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5. 1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123)
본문 : 엡 6:18
제목 : 기도와 간구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아주 기도를 잘하는 대주교 한 분이 계셨다고 합니다
30년 동안을 빠짐없이 매일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기도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한결같은 대주교의 기도하는 모습을 부러워하였고 칭찬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주교의 기도는 매끄럽고 화려한 언어의 구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여서 듣는 이의 애간장을 다 녹일 만큼 간절하였습니다.
그 기도를 듣기 위하여 먼 곳에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대주교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것도 그 자랑거리이던 기도시간에 죽었습니다.
그 날도 그는 습관대로 거룩한 복장을 하고 마음을 모아서 늘 하던 대로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고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늘에서 "오냐, 무슨 일이냐"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평생 처음 들어보는 그 소리에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그만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인데 막상 그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려고 응답을 하시니까 그만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데 정말로 하나님 앞에 나와 있다는 마음으로 앉아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애야 하고 부르셔도 심장마비 일으키지 않거나 졸도하지 않고 예 하고 대답하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대답하실 수 있는 분은 기도의 참된 의미를 아시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전혀 모르시거나 아니면 철판으로 된 아주 강한 강심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실 것입니다.
여기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거의 다 까무러치거나 반 죽은 상태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에베소서 6:18-20절 말씀에는 우리 성도들이 가진 최고의 무기인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약속대로 오늘부터 우리의 숨겨진 마지막 무기인 기도에 대해서 공부를 합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시고 기도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와 간구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면서 더 넓은 의미의 기도에 관해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도나 간구나 하나님께 어떤 소원을 아뢴다는 의미에서 비슷한 말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나 간구나 하나님께 소원을 아뢴다는 점에서 같은 말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도는 기도보다는 간구에 가깝습니다.
간구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데에시스(δεησιs)입니다.
이 데에시스라는 말은 청원이나 탄원, 애원, 요구, 요망, 의뢰, 부탁, 간청...등의 말로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도는 그저 이 간구처럼 하나님께 마음의 소원이나 바라는 것을 청원하고 간청하고 탄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이 간구를 포함하고 있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생각을 해야 하는 말입니다.
기도란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청원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이 기도와 간구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바람직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취해야 하는 네 가지 단계를 소개했습니다.
그 네 단계의 첫 글자를 따서 ACTS라고 했습니다.
ACTS는 경배(Adoration), 고백(Confession), 감사(Thanksgiving), 간구(Supplications)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1.경배(adoration)
기도의 첫번째 단계는 경배입니다.
경배라는 말도 우리가 많이 쓰는 말이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많이 잘 모르는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찬양과 경배 혹은 경배와 찬양 이런 말을 많이 씁니다.
찬양과 경배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단어처럼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고 함께 그 뜻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시와 찬미로 노래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경배는 하나님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나 기도를 할 때나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러 갈 때에도 만나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것 좀 해 주세요 저것 주세요 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예의를 갖추어서 인사를 하고 이것저것 좋은 이야기하다가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하물며 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요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만나자마자 요구사항만 늘어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하나님의 영원하심 하나님의 불변하심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칭송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너무나 좋으신 일들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면서 기도를 하면서 찬양을 드리는 일에 우선적으로 잘 해야 합니다.
혹시 기도를 많이 했는데도 아직 응답을 받지 못하신 분은 나 자신이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에 바르게 참여했는가를 한번 점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혹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하나님을 칭송하는 일에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일에 소홀히 함으로서 우리가 기도를 많이 했지만 기도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사실 기도의 문에도 아직 들어가지 않은 상태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각 같으면 오전예배도 오후예배처럼 절반은 찬송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런저런 순서들을 넣어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그런 순서들을 무시하면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당장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찬송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게 되었습니다.
찬송을 혹은 찬양을 찬양대가 부르고 성도는 듣고 은혜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영양을 받아서 찬송을 할 때 가사에 담긴 뜻을 생각하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칭송하기보다는 좋은 목소리로 아름다운 음악으로 노래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이 나와서 연습을 많이 해서 아름다운 멜로디로 화음으로 멋있게 노래를 부르는 것을 찬양으로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교회는 로마카토릭 즉 천주교가 아니고 개신교입니다.
16세기에 로마카토릭교회가 여러 가지로 부패했을 때 그 잘못을 개혁하기 위해서 투쟁하다가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제일 중점을 둔 것이 무엇인 줄은 아실 것입니다.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이신칭의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잘못된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 위에 바르게 서자고 외친 것이 개혁자들의 주된 외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잘 알지 못하는 아주 중요한 외침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가장 적절한 음악의 형태를 4세기 이전의 음악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성가대의 찬양에서 회중의 찬송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4세기 이전에는 찬송이 회중의 찬송이었습니다.
4세기 이후에 많은 이단들이 생겨나자 교회는 아무나 찬송을 하지 못하게 하고 찬양대로 하여금 그들만 찬송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로마 카토릭의 잘못 중 하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일반 회중에게서 빼앗아서 일부 특수한 사람 즉 찬양대만 부르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칭송하는 일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찬양을 그저 듣고 은혜받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찬양은 남이 하는 것을 감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음악성을 논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는 "기도를 방해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단순히 형식적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거나 또는 안일하고 전심을 다하지 않는 예배는 그 형태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된 후에 평신도시절을 회상하면서 가장 후회가 막심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찬송을 부르면서 거의 대부분을 그저 전심을 다하지 못한 형식적인 기도와 찬송을 했다는 점입니다.
전 그래도 교회음악을 2년이나 전공하면서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찬양대 지휘도 4,5년을 했고 늘 찬양대에 속해서 찬양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한두 번 혹 부흥회 때나 특별한 시간외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심으로 진실되게 열심히 찬송을 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무리 뭘 모르는 초신자라고 해도 어찌 그런 악을 행하려고 했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저와 같은 전철을 밟지 마시기 바랍니다.
형식적인 찬송이 열심을 내지 않는 찬송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칭송하지 않는 찬송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임을 꼭 깊이 명심 또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이후의 찬송은 좀 달라지시기를 바랍니다.
곡이 틀려도 괜찮습니다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질러도 괜찮습니다
여러분 마음속 깊이 하나님을 칭송하시기 바랍니다.
2)경배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기도를 하는 것이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으로 들어가야 기도할 수 있고 예배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랜 세월동안 다녔지만 과연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으로 나가려고 한 것이 얼마나 될까요
그저 형식적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왔다는 마음을 얼마나 가졌을까요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영광의 보좌앞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무엇으로 표현을 할까요
그 웅장함 그 거룩함 그 능력 그 위대함 그 아름다움 그 휘황찬란한 영광을 무엇으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삼각하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의 육신의 눈으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모습을 똑같이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고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시다고만 표현을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본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절규를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에 귀양가서 살고 있을 때 그에게 나타나 주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도 예수님의 모습을 인간의 언어로 잘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불꽃같은 눈을 가지셨고 머리와 털의 희기는 양털과 같고 발은 주석같고 그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고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모습같더라고만 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도 역시 그 발 앞에 엎드려 죽은 자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모습 앞에 감히 살아 있을 수 있는 인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경배를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 나온 이 자리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그 영광의 보좌 앞에 우리가 나아온 곳입니다.
그 영광을 보지 못해서 감히 우리가 이렇게 죽지 않고 기절도 하지 않고 의젓하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천만 다행인 것은 이 하나님의 보좌를 영광의 보좌라고만 하지 않고 은혜의 보좌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가 아니라면 감히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올 수가 없습니다.
나오면 그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우리가 지은 죄악이 죄가 없다고 하더라도 피조물인 주제에 조물주 앞에 선다는 그 자체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특별히 인정을 해 주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자격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아무 탈 없이 특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우리의 공로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해 주셔서 이 큰 영광을 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로 만드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해 주신 것은 너무나 너무나 놀라운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경배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를 하나님 앞에 교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자비를 베푸시는데 마치 자기가 잘나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어떻게 비교를 할까요
하나님은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이 지구뿐만 아니라 태양과 달 무수한 별들이 있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말씀만 가지고도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엄청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앞에 선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요
물론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사람이 되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별한 신분이지만 그전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 우리는 어떤 존재였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티끌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티끌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셔서 된 것이지 우리 스스로 된 것은 아닙니다.
이 우주만물 보다 더 크신 하나님 그 우주 안에 있는 한줌 티끌보다 못한 나 자신을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티끌이 하나님 앞에서 팔짱을 끼고 한번 해 보자는 자세로 덤빌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고 엄청난 고통을 당할 때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외쳤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하고 마음에 없는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고 악을 행하면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요 자자손손이 패망의 길을 걷게 되는 무서운 죄악이라는 것을 누누이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망해 가면서도 죽어 가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 교만하게 나아옴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정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칭송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오는 것을 소홀히 여김으로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시고 싶습니까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고 싶습니까
기도의 응답을 받고 싶습니까
먼저 하나님을 경배하시는 일을 바로 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은혜의 보좌앞으로 겸손하게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단순히 간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기도에는 경배와 고백과 감사와 간구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그 경배에 관한 것 하나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칭송하는 이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아오시는 것은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임재하심 속에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과 예배와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본문 : 엡 6:18
제목 : 기도와 간구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아주 기도를 잘하는 대주교 한 분이 계셨다고 합니다
30년 동안을 빠짐없이 매일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기도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한결같은 대주교의 기도하는 모습을 부러워하였고 칭찬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주교의 기도는 매끄럽고 화려한 언어의 구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여서 듣는 이의 애간장을 다 녹일 만큼 간절하였습니다.
그 기도를 듣기 위하여 먼 곳에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대주교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것도 그 자랑거리이던 기도시간에 죽었습니다.
그 날도 그는 습관대로 거룩한 복장을 하고 마음을 모아서 늘 하던 대로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고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늘에서 "오냐, 무슨 일이냐"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평생 처음 들어보는 그 소리에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그만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인데 막상 그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려고 응답을 하시니까 그만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데 정말로 하나님 앞에 나와 있다는 마음으로 앉아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애야 하고 부르셔도 심장마비 일으키지 않거나 졸도하지 않고 예 하고 대답하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대답하실 수 있는 분은 기도의 참된 의미를 아시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전혀 모르시거나 아니면 철판으로 된 아주 강한 강심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실 것입니다.
여기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거의 다 까무러치거나 반 죽은 상태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에베소서 6:18-20절 말씀에는 우리 성도들이 가진 최고의 무기인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약속대로 오늘부터 우리의 숨겨진 마지막 무기인 기도에 대해서 공부를 합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시고 기도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와 간구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면서 더 넓은 의미의 기도에 관해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도나 간구나 하나님께 어떤 소원을 아뢴다는 의미에서 비슷한 말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나 간구나 하나님께 소원을 아뢴다는 점에서 같은 말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도는 기도보다는 간구에 가깝습니다.
간구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데에시스(δεησιs)입니다.
이 데에시스라는 말은 청원이나 탄원, 애원, 요구, 요망, 의뢰, 부탁, 간청...등의 말로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도는 그저 이 간구처럼 하나님께 마음의 소원이나 바라는 것을 청원하고 간청하고 탄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이 간구를 포함하고 있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생각을 해야 하는 말입니다.
기도란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청원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이 기도와 간구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바람직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취해야 하는 네 가지 단계를 소개했습니다.
그 네 단계의 첫 글자를 따서 ACTS라고 했습니다.
ACTS는 경배(Adoration), 고백(Confession), 감사(Thanksgiving), 간구(Supplications)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1.경배(adoration)
기도의 첫번째 단계는 경배입니다.
경배라는 말도 우리가 많이 쓰는 말이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많이 잘 모르는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찬양과 경배 혹은 경배와 찬양 이런 말을 많이 씁니다.
찬양과 경배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단어처럼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고 함께 그 뜻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시와 찬미로 노래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경배는 하나님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나 기도를 할 때나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러 갈 때에도 만나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것 좀 해 주세요 저것 주세요 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예의를 갖추어서 인사를 하고 이것저것 좋은 이야기하다가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하물며 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요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만나자마자 요구사항만 늘어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하나님의 영원하심 하나님의 불변하심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칭송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너무나 좋으신 일들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면서 기도를 하면서 찬양을 드리는 일에 우선적으로 잘 해야 합니다.
혹시 기도를 많이 했는데도 아직 응답을 받지 못하신 분은 나 자신이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에 바르게 참여했는가를 한번 점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혹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하나님을 칭송하는 일에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일에 소홀히 함으로서 우리가 기도를 많이 했지만 기도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사실 기도의 문에도 아직 들어가지 않은 상태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각 같으면 오전예배도 오후예배처럼 절반은 찬송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런저런 순서들을 넣어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그런 순서들을 무시하면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당장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찬송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게 되었습니다.
찬송을 혹은 찬양을 찬양대가 부르고 성도는 듣고 은혜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영양을 받아서 찬송을 할 때 가사에 담긴 뜻을 생각하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칭송하기보다는 좋은 목소리로 아름다운 음악으로 노래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이 나와서 연습을 많이 해서 아름다운 멜로디로 화음으로 멋있게 노래를 부르는 것을 찬양으로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교회는 로마카토릭 즉 천주교가 아니고 개신교입니다.
16세기에 로마카토릭교회가 여러 가지로 부패했을 때 그 잘못을 개혁하기 위해서 투쟁하다가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제일 중점을 둔 것이 무엇인 줄은 아실 것입니다.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이신칭의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잘못된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 위에 바르게 서자고 외친 것이 개혁자들의 주된 외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잘 알지 못하는 아주 중요한 외침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가장 적절한 음악의 형태를 4세기 이전의 음악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성가대의 찬양에서 회중의 찬송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4세기 이전에는 찬송이 회중의 찬송이었습니다.
4세기 이후에 많은 이단들이 생겨나자 교회는 아무나 찬송을 하지 못하게 하고 찬양대로 하여금 그들만 찬송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로마 카토릭의 잘못 중 하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일반 회중에게서 빼앗아서 일부 특수한 사람 즉 찬양대만 부르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칭송하는 일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찬양을 그저 듣고 은혜받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찬양은 남이 하는 것을 감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음악성을 논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는 "기도를 방해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단순히 형식적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거나 또는 안일하고 전심을 다하지 않는 예배는 그 형태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된 후에 평신도시절을 회상하면서 가장 후회가 막심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찬송을 부르면서 거의 대부분을 그저 전심을 다하지 못한 형식적인 기도와 찬송을 했다는 점입니다.
전 그래도 교회음악을 2년이나 전공하면서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찬양대 지휘도 4,5년을 했고 늘 찬양대에 속해서 찬양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한두 번 혹 부흥회 때나 특별한 시간외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심으로 진실되게 열심히 찬송을 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무리 뭘 모르는 초신자라고 해도 어찌 그런 악을 행하려고 했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저와 같은 전철을 밟지 마시기 바랍니다.
형식적인 찬송이 열심을 내지 않는 찬송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칭송하지 않는 찬송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임을 꼭 깊이 명심 또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이후의 찬송은 좀 달라지시기를 바랍니다.
곡이 틀려도 괜찮습니다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질러도 괜찮습니다
여러분 마음속 깊이 하나님을 칭송하시기 바랍니다.
2)경배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기도를 하는 것이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으로 들어가야 기도할 수 있고 예배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랜 세월동안 다녔지만 과연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으로 나가려고 한 것이 얼마나 될까요
그저 형식적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왔다는 마음을 얼마나 가졌을까요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영광의 보좌앞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무엇으로 표현을 할까요
그 웅장함 그 거룩함 그 능력 그 위대함 그 아름다움 그 휘황찬란한 영광을 무엇으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삼각하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의 육신의 눈으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모습을 똑같이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고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시다고만 표현을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본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절규를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에 귀양가서 살고 있을 때 그에게 나타나 주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도 예수님의 모습을 인간의 언어로 잘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불꽃같은 눈을 가지셨고 머리와 털의 희기는 양털과 같고 발은 주석같고 그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고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모습같더라고만 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도 역시 그 발 앞에 엎드려 죽은 자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모습 앞에 감히 살아 있을 수 있는 인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경배를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 나온 이 자리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그 영광의 보좌 앞에 우리가 나아온 곳입니다.
그 영광을 보지 못해서 감히 우리가 이렇게 죽지 않고 기절도 하지 않고 의젓하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천만 다행인 것은 이 하나님의 보좌를 영광의 보좌라고만 하지 않고 은혜의 보좌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가 아니라면 감히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올 수가 없습니다.
나오면 그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우리가 지은 죄악이 죄가 없다고 하더라도 피조물인 주제에 조물주 앞에 선다는 그 자체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특별히 인정을 해 주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자격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아무 탈 없이 특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우리의 공로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해 주셔서 이 큰 영광을 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로 만드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해 주신 것은 너무나 너무나 놀라운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경배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를 하나님 앞에 교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자비를 베푸시는데 마치 자기가 잘나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어떻게 비교를 할까요
하나님은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이 지구뿐만 아니라 태양과 달 무수한 별들이 있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말씀만 가지고도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엄청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앞에 선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요
물론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사람이 되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별한 신분이지만 그전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 우리는 어떤 존재였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티끌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티끌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셔서 된 것이지 우리 스스로 된 것은 아닙니다.
이 우주만물 보다 더 크신 하나님 그 우주 안에 있는 한줌 티끌보다 못한 나 자신을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티끌이 하나님 앞에서 팔짱을 끼고 한번 해 보자는 자세로 덤빌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고 엄청난 고통을 당할 때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외쳤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하고 마음에 없는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고 악을 행하면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요 자자손손이 패망의 길을 걷게 되는 무서운 죄악이라는 것을 누누이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망해 가면서도 죽어 가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 교만하게 나아옴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정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칭송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오는 것을 소홀히 여김으로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시고 싶습니까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고 싶습니까
기도의 응답을 받고 싶습니까
먼저 하나님을 경배하시는 일을 바로 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은혜의 보좌앞으로 겸손하게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단순히 간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기도에는 경배와 고백과 감사와 간구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그 경배에 관한 것 하나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칭송하는 이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아오시는 것은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임재하심 속에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과 예배와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