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 2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03)
본문 : 요일 1:2
제목 : 내가 본 영원한 생명
하루살이하고 잠자리하고 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참 잘 놀다가 잠자리가 하는 말이 "애 하루살이야 오늘은 그만 놀고 가서 잠이나 자고 내일 놀자"라고 했더니 하루살이가 비웃으면서 하는 말이 "잠자러 가? 내일이 어디있다고 잠을 자..." 그래서 잠자러 가 잠자리 이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하루살이가 내일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듯이 우리 인생이 믿을 수 없는 것이 영원이라는 것입니다.
잘 살아야 7,80년 사는 인생이 영원한 생명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분명이 예외없이 죽어가고 있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영원히 끝이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제일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끝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직장에서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그 직장에서 은퇴할 때까지 계속 근무했으면 좋겠지만 회사가 망하기도 하고 감원이니 뭐니 해서 그만둬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늘 호경기만 계속되었으면 좋겠지만 금방 불경기가 오기도 하고 그 아이템이 사장사업이 되기도 해서 문을 닫거나 업종을 바꾸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간의 관계도 늘 그대로 잘 살았으면 좋겠지만 이혼도 하고 사별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헤어지고 떠나게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친구나 이웃도 금방 좋아졌다가 금방 원수가 되기도 하고 모든 일들이 영원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큰 불행입니다.
언제 나쁘게 바뀔지 언제 사랑이 끊어질지 언제 변할지 전전긍긍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주 소중한 의미를 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나타났고 직접 보았고 증거하여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잘 살펴보시고 우리가 가진 이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 중에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라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하기 이전에는 인간이 영원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으면서 영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셨습니다.
창세기를 잘 읽어보시면 창세기에 나타난 사람들의 나이를 자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 같은 데 중요한 인물들은 꼭 죽은 나이를 자세히 적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몇 살까지 살았습니까
아담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제일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로 969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아담과 무드셀라 사이에 많은 사람들의 나이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들 모두가 900세 이상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들을 창조시대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 이후의 시대는 노아를 위시해서 노아홍수 이후의 사람들입니다.
노아는 950세를 살았고
그 아들들은 셈이 600세를 살았습니다.
그 이후에 바벨탑 사건이 있었고 바벨탑 사건 이후를 족장시대라고 하는데 족장시대의 사람들은 급격하게 수명이 짧아집니다.
아브라함이 175세 이삭 180 야곱이 147세를 살았습니다.
요셉이 110세 모세가 120세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시편에 노래하기를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시90:10)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이 영생으로 시작을 해서 900년대와 600년 시대를 지나 100년 그리고 70,80세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의 수명이 이렇게 짧아졌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피조물인 인간들이 자신을 알지 못하고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께 반항을 하고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노아홍수 시대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는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노아홍수 때의 심판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달려 든 사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대노를 하셨던 사건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반항할 때마다 인간의 수명이 짧아졌던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들의 생명을 짧아지게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요즘 과학자들이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합니다.
노아홍수 이후 시대는 자연환경의 변화로 인간들이 오래 살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바벨탑 사건 이후의 수명단축은 잘 몰랐지만 최근에 비타민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우리 몸에 항산화제인 비타민을 생성할 수 없게 된 때가 바벨탑 사건 때부터가 아닌가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제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 말씀을 드릴 시간이 없고 다만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서 수명이 단축된 시간들을 거슬러올라가 보면 거기에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함으로 수명이 단축이 되고 죽게 되었지만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이 된다면 다시 영생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쁨이 있다는 것은 슬픔이 있다는 것이고 짧은 것이 있다는 것은 긴 것이 있다는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것은 추한 것도 있다는 것이듯이 순간이 있다는 것은 영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은 분명히 있는 것인데 문제는 그 영원한 세상을 어떻게 갈 수 있는지 그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가 문제이라는 것입니다.
잘 모르지만 확실히 증명을 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2.영원한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모르고 하루 하루 허무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내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보여 주시고 우리도 그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경을 영원한 생명이라는 주제로 보면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보여 주시기 위해서 애쓰신 흔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을 드렸지만 성경은 우리 조상들의 수명을 자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볼 때 또 성경을 기록한 시대의 사람들이 볼 때도 허무맹랑한 것 같은 나이들을 아주 자세히 확실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시대는 모세시대입니다.
모세는 인간의 나이를 70이나 강건하면 80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기록한 창세기에서 아담을 위시한 창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나이를 아주 자세히 기록을 합니다.
아담은 113세에 아들을 낳기 시작해서 800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으면서 살다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고
그 아들 셋은 105세에 아들을 낳기 시작해서 807년을 자녀를 낳고 살다가 912세를 향수하고 죽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나 설명이 없이 그 이후 시대의 사람들의 짧아진 수명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가 지금 말씀을 드리는 대로 우리가 거슬러올라가서 기기 영원한 생명이 있었음을 나타내어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모양의 구원에 관해서도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노아홍수 때 방주에 올라가서 죽음을 면하고 사는 법을 보여 주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 나와 사는 법도 보여 주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그 깊이 우리가 볼 수 없는 바닷길을 통해서 살아 남는 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살아 남는 방법도 보여 주셨습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들은 우리가 이 죽음의 강을 건너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예수님께서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심으로 또 승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과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사는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기록된 성경말씀을 보면서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없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귀한 것 즉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것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보여 주신 하나님의 뜻 깊은 배려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없으며 하나님과 올바른 사귐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시시한 선물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이 특별한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그것을 보여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영원한 생명을 증거하여 전합니다.
본문 말씀에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보았고, 증거하고, 전한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음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간접적인 경험으로 이렇게 믿음으로 그 사실을 인정하지만 요한은 확실하게 보았고 증인이 될 수 있도록 확신함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1절 말씀을 통하여 이 생명의 말씀 즉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들었던 것','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라고 한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3년 동안을 함께 다니면서 직접 보고 듣고 배웠던 사람입니다.
일개 한 사람이 수제자라고 해도 그 스승이 유명하면 우리는 대단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스승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고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시고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바로 가르쳐 주신 분이시고 그 생명을 나누어주시기 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요한의 증언은 참으로 대단한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증인이라고 할 때 순교의 각오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법정에서의 증인은 바른 말을 하지 않으면 목숨을 담보로 하고 바른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로 유일하게 순교를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이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아무리 회유를 하고 아무리 협박을 해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바를 똑똑하게 전했던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이 순교를 했다면 어쩌다가 정신이 좀 나간 사람이 자신이 가진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객기를 부렸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아주 늠름하게 오히려 서로 앞을 다투어서 순교를 당하면서 이 영원한 생명에 증인들이 되었던 것을 봅니다.
요즘 저는 저희 순교하신 할아버지 양용근 목사님의 전기를 책으로 만들면서 그 분이 걸어오신 길을 여기 저기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참 챙피한 삶을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그들은 목숨까지 버렸는데 나는 아주 시시한 일에도 몸을 사리고 비겁하게 굴복하면서 이 진리의 복음을 담대하게 외치지 못하는 자신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양 목사님이 감옥에 있으면서 많은 고문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당당하게 버티시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자유로운 세상을 살면서도 당당하지 못하고 비굴해지는 우리가 참 부끄럽습니다.
마지막 선고를 앞두고 판사가 찾아와서 회유를 합니다.
내가 묻는 말에 예라고도 아니오라고 도 대답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예라고 대답을 한 줄로 알고 내보내 주겠다고 회유를 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죽는데도요...."
그렇게 아니라고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고 진리의 증인이 되기를 회피하고 비겁하게 나간다면 사는 것 같지만 그것이 오히려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가는 것임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이 육신의 목숨은 쉽게 내어 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증언들은 사실 이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기록이 된 것입니다.
이 확실한 진리를 우리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순교로서 증언을 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당당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쁨으로 이 영원한 생명을 가졌음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요일 1:2
제목 : 내가 본 영원한 생명
하루살이하고 잠자리하고 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참 잘 놀다가 잠자리가 하는 말이 "애 하루살이야 오늘은 그만 놀고 가서 잠이나 자고 내일 놀자"라고 했더니 하루살이가 비웃으면서 하는 말이 "잠자러 가? 내일이 어디있다고 잠을 자..." 그래서 잠자러 가 잠자리 이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하루살이가 내일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듯이 우리 인생이 믿을 수 없는 것이 영원이라는 것입니다.
잘 살아야 7,80년 사는 인생이 영원한 생명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분명이 예외없이 죽어가고 있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영원히 끝이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제일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끝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직장에서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그 직장에서 은퇴할 때까지 계속 근무했으면 좋겠지만 회사가 망하기도 하고 감원이니 뭐니 해서 그만둬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늘 호경기만 계속되었으면 좋겠지만 금방 불경기가 오기도 하고 그 아이템이 사장사업이 되기도 해서 문을 닫거나 업종을 바꾸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간의 관계도 늘 그대로 잘 살았으면 좋겠지만 이혼도 하고 사별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헤어지고 떠나게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친구나 이웃도 금방 좋아졌다가 금방 원수가 되기도 하고 모든 일들이 영원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큰 불행입니다.
언제 나쁘게 바뀔지 언제 사랑이 끊어질지 언제 변할지 전전긍긍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주 소중한 의미를 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나타났고 직접 보았고 증거하여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잘 살펴보시고 우리가 가진 이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 중에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라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하기 이전에는 인간이 영원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으면서 영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셨습니다.
창세기를 잘 읽어보시면 창세기에 나타난 사람들의 나이를 자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 같은 데 중요한 인물들은 꼭 죽은 나이를 자세히 적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몇 살까지 살았습니까
아담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제일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로 969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아담과 무드셀라 사이에 많은 사람들의 나이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들 모두가 900세 이상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들을 창조시대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 이후의 시대는 노아를 위시해서 노아홍수 이후의 사람들입니다.
노아는 950세를 살았고
그 아들들은 셈이 600세를 살았습니다.
그 이후에 바벨탑 사건이 있었고 바벨탑 사건 이후를 족장시대라고 하는데 족장시대의 사람들은 급격하게 수명이 짧아집니다.
아브라함이 175세 이삭 180 야곱이 147세를 살았습니다.
요셉이 110세 모세가 120세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시편에 노래하기를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시90:10)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이 영생으로 시작을 해서 900년대와 600년 시대를 지나 100년 그리고 70,80세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의 수명이 이렇게 짧아졌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피조물인 인간들이 자신을 알지 못하고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께 반항을 하고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노아홍수 시대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는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노아홍수 때의 심판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달려 든 사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대노를 하셨던 사건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반항할 때마다 인간의 수명이 짧아졌던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들의 생명을 짧아지게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요즘 과학자들이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합니다.
노아홍수 이후 시대는 자연환경의 변화로 인간들이 오래 살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바벨탑 사건 이후의 수명단축은 잘 몰랐지만 최근에 비타민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우리 몸에 항산화제인 비타민을 생성할 수 없게 된 때가 바벨탑 사건 때부터가 아닌가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제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 말씀을 드릴 시간이 없고 다만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서 수명이 단축된 시간들을 거슬러올라가 보면 거기에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함으로 수명이 단축이 되고 죽게 되었지만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이 된다면 다시 영생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쁨이 있다는 것은 슬픔이 있다는 것이고 짧은 것이 있다는 것은 긴 것이 있다는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것은 추한 것도 있다는 것이듯이 순간이 있다는 것은 영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은 분명히 있는 것인데 문제는 그 영원한 세상을 어떻게 갈 수 있는지 그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가 문제이라는 것입니다.
잘 모르지만 확실히 증명을 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2.영원한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모르고 하루 하루 허무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내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보여 주시고 우리도 그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경을 영원한 생명이라는 주제로 보면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보여 주시기 위해서 애쓰신 흔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을 드렸지만 성경은 우리 조상들의 수명을 자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볼 때 또 성경을 기록한 시대의 사람들이 볼 때도 허무맹랑한 것 같은 나이들을 아주 자세히 확실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시대는 모세시대입니다.
모세는 인간의 나이를 70이나 강건하면 80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기록한 창세기에서 아담을 위시한 창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나이를 아주 자세히 기록을 합니다.
아담은 113세에 아들을 낳기 시작해서 800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으면서 살다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고
그 아들 셋은 105세에 아들을 낳기 시작해서 807년을 자녀를 낳고 살다가 912세를 향수하고 죽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나 설명이 없이 그 이후 시대의 사람들의 짧아진 수명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가 지금 말씀을 드리는 대로 우리가 거슬러올라가서 기기 영원한 생명이 있었음을 나타내어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모양의 구원에 관해서도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노아홍수 때 방주에 올라가서 죽음을 면하고 사는 법을 보여 주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 나와 사는 법도 보여 주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그 깊이 우리가 볼 수 없는 바닷길을 통해서 살아 남는 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살아 남는 방법도 보여 주셨습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들은 우리가 이 죽음의 강을 건너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예수님께서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심으로 또 승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과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사는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기록된 성경말씀을 보면서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없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귀한 것 즉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것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보여 주신 하나님의 뜻 깊은 배려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없으며 하나님과 올바른 사귐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시시한 선물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이 특별한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그것을 보여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영원한 생명을 증거하여 전합니다.
본문 말씀에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보았고, 증거하고, 전한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음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간접적인 경험으로 이렇게 믿음으로 그 사실을 인정하지만 요한은 확실하게 보았고 증인이 될 수 있도록 확신함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1절 말씀을 통하여 이 생명의 말씀 즉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들었던 것','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라고 한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3년 동안을 함께 다니면서 직접 보고 듣고 배웠던 사람입니다.
일개 한 사람이 수제자라고 해도 그 스승이 유명하면 우리는 대단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스승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고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시고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바로 가르쳐 주신 분이시고 그 생명을 나누어주시기 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요한의 증언은 참으로 대단한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증인이라고 할 때 순교의 각오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법정에서의 증인은 바른 말을 하지 않으면 목숨을 담보로 하고 바른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로 유일하게 순교를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이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아무리 회유를 하고 아무리 협박을 해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바를 똑똑하게 전했던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이 순교를 했다면 어쩌다가 정신이 좀 나간 사람이 자신이 가진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객기를 부렸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아주 늠름하게 오히려 서로 앞을 다투어서 순교를 당하면서 이 영원한 생명에 증인들이 되었던 것을 봅니다.
요즘 저는 저희 순교하신 할아버지 양용근 목사님의 전기를 책으로 만들면서 그 분이 걸어오신 길을 여기 저기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참 챙피한 삶을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그들은 목숨까지 버렸는데 나는 아주 시시한 일에도 몸을 사리고 비겁하게 굴복하면서 이 진리의 복음을 담대하게 외치지 못하는 자신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양 목사님이 감옥에 있으면서 많은 고문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당당하게 버티시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자유로운 세상을 살면서도 당당하지 못하고 비굴해지는 우리가 참 부끄럽습니다.
마지막 선고를 앞두고 판사가 찾아와서 회유를 합니다.
내가 묻는 말에 예라고도 아니오라고 도 대답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예라고 대답을 한 줄로 알고 내보내 주겠다고 회유를 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죽는데도요...."
그렇게 아니라고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고 진리의 증인이 되기를 회피하고 비겁하게 나간다면 사는 것 같지만 그것이 오히려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가는 것임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이 육신의 목숨은 쉽게 내어 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증언들은 사실 이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기록이 된 것입니다.
이 확실한 진리를 우리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순교로서 증언을 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당당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쁨으로 이 영원한 생명을 가졌음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