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5.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17)
본문 : 행 17:32-34
제목 :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32.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사도바울이 그리스의 수도 아덴에 와서 선교하는 장면을 여러 주 동안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아레오바고’라는 특별한 장소에 와서 복음에 관하여 논증하는 장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죄인을 공개적으로 재판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종교나 철학에 관한 특별한 논제가 있을 때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온 것은 바울에게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적으로 말하지 말고 공적으로 말해서 그 말이 거짓이거나 잘못된 말일 때는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종교관과 철학에 대하여 지적을 했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다신론으로 온갖 우상들을 만들어 놓고 그 신들이 인간들에게 이런저런 복을 주는 신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머리로 신을 정하고 자기의 손으로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신들을 보고 복을 달라고 하면 복을 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철학도 결국은 신이 없다고 믿고 내세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든지 행복을 누리고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들이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보다 다른 것들을 더 좋아하여서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종교를 이용해서 이 세상에서 더 행복하게 잘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보다는 이 세상의 작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레오바고에서 설교의 마지막 부분과 그 설교에 대한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교의 마지막부분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본문 32-33절 말씀에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사도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한 설교를 기록하면서 설교원문 그대로를 다 기록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아마도 중요한 이야기만 정리해서 기록을 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도 정말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핵심은 꼭 기록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설교에서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할 핵심적인 교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은 하나님께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덴 사람들이 그들의 머리로 고안하고 그들의 손으로 만든 우상과는 전혀 다른 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이 우주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소생인 우리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힘입어서 살고 기동하고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도 우상숭배 하는 것처럼 섬기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섬기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우상 앞에서 가식으로 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대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우리의 전심을 다하여 진심으로 거짓이 없이 대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우리 인간에게 벌을 내리셔서 우리가 죽게 되었고 또 서로 경쟁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죽음과 경쟁이 우리 인간에게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고통을 주신 것은 이런 고통들을 통하여 더듬어서라도 하나님을 찾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 죄에서 회개하고 돌이키지 못한 사람은 아직 믿음을 시작도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날을 정하시고 그 심판자로 예수님을 정하시고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그 증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우리 죄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형벌을 받지 않는 길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것을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만 언급하였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이런 교리들이 거기에 포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기초적으로 알아야 할 부활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말했을 때 그 복음을 들은 사람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반응이 어떤 사람들은 조롱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 조롱을 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이 전혀 없었던 일이고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죽은 자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그들이 알고 있는 종교에 있어서도 죽은 자의 부활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사람이 그런 헛소리를 하니까 미쳤다고 조롱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부활의 신앙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믿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그렇게 기대를 하는 눈치가 보이지 않습니다. 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 말고 하는 빈신반의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내에도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비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있을지도 모르는 부활을 믿고 살지 말고 이 땅에서 더 사랑하고 잘 사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믿음이 이 부활을 믿는 믿음입니다. 다른 것을 다 믿어도 이 부활을 믿지 못하면 그것은 온전한 신앙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고 그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복음을 조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의 주인이 되심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가식적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은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위대한 믿음을 진실하게 고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진실한 고백의 제일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게을리 하거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나”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믿지는 못하겠지만 몇 번 만나서 자꾸 들어보면 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거기 더 머물면서 그들에게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떠나버렸다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그런 반복적인 학습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이것저것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나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깨달음이나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만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머리가 나빠서 이해를 할 수 없다고 해도 성경을 수십 독을 하지 못해서 성경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해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누구나가 다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택한 백성이라면 여러분에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면 그냥 믿음을 바로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의심 없이 교회에 나와서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신 이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바로 결단하지 못하고 다음에 다시 듣겠다고 미루는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자꾸 다음으로 미루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 좀 많이 번 후에, 형편이 좀 좋아진 다음에, 가슴에 좀 뜨거워진 다음에 해야지 하고 마루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그렇게 한가하게 이것저것 따지면서 미루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언제나 지금 바로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주님의 일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이런저런 좌우명들을 가지고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언제나 하나님의 뒤를 졸졸 따라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 앞에 가시면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회를 주실 때 일을 주실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모처럼 나에게 일을 맡기시는데 다른 일 하면서 직무를 유기하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일을 주실 때 그 일이 크고 작은 일에 상관이 없이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비록 그 일이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맡기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몇 사람은 그를 가까이 하여 믿으니
본문 34절에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날 거기 아레오바고에 몇 사람이나 모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수천 명은 모이지 않았을까 라고 짐작을 해봅니다. 아덴 사람들은 종교나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고 특별히 새로운 것이 있으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본 21절 말씀에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하여 말하고 듣는 것을 매우 좋아했고 거기에 시간을 많이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관심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바울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남자 대표로 ‘디오누시오’라는 사람과 여자 대표로 ‘다마리’라고 하는 사람이 바울을 가까이 하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몇 사람이 있었다고 했지만 그저 아주 소수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설교를 할 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나 철학을 다 활용을 하고 바울 자신이 배운 세상 지식을 다 동원해서 그들을 설득하는 설교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냥 성경만 가지고 복음을 전할 때 보다 좋지 못했습니다. 성경만 가지고 복음을 선포할 때는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는데 철학과 세상 지식을 다 동원해서 복음을 전했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복음을 외면했습니다.
교회의 설교도 성경말씀만 가지고 복음을 선포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강단에 철학이 들어오고 사람의 경험이 들어오고 세상의 지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설교를 했을 때 오히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철학적이고 도덕적이고 세상 지식이나 사람의 경험이 강단을 점령할 때 사람들은 믿음을 버리고 그냥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 신앙인데 오히려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사람이 되어서 십자가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바른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기가 힘이 드는데 다른 복음을 전하고 복음과 반대되는 설교를 하는데 사람들이 복음을 바로 믿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고 선포되는 것이 진짜교회입니다.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고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천국복음이 선포되는 것만이 진짜 교회입니다. 이런 진짜 교단 진짜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가까이에서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바울 가까이에서 바울이 어떻게 사는가를 자세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그 복음에 대해서 신뢰감을 가지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원래 사람은 가까이 갈수록 나쁜 점이 보이고 실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니까 가까이 할수록 더 믿음이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진실한지 얼마나 헌신적이고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는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이 진실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진실해야 하고 신앙생활에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주변의 사람들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디오누시오라는 사람 한 사람과 다마리라고 하는 사람 한 사람 그 외에 몇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냥 이름만 기록이 되었고 그들이 어떤 좋은 일을 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별로 한 일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에까지 기록된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위대한 일을 한 것보다도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을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듣고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을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고 소수의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비록 소수의 무리들이지만 복음을 듣고 십자가와 부활과 영생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활을 조롱하는 사람처럼 살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믿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