄할 수 밖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만일이라는 말은 만에 하나 있을 수 없는 일로 표현된 말이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신앙의 위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요셉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 대단하다 우리는 왜 그렇게 살수가 없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우리 아들을 번제로 잡아서 바치라고 한다면 나는 순종할 수 있을까 못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내 아들을 죽여서 제사로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처럼 엄청난 등치에다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골리앗에게 어떻게 싸움을 걸 용기가 생기겠습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노라 라고 큰소리치면서 나갈 수 있겠습니까
요셉처럼 형제들에게 팔려서 노예신세가 되면서 억울하게 옥에 갇히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바르게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들을 깨끗하게 용서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집사나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돌이 날아와도 사자 밥이 되면서도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잘 살펴보면 사실은 그들도 하나님께 믿음의 훈련을 받기 전에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요 그들도 죄를 지으면서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굉장한 일들은 그만 두고서라도 살아가면서 만나는 작은 일들이라도 생각해 보면 참 우리가 죄짓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죄란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는데 이런 말씀들을 다 지키면서 살수가 있겠습니까
정말로 이렇게 살기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배운 요한일서 1장에도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고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위선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죄는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죄는 큰 죄나 작은 죄나 마찬가지입니다.
큰 죄는 안되고 작은 죄는 괜찮고 라고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다 같이 죄인이면서도 크고 작고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치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야 하고 또 그렇게 살지만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그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음을 자인해야 할 것입니다.
2.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을 때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여러 가지로 반응을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죄를 은폐하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죄는 죄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행한 부득이한 것이지 죄는 아니라고 생각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그것이 죄인지 조차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나는 죽어야 돼 나는 저주받을 인간이야 라고 하면서 자책을 하고 스스로를 더 죄 가운데로 몰고 가 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옳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용서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본문이 말씀을 하기를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고 용서받게 해 주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대언자에게 가면 깨끗하게 용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언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남을 돕기 위해 불려 온 자", "변호 자", "중재자",라는 뜻을 가진 말이고 요한복음에서는 성령님을 말할 때 쓴 "보혜사"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정죄를 하고 우리 곁을 떠납니다.
우리가 범죄했을 때 우리 편에 서서 우리의 사정을 이해시켜주고 변호해 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곁으로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위로해 주고 우리를 변호해 주고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벌을 받고 지옥으로 가는 것을 막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저에게 그런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그런 분이셨습니다.
내가 뭘 잘 못했을 때 아버지나 어머니가 잘못을 추궁을 하면 할머니가 나서서 대언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얘가 안 그랬다 애는 그럴 아이가 아니다라고 하시든지
아이들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런 것 가지고 야단을 치냐고 제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학교 갔다고 오면 제일 먼저 할머니가 계신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계시면 안심이고 안 계시면 그 때부터 불안하기 시작합니다.
할머니만 계시면 평안하게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평생을 사는 동안 그 할머니가 언제나 그립습니다.
저는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고 쫄땅 망하는 경험을 했던 사람입니다.
사업을 하다가 망한 사람이 제일 불상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도둑을 맞거나 사고를 당한 사람은 동정이라도 받지만 사업하다가 망하면 사기꾼이 되고 도둑놈이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사업 망하고 돈 떨어지면 아무도 나의 편이 되어 주지 않습니다.
부모 형제도 친척도 친구도 외면합니다.
그런데 그런 막다른 골목길에서 있는 저를 찾아와 주신 분은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셨습니다.
잘 나갈 때보다 더 다정하게 저를 대해 주셨습니다.
꾸중을 하시지 않고 오히려 너를 훈련시키기 위함이라고 합리화 시켜 주셨습니다.
저에게만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이 세상에서 실패를 하고 좌절을 하고 있을 때 잘 됐다 내 말 안 듣다가 잘 됐다라고 하시지 않고 우리 곁에 오셔서 진정한 사랑으로 감싸 주시고 위로를 해 주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범했을 때도 매를 들고 벌을 주시려고 하시지 않고 오히려 더 이해를 해 주시고 변호를 해 주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지쳐서 쓰러질 때
우리가 힘이 들어서 넘어질 때
누군가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할 때
그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아멘
3.그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대언자 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고 할 때 그 분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1)의롭다는 말은 먼저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우리와 같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처럼 죄가 있으신 분이시라면 우리를 변호해 주는 대언자가 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자기도 죄인이면서 남을 변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또 의로우시다는 이 말은 공의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대강 적당히 눈 감아주고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셔서 하나님께 한번만 적당히 봐 달라고 하시거나 뭘 꾸며서 용서를 받게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정정당당하게 우리가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시고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 죄를 용서 받게 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르시고 그 근거에 의해서 죄 사함을 받게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그냥 사함 받게 해 주셔도 공의롭다는 것입니다.
3)또 이 의롭다는 말은 앞서 1:9절에서 살펴 본대로 "정확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정확하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뭘 하다가도 어 잘못됐네 그러면 그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착각을 했어 그게 아니야 미안해 그러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니 주님께서 계획을 세우시고 약속을 하시고 실행을 하시는 일은 조금도 오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됐다 미안해 다시 하자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어 주시는 것은 대언자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의로움으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죄 값을 대신지시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도 우리의 죄를 변호해 주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수시로 마음이 변하고 믿을 수가 없지만 예수님은 너무나 정확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대언자로서 너무나 좋으신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하고 몸부림을 친다고 해도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너무 자책하지 말고 우리에게 대언자가가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