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5.15.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72)
본문 : 엡 4:22-24
제목 :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본문 말씀에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옛 사람이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우리의 모습이 이 옛 사람입니다.
욕심 때문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하고 죽어가고 썩어질 수 밖에 없는 옛날 잘못된 습성을 좇는 것이 옛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사람이 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이 새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미 죄로 인하여 영원한 멸망에 빠져야 할 비참한 곳에서 구원을 받아 새 사람이 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는 것은 다시 거듭나라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난 자 다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옛 사람처럼 살지 말고 새 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새 사람이 되었지만 우리 주변에는 옛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또 그들이 재미있게 사는 것처럼 보여서 다시 그들처럼 살려고 하는 마음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해서 새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는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음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 사람의 잘못된 습성을 따라 살지 않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는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23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심령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심령으로 새롭게 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주의 깊게 잘 들으시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고 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오직 심령으로 
먼저 "오직 심령으로"라는 말의 뜻부터 생각을 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성경의 용어 중에는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꼭 집어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용어들도 더러 있습니다. 
더러는 번역상의 문제이거나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문제이거나 때로는 우리 인간의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관계로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용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심령으로" 라는 말이 그런 말 중에 속합니다.
헬라어로는 이 말을 "프뉴마티 투 노오스(πνευματι του νοοs)라고 합니다.
"푸뉴마티"라는 말은 바람, 혹은 성령, 혹은 영으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노오스"라는 말은 정신, 마음, 이해, 이성, 판단, 깨달음 등으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이런 문자적인 뜻만 가지고 해석을 하면 어떤 "우리 마음에 오신 성령님이다" 혹은 "우리의 영혼을 말한다"라고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오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육신과 대치되는 말로 영혼을 말하는데 그 영혼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데 이의가 없기 때문에 혹은 영혼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심령이라는 말은 앞 뒤 문맥을 살펴볼 때 꼭 그렇게만 해석을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이 성령님이나 영혼을 말하기보다는 어떤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프뉴마"를 성령님이나 영이 아닌 바람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프뉴마에 바람이라는 뜻도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바람으로 이해를 한다고 했습니다.
바람이나 호흡은 능력을 의미하는 말로 쓰입니다.
그래서 심령 즉, 마음의 영이라는 말은 마음을 주장하고 조정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합니다.
심령은 영혼이나 성령님이 아닌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나 주장 계획들을 조정하고 움직여 나가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창세기 6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노아홍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을 보실 때 그들의 악함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의 특징은 우리의 마음이 악하고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고 그 마음의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심령 즉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이 바뀌고 우리의 이해력이 바뀌고 우리의 판단이 바뀌고 우리의 깨달음이 다르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근본적인 정신 즉 심령의 변화가 없이는 우리가 아무리 새 사람을 입는다고 해도 위선이거나 거짓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이 겉으로만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새 사람을 입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사랑나누기 운동에 동참을 하고 여기 저기에서 노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선물도 주고 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속에 악한 마음은 그대로 두고 나쁜 일을 하면서 겉으로 남들이 보게 하려고 선한 일을 하는 척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겉으로만 외형적으로만 선을 베푼다면 그것은 참된 의미의 선행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보다 선한 일을 더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선행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들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 외형적으로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그들이 전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시대 때에도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엄청난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무수한 재물도 가져다가 바쳤고 살진 짐승들을 수도 없이 많이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제물들을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3)라고 했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마음에는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형식적으로만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셨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근본적인 마음의 생각들은 변함이 없이 악한 것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만 선을 행하는 것은 참되 선이 아니라 위선이며 거짓에 불과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과 가치관과 추구하는 목적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진 심령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심령은 영혼이나 성령님이 아닌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나 주장 계획들을 조정하고 움직여 나가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심령으로 새롭게 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시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몸은 교회에 와 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생각이나 가치관은 여전히 옛 사람이었습니다.
이방 신을 섬기다가 하나님을 섬기게 된 사람들이 섬기는 대상인 신은 하나님으로 바뀌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나 섬기는 방법은 옛날 마귀를 섬기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옛날의 잘못된 모든 생각들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우상을 섬겼고 사탄이 가르쳐 준 잘못된 생각들을 듣고 세뇌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근본적인 심령의 변화가 없이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할 마음의 생각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탄이 휘어잡고 있는 이 세상에서 배운 것들 경험한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을 바꿔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성도님들도 과거에 섬기던 미신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그 생각들은 옛날 미신이나 하나님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 비슷한 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기복 신앙들이 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지 못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귀신이나 비슷비슷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도 미신들처럼 지극정성으로 손을 비비고 기도하면 들어 주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정성이 부족하다 싶으면 새벽부터 찬물로 목욕을 하고 40일 금식을 하고 100일 기도를 드리면 대충 들어 주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잘 안되면 돈 뭉치 한 다발 가지고 와서 어떻게 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생각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불교나 유교의 가치관입니다.
신앙생활도 불교나 유교의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대전에 제가 잘 아는 집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 어머니도 아들 따라 교회를 잘 다닙니다. 

그런데 일 년에 한번은 꼭 어머니와 아들이 다툽니다.
영감님 기일만 되면 다툽니다.
교회에 다니니까 제사는 안지내고 추도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어머니는 꼭 음식상을 상을 한 상 차리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차리는 것까지는 아들이 양보를 합니다.
어차피 예배 드리고 나면 가족들이 함께 먹어야 하니까 평소보다 낫게 과일도 사고 고기도 사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상을 차리면서 사과나 배는 꼭 윗 부분과 아래부분을 잘라내고 상에 올립니다. 옛날 제사상처럼 차리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귀신들과 전적으로 다르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복이나 받기 위해서 섬기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주만물의 주인이시고 우리 인간을 창조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당연히 그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2)윤리 기준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오랜 세월동안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윤리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불교나 유교에서 배운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깊은 산속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으면 아 참 좋다 저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바르게 사는 것이야 성직자라면 적어도 저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생각을 합니다. 
절에서 중들이 뭘 하면 좋아 보이고 교회의 목사들은 사이비처럼 보이고 하는 것도 오랫동안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불교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그런 세뇌된 마음 때문에 불교에도 구원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인관 관계의 모든 지식들은 유교의 영향을 받은 것들입니다.
다행하게도 유교가 우리 성경에 있는 윤리들과 비슷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유교의 교육이 윤리관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윤리에 관한 생각들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구약의 율법들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율법은 십자가와 원수가 되느니라 라고 까지 했는데도 사람들은 율법을 참 좋아합니다.

오늘날 교회내의 많은 목사님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걸어놓고 기독교라는 간판을 걸어놓고도 유대교의 율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가지고 설교하면 십중팔구는 그 본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끌어 내지 못하고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설교를 합니다.

우리 나라 성도들은 오랫동안 그런 설교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율법을 가지고 설교를 해도 그것이 왜 옳지 않은지를 잘 모릅니다.
그런 설교에 세뇌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히 옳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설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윤리적이거나 기복적인 설교들을 좋아할까 생각을 했습니다.
옛 사람의 습성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직 새 사람이 되지 못했기에 심령으로 새롭게 되지 못했기 때문에 유교의 윤리를 붙잡고 율법을 붙잡고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3)축복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몇 일 전에 어떤 큰 교회 목사님 설교를 들었는데 축복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자신이 경험한 간증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목사님은 어렸을 때 참 가난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밥도 배불리 못 먹고 학교에는 다녔지만 늘 수업료를 못 내서 교무실에서 꾸중을 듣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가정도 화목하지 못해서 늘 밥상머리에 앉으면 서로 큰소리를 내고 싸우고 해서 불행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목사가 되어서 축복을 받아서 지금은 잘 산다고 합니다.
수천명이 모이는 교회의 당회장이 되고 교회당은 으리으리하게 짓고 그 좋은 시설들과 멋있는 엘리트 성도들에게 둘러싸여 멋지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좋은 집에서 살고 아이들은 다 미국에 유학을 보내서 공부시키고 남부러울 것 없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산다고 했습니다.

남 축복 받아서 잘 산다는데 제가 배가 아파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목사님이 가진 가치관에는 옛 사람이 아직 들어 있다는 아쉬움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과거에 가난 한 삶을 살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과거에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본 사람은 부자가 되고 배불리 먹는 것처럼 큰 축복이 없을 것입니다.
수업료를 못 내서 교무실에 불려 가보지 못한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수업료 턱턱 내면서 그것도 외국의 유명한 학교를 다니는 그 행복을 잘 모를 것입니다.
작은 교회 성도들 몇 십명 모아놓고 어려운 사람을 살아 본 목사라면 그 대형교회가 부럽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지어주는 밥을 먹고 아버지가 주시는 수업료를 내면서 학교에 한번 다녀 보는 것이 소원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으로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너무나도 잘 압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그런 축복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예수님은 축복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는 자가 복이 있고 미움을 받고 왕따를 당하고 욕을 먹는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화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화 있을진저 너희 배부른 자여, 화 있을진저 너희 웃는 자여....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새 사람을 입는 것은 그런 잘못된 가치관까지 버리는 것입니다.
사탄이 잘 못 가르쳐 준 가치관 그 잘못된 가르침을 따라 알고 경험한 것들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참된 윤리관과 참된 축복관을 가지는 것이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아직도 새 사람을 입지 못하고 옛 사람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우리를 보고 비웃을 것입니다.
주리고 울고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 초라하게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옛 사람의 가치관을 가지고 평가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의 말씀에 예수님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주에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고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게신 후"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저는 그 찬송을 자주 부르면서 다녔습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졌던 잘못된 생각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유리관도 바뀌고 가치관도 바뀌고 삶의 목표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기쁨으로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천국을 목표로 바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