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3. 12.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114)
본문 : 엡 6:15
제목 : 복음의 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문헌에 나타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신발은 기원전 2000년 경의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로 만든 샌달 모양의 신발이라고 합니다.
파피루스는 나무껍질을 벗겨서 만든 일종의 종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종이로 신발을 만들었으니 그 신발은 쉽게 달거나 망가졌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시대의 신발도 대부분 샌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신는 구두모양의 신발은 훨씬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생겨났습니다.

이런 시대에 튼튼하고 편안한 신발은 큰 무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맨발이나 불편한 신발을 신고 달리는 사람보다 평안한 신발 발에 맞는 신발을 신고 달리는 사람이 훨씬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도 어떤 신발을 신었는가에 따라서 그 집의 부의 정도를 알 수 있었습니다.
집신은 거의 사라진 시대였지만 고무신을 신은 사람과 운동화를 신은 사람 그리고 구두를 신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무신도 검정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수준이 좀 낮은 사람이고 하얀 고무신이 좀 고급이었습니다. 
고무신을 신고 달리는 사람과 운동화를 신고 끊을 졸라매고 달리는 사람과는 차이가 많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복음의 신발 즉 편안하고 좋은 신발을 신고 가는 사람과 복음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성경의 핵심이요 진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복음이 우리의 신발이 되어서 우리가 그 신을 신을 때 무기가 된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요지입니다.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강한 용사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1.기쁨의 소식
우리가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소식이 복된 소식 기쁨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전체가 사실 복음 즉 기쁨의 소식입니다.
복음은 넓은 의미에서 성경말씀 전체가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정말로 기쁜 소식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심지어 우리 자신이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는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저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없어지고 마는 허무한 존재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으며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확실하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의 뿌리를 알게 하고 우리의 존재이유를 알게 하는 것이 이 성경말씀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어떻게 생겨났는지 인간이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열심히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하면 할수록 정답을 얻을 수가 없고 그들이 생각해낸 진화론이라는 것은 더 이상하게만 꼬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들이 왜 이렇게 늙고 병들고 죽어가야 하는지 그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무나 자세하게 그 이유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깜깜한 암흑 속에서 하루하루 죽어가던 허무한 인생들에게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야할 길들을 바르게 알려 주는 책이 성경책이기 때문에 성경말씀은 복된 소식 복음 기쁨의 소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려고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 주시려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은 참으로 복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사셨는가를 기록한 복음서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면 나라의 임금들이나 재벌들이나 귀족들과 함께 어울리며 천하를 호령하시는 것이 당연하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어렵게 사는 사람 힘이 없고 천대 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의 아픔을 같이 나누셨다는 것은 우리같이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처럼 천한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소식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감격스런 소식이며 그분의 부활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기쁘고 반가운 소식입니다.

가장 기쁜 소식은 그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알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때 우리는 영원한 나라로 기뻐 뛰며 춤을 추며 올라갈 것입니다.


2.평안의 복음
오늘 본문 말씀에 복음은 "평안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평안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평화를 누리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과 욕심들 때문에 서로 싸우고 경쟁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개인과 개인들이 서로 싸우고 경쟁을 하고 집단과 집단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고 국가와 국가들이 국익을 위해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도 사실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을 가지고 서로를 정죄하고 율법을 교묘히 이용을 해서 착취를 하고 남을 못살게 굴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복음은 평안의 복음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잃어버린 참된 평화를 되찾을 수가 있기 때문에 평안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복음에는 경쟁이 없고 평화만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혹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서로 경쟁을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우위를 점령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비교를 하고 서로 더 노력을 하고 서로 경쟁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그런 노력이나 경쟁이 필요없습니다.
어떤 점수에 도달해야 하는 절대평가도 아니고 다른 사람과 경쟁을 시키는 상대평가도 아닙니다.
그냥 원서만 내면 합격이 되는 무시험 무경쟁 통과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신분이든지 어떤 일을 했든지 착하게 살았든지 악하게 살았든지 그것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복음에 이런 요소가 없이 서로 경쟁해야 하는 것이었다면 어쩔 수 없이 우리모두가 서로 경쟁자가 되어서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고 못 가게 방해하고 다른 사람을 짓밟고서라도 일어서려고 몸부림을 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참된 평안함이 있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잘되게 격려해주고 도와주어도 아무 탈이 없는 평화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2)복음에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성령님과 함께 우리에게로 찾아왔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복음을 알게 해 주시고 믿음을 갖게 해 주시고 그 믿음을 가지고 살도록 해주십니다.

복음과 함께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천국에 무사하게 도착할 때까지 우리 곁에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참된 평안함을 주십니다.
성령님의 별명을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변호해주시는 분이시기에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을 우리를 감시하는 감시자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고 계시다가 잘못하면 여지없이 벌을 내리시고 채찍으로 치시는 분으로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면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처벌하시기 위해서 감시자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범죄하지 않도록 미리 막아 주시고 혹 연약하여 범죄하여 넘어질지라도 용서해 주시고 다시 일으켜 주시고 더 힘을 주셔서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3)복음은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복음을 통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복음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고행을 하듯이 수도를 하듯이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회를 많이 가야 되고 예배에 많이 참여해야 합니다

택시를 타고 먼 거리로 새벽기도를 다녀야 직성이 풀리고 가정이고 뭐고 팽개치고 매일같이 교회에 살아야 마음이 놓이고 직책이라도 여러 개 가져야만 구원을 받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참된 평안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 세상의 삶도 즐겁게 기쁘게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3.예비한 것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예비한 것이라는 말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를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복음은 하루 이틀만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타락한 그 날 이후부터 수천 년의 세월을 준비하여 역사 속에서 많은 일들을 통하여 결국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오랜 세월 준비된 아주 귀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복음으로 무장을 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를 합니다.
단순히 기쁜 소식을 들었다고 우리가 힘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무장을 하고 훈련을 받고 믿음을 키우고 하는 준비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재미 좀 더 보고 늙어서 할 일이 없어지면 교회에 오겠노라고 합니다.
늙어서라도 늦게라도 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실컷 강도질하다가 죽는 순간에 예수님을 만나 바로 천국으로 직행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기적같은 일이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잘 적용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어느 정도는 복음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지고 훈련이 되어지는 준비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준비된 자에게 복음은 힘이 되고 능력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신을 신고 
복음을 신을 신는 것에 비유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복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신발은 우리가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신발은 우리가 마음놓고 활동을 하도록 해주는 도구입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이런 좋고 편안한 신발이 없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평안하고 튼튼한 신발이 있다는 것은 큰 무기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앉은뱅이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많이 알고 실천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진리는 그것을 사용할 때 비로소 그 효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라면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의로운 사람이 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린 대로 의로운 삶을 실천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요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작은 일부터 하나하나 실천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행복을 주는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그 기쁨의 소식은 우리에게 큰 평안함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마치 평안한 신발이 된 것처럼 우리가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게 해 준다고 했습니다.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강한 용사가 되어서 힘있게 진리를 실천하시면서 능력있게 평안하게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