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2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69)
본문 : 엡 4:18-19
제목 :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사람 2.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애꾸눈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두 눈을 가진 사람이 놀러 갔답니다.
그랬더니 그 동네 사람들이 두 눈을 가진 사람을 이상하게 바라보면서 야 이상한 장애인이 한 사람 왔다고 놀리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 애꾸눈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동네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지식인 대우를 받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는 사람들이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남자가 여자처럼 살아도, 여자가 남자처럼 살아도, 여자가 여자하고 결혼을 하고, 남자가 남자하고 결혼을 해도 그것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이 되는 에베소교회의 형편도 그와 같았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정상적인 사람 즉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극 소수에 불과했고 이방의 여러 헛된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습니다.

교회 안의 사람들도 그들이 비록 교회에 오기는 했지만 그들도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대교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이방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무엇이 바른 것인지를 잘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그런 혼란스러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과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사람의 차이를 설명해줌으로 성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성도답게 살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우리도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로서 바른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1.감각이 없는 자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사람의 특징을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불신자들은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도 그것이 수치스럽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일을 하고도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면 지금의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무감각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조금만 잘못해도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이 떨리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웬만한 일 가지고는 얼굴이 붉어지거나 마음이 떨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어느새 뻔뻔한 뻔순이 뻔돌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악해졌는지 악을 행하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6:15)

이방인들이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도 알지 못하니까 그렇게 산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고 하나님께 진리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유대인들이 그들처럼 악을 행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얼굴도 붉히지 않는 뻔뻔함을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처럼 벌을 내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와 같은 세상입니다.
양심불감증 도덕불감증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뻔뻔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성도들도 이런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이 두꺼워지고 죄에 대하여 도덕에 대하여 불감증에 걸릴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불감증을 치료하지 않고 놔두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고 회계할 기회도 놓치고 결국은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 보면 교회 안에 나타날 거짓교사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교회 안에도 수많은 이단들과 거짓 선생들이 나타나서 우리를 유혹할 것인데 이 사람들의 특징은 양심이 화인을 맞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불인두로 살갗을 지지면 그 부분은 아무 감각이 없어지는 것처럼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 거짓말을 해도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천연덕스럽게 진짜처럼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거짓교사들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이단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어느 사이에 말만 반지레하게 잘 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짓말도 진짜처럼 그럴듯하게 말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고만 것입니다.

양심에는 화인을 맞고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얼굴색도 변하지 않는 양심불감증, 도덕불감증 환자들이 되어버린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살면서 우리도 전염이 되어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마저도 그런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새 생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죄인인 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면서 우리의 죄를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가운데 우리를 선택해서 불러 주셨고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셨고 우리가 지은 죄가 얼마나 흉칙하고 얼마나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새 생명으로 거듭난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다시 또 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죄를 무서워 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느끼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다시 우리를 멸망으로 빠지게 하는 무서운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감각을 되살리는 운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늘 기억하고 죄가 우리 인생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것이었는가를 늘 기억하고 죄를 지었을 때 그 수치함을 느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잘못된 환경으로 인해서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수치를 느끼는 감각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늘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움으로 굳어져 가는 마음을 느낄 줄 아는 마음으로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성도는 영적인 것에 대해서 감각을 되살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합니다.
기도해야 영적 삶이 있다고 아무리 외쳐지고 외쳐져도 기도하려는 감각이 없습니다. 
집에 양식이 떨어지고 생활비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안절부절 난리를 치지만 
영적인 양식이 부족해도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감각이 없는 상태입니다. 
자녀들이 공부를 조금만 안하고 TV를 보고 있어도 공부 안 한다고 안달을 하지만, 자녀들이 전혀 신앙생활을 안 해도, 혹은 교회의 예배에 빠져도 전혀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 세상에서 잘사는 것 세상에서 멋을 부리는 것에 대해서는 열심을 내고 그렇게 되지 못하면 챙피한 줄 알면서도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 신앙적인 면의 감각을 되살리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것이 참으로 그 무엇보다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방탕에 방임하고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자의 특징을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 방탕이라는 단어는 '기준이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자기 자신을 기준이 없는 삶에 내어 던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방탕에 내어 던지고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기준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그냥 세월 따라서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는 대로 그냥 거기에 맡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어떤 삶의 기준이 있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바른 가치관이 있고 바른 길이 있고 바른 목적지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 기준이 없습니다.
각기 나름대로 도덕을 정하고 종교를 만들고 기준을 만들고 살아가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만든 것일 뿐 참된 진리가 아니고 참된 길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영생도 없고 영원한 천국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거짓들만 있는 것입니다.
살고 나면 후화와 허망함만 가져다 줄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리의 말씀이 있고 참된 길이 있고 참된 소망이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그 나라에서 영생복락의 삶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처럼 세월에 운명을 맡기고 아무렇게나 방탕하게 살아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따라서 아무렇게나 방탕에 우리 자신을 방임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처음에는 어느 정도 아이들을 바르게 교육을 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좀 커가면서 반항을 하고 말을 안 듣기 시작을 합니다.
달래도 보고, 공갈을 쳐 보기도 하고, 매를 들고 혼을 내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이 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것은 아닙니다. 
하다가 하다가 안되면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그 순간에 이 아이의 앞날은 깜깜한 길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간섭을 해도 잘 될까 말까 하는 것인데 네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면 어떻게 바르게 살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알아서 철이 들 때면 이미 그 때는 세월도 흘러가 버렸고 기회도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그렇습니다.
열심히 살아 봐야지 바르게 살아 봐야지 하고 결심을 해 보지만 그것이 쉽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심삼일이라고 했고 인간의 마음은 조석변이라고 했습니다.
어느새 나 자신도 포기를 하고 될 대로 되어라 하고 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마음이 이렇게 좁아서 어쩔 수 없어
내 마음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해 그냥 사는 것이지 
나는 원래 마음이 못됐어 나는 게을러서 어쩔 수 없어 나는 머리가 잘 안 돌아가 나는 안돼...
그래서 포기를 하고 그냥 아무렇게나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자신도 우리를 붙잡지 못하고 내버려 둔다면 누가 나를 붙잡아 주고 바르게 인도해 주겠습니까
내 자신이 정말 마음을 굳게 다짐하고 세상의 잘못된 풍조에 우리 자신을 내버려 두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을 때 우리 스스로를 죄악에 방치해 버릴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버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졌을 때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어두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롬1:24)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나를 포기하고 내버려 두고 나 자신도 나를 포기하고 내버려 두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포기하고 내버리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고 구원을 받게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로운 사람이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를 하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럴 때에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죄에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성령님께 의지하여 우리 자신을 믿음 안에 있게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우리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 능력에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에게 복음을 통하여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가 어떠할지라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를 포기하고 방탕함에 자신을 방임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선을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우리가 있게 하면 의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다는 이 귀한 복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알지 못해서 자신을 포기하고 방탕함에 자기 스스로를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진리의 복음을 알고 구원의 길을 알고 복음의 위대한 능력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
이 세상 사람들 즉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욕심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누구나 다 욕심은 있습니다.
더 부자로 살고 싶은 욕심, 더 존경 받고 싶은 욕심, 더 행복해지고 싶은 욕심은 다 있습니다.

그 욕심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욕심을 통하여 우리가 이 세상을 열심히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문제를 삼는 욕심은 그 욕심이 지나쳐서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더러운 일도 행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선한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바르지 못한 일까지 하면서 욕심을 채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일시적으로는 잘 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남을 속이고 남의 것을 착취하고 남을 못되게 하면서 거둔 성공은 모래 탑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부도덕한 방법으로 채운 욕심은 오래 가지도 못하고 행복하게 해 주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지나친 욕심은 자칫 감사를 잃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 불만을 가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베풀어 주신 많은 것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주어지지 않는 것을 가지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아예 잊어버리게 하는 무서운 함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욕심이라는 것은 그 끝이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늘 조금만 더 있으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조금 더 라는 것이 끝이 없고 한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욕심을 채우는 일은 한강에 돌을 던져 넣는 것과 같습니다.
평생을 던져 넣고 또 던져 넣어도 한강을 채울 수 없듯이 우리의 욕심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끝이 없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부도덕한 일을 행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까지 포기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감각이 없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일을 행하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그것이 죄라는 사실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방탕한 일에 방임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를 포기하고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들이 그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더러운 일까지도 서슴치 않고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가 그들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악하고 추한 일을 느낄 줄 아는 훈련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죄에도 부끄러워할 줄 알고 수치를 느낄 줄 아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꼭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도록 노력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헛된 욕심을 채우려고 애쓰는 어리석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