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10.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09)
본문 : 행 17:1-3
제목 :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1.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아시아의 서쪽 끝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럽의 시작인 마게도냐 지방으로 건너가서 마게도냐의 주요 도시들에 전해지는 과정을 보고 계십니다. 빌립보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바울과 실라가 지금은 데살로니가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이 2천여 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서쪽으로 서진하여서 지구를 거의 한 바퀴 돌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전파되었고 우리도 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지역을 통과하면서 사도들과 바울이 전했던 복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많은 것들이 첨부되고 더러는 변질 되어서 많은 부분들이 원래의 복음과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기는 하는데 뭔가 좀 첨부 된 것 같기도 하고 뭔가는 좀 부족한 것도 같아서 원래의 복음과 다른 길로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베드로나 사도들이 그리고 바울과 복음전파자들이 전한 복음의 원형이 무엇인지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을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이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16장에서 유럽의 첫 번째 도시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한 후 17장에서는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와 아덴에서의 전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오는 도중에 암비볼리라는 도시와 아볼로니아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그 두 도시는 그냥 통과하고 바로 데살로니가로 왔습니다.
당시의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로서 복음을 전하기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서 복음은 세계만방에 퍼져나가지만 모든 도시에 모든 사람에게 다 전해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함을 받은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복음이 전해집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바른 복음이 전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바른 복음을 듣고 바른 믿음을 가지도록 해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와 여러분은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바른 길로 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본문 1-2절에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라고 했습니다.
다행이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 와서 사는 유대인들이 성경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기 위해서 회당을 세웠는데 그 회당이 데살로니가에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회당이 낮선 곳이 아니기 때문에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회당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읽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강론을 했습니다. 당시의 성경은 두루마리로 된 성경이었기 때문에 그 성경을 다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회당에 보관 된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을 것이지만 사실 바울은 어려서부터 유대인으로 성경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머릿속에는 많은 성경구절을 암송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성경이라고 하면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흔히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이고 신약성경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은혜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기독교의 근간은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에게 준 옛 언약이고 신약성경은 성도들에게 준 새 언약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가진 새 언약의 출처가 구약성경의 옛 언약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의 대부분의 설교는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을 그대로 성도들에게 적용시키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구약성경의 율법은 모든 인간들에게 인간이 살면서 행하여야 할 바른 도리를 말씀해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다면 구약성경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원래는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가져오는 일에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설교를 했을 때 사울이 스데반에게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편에 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구약성경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펼치면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는 본문의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라는 말씀을 주석하면서 바울이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증명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①기독교 복음은 구약성경의 성취로 나타난 것임으로 바울의 설교는 성경중심이 아닐 수 없었고, ②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의 설교는 성경을 기준으로 하였고 ③성경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책임으로 그리스도를 위주로 전하는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하도록 해석한다고 할 때 여러 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복음과 연결시키려고 할 때 전체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방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비롯해서 모든 인간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좀 특별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들의 의로움보다 그들의 연약함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들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등을 위대한 사람으로 칭찬하고 그들을 따라 살라고 함으로서 나름대로 좋은 설교를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복음과는 반대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율법들을 주셨지만 인간들은 그 율법을 지켜서 행복해지기 보다는 오히려 그 율법을 어김으로 벌을 받고 불행해졌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율법을 지켜야 된다. 선을 행하여야 한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설교들이 좋은 설교인 것 같고 나름대로 좋은 설교도 되겠지만 복음과는 반대되는 설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부족하고 의롭지 못하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는 철저한 죄인이라고 할 때 구원의 복음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런 연약하고 악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구원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역사를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능력으로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이라는 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구원이든 집단이나 국가의 구원이든 모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염두에 두게 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바르게 살고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본받아서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 나름대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구약성경을 복음과 연관시킨다고 할 때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다른 복음과 희석되어가는 현대에 설교자들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이 예수가 그리스도라 하니
본문 3절에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구약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하면서 구약성경의 뜻을 풀어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가 어떤 일을 하시는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모든 구약성경을 가지고 설명한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구약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야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는 본문으로 설명을 했을 것입니다. 모든 구약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 중에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의 말씀도 있습니다.
1)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할 것
유대인들은 다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주신다고 예언하셨기 때문에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지금 유대인들은 나라도 빼앗기고 로마의 학정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가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인가 하는데 있어서 각자의 나름대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 즉 사람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지만 유대인들이 이교도들과 함께 살면서 이교도들이 생각하는 메시야 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온갖 신화를 만들어서 나름대로의 신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온갖 기적들을 행하고 모든 일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을 만들어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이나 스파이더맨처럼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는 그런 메시 야 관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에서 메시야가 어떤 분이신가를 바르게 설명하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어느 부분을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약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메시야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이 제일 큰 이유일 것입니다. 메시야는 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기나 하고 비웃음이나 당해야 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메시야라고 하면 장차 나라를 해방시켜야 하고 모든 백성들을 잘 살게 해 주어야 할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연약하게 사람들에게 죽임이나 당해야 하는 사람을 메시야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메시야를 죄로 인해서 죽임을 당하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대신 죽음으로서 그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을 때 그들을 위하여 짐승을 잡아 죽이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혀주실 때부터 대속의 복음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나 제사 때마다 죽임을 당하는 모든 짐승들이 사실은 메시야가 대속의 죽임을 당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가장 중점적으로 하실 일이 대속의 죽음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천 년 동안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 많은 짐승들을 죽여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서도 그 의미를 몰랐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날 대신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먼저 그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2)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바울은 구약성경의 뜻을 풀어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강론하고 이어서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님이 바로 그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열두제자와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언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다니다가 붙잡혀서 십자가에 사형을 당한 사람이라고 기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사기꾼이라고 단정하고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는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게 된 동기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이라는 곳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바울을 만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이 땅에 있었지만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그 예수님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한동안 눈이 멀어서 세상의 것들을 볼 수 없게 될 정도로 빛 가운데 화려한 모습으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 체험을 한 후에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시던 그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는 메시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셨으며 그분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원이 되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 죄 사함을 받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조금도 변함이 없이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할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믿음이 없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무리 똑바로 산다고 해도 구원과 관계가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반대로 부족한 것이 많고 똑바로 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위대한 믿음입니다. 이 위대한 믿음을 진실 되게 고백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믿음을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