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21.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93)

본문 : 행 15:10-11

제목 :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10.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라고 했습니다. 시험이라는 말은 믿음이라는 말과 반대되는 개념을 가진 말입니다. 믿을 수 없어서 테스트해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가끔 우리들을 시험해 보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일을 맡기실 때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는가를 시험해 보시고 시험에 합격했을 때 더 큰일들을 맡기십니다. 여러분 앞에 어떤 좀 힘들고 어려운 일이나 뭔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테스트하시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보셔야 합니다. 그런 시험에 합격을 하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일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테스트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테스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테스트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시험을 하는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과정의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들이 많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도우심을 받아서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광야인지라 물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물이 없으면 하나님께 물이 없습니다. 물을 주세요. 라고 기도하면 될 일인데 그렇지 않고 원망부터 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원망을 하기를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을 하시기를 애굽에서 구출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약속을 믿고 따르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약속을 하신 하나님께서 광야에 물이 없는 것도 아시는 분이시고 인간들이 먹고 마셔야 사는 것도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냥 믿고 따르면 필요할 것 다 주실 것인데 믿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렇게 믿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하라고 해서 그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곳 이름을 ‘맛사’ 혹은 ‘므리바’라고 부르게 하셨는데 이 맛사라는 말에서 히브리어의 시험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이라는 말을 인간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쓸 때는 원망과 불평이라는 뜻으로 씁니다. 특별히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시험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시험한다는 말도 단순히 하나님을 테스트한다는 말 보다는 하나님께 의도적으로 도전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간섭하려 드는 것입니까”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일입니다. 그것을 바꾸어서 사람의 뜻으로 사람의 능력으로 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지 못하고 반항하고 거역하고 간섭하려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일을 믿지 못하고 그 뜻을 거슬러서 다른 복음을 전하고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항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조상들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

 

본문 10절에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라고 했습니다.

 

바로 앞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 할례나 율법을 행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을 멍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조상들도 성공하지 못했고 지금 유대인 자신들도 성공하지 못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이 일을 이방인들에게 강요를 하고 있느냐고 질책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멍에를 씌우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평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서로 지키면서 살아야 할 최소한의 것들을 율법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그들에게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도구가 아니고 힘들고 어렵게 지켜야 하는 멍에가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잊어버리고 강제로 행하여야 하는 멍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억지로 행하여야 하는 멍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율법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율법을 행하려고 하다가 보니까 형식적이고 가식적으로만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속마음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정신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정신에 따라서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가 보니까 사람들 보는 앞에서만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고 율법의 의무를 완성한 사람들처럼 행세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계명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해하지 말고 사랑하고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속으로 엄청나게 미워하면서도 살인은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신은 율법을 지킨 사람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율법에 도적질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율법도 남을 것을 훔치지 날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것도 챙겨주고 모든 사람이 더불어서 함께 잘 살라고 주신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권에 개입하고 남의 것을 착취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고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직접적으로 남의 것을 훔친 일이 없다고 자신은 계명을 지킨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고 하는 것도 단순히 우상숭배만을 금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제일로 섬기고 최우선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재물을 이 세상의 사람들을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제일 우선으로 여기면서 하나님 앞에 와서 제사한번 드렸다고 이 계명을 다 지킨 것으로 착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계명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그 계명대로 산다고 하면 정말로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생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데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를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율법을 완벽하게 행하여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니까 그것이 멍에가 될 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행하여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며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도 사실 불필요한 무거운 멍에를 많이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해야 할 일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억지로 하려고 하면 가식적으로 형식적으로 하게 되고 무거운 짐이 됩니다.

 

기도하는 일은 참 좋은 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에 무당에게 귀신에게 빌고 기도하던 사람들입니다. 기도하고 빌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들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주만물의 주인이시고 참 신이신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된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었겠습니까? 기도를 통해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을 살았는가를 깨닫게 되고 그래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그런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또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하니까 응답도 받고 좋은 일이 많이 생기니까 기도하기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요일에도 금요일에도 심지어 새벽마다 기도회를 만들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기도해서 잘 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기도가 변질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보다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많아졌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기도보다 자기 이권을 챙기려는 기도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는 기도보다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한 기도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응답받는 기도가 적어졌고 기도하는 사람은 힘들어졌고 기도가 힘들어졌고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하고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큰 멍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고 물질을 드리는 일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충성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도구가 되기 때문에 정말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세상의 복을 주시는 이유도 이런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한 달란트나 재물이나 따뜻한 마음이나 각양 좋은 은사들을 주시는 것도 이런 복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런 영광스러운 일도 억지로 하고 마지못해서 하다가 보니까 무거운 짐이 되고 맙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이런 일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 하지도 못하고 짐만 지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헌신이나 충성이나 헌금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억지로 하다가 보면 그것이 짐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값 주고 사라고 하는 것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교인으로서 의무들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들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한 헌신들이 우리 자신들을 얼마나 유익하게 하는가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11절 말씀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인간들의 삶의 원리로 주신 율법들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도 형식적이거나 가식적인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도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고 헌신하면서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지 않는 많은 일들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구원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구원을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통하여 우리가 세상에 떠내려가지 않고 주님 안에서 더욱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의 수단이고 축복의 통로로서 사용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런 것들을 통하여 즉 인간의 기도나 선행이나 충성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노력이나 공로와 전혀 관계가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함으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그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기 때문에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대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택을 한 사람들이 받는데 그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의 삶과는 상관이 없이 선택을 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똑똑해서 내가 뭘 잘해서 선택을 해 주셨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나의 공로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 전혀 관계없이 선택을 해주신 것이기 때문에 택함을 받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믿을 수 있다고 하셨기 때문에 믿음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 택함을 받은 우리 속에 들어와서 복음의 진리를 알게 해주시고 믿을 수 있는 마음과 믿을 수 있는 환경까지 마련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복음을 깨달을 수 있고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시는 분도 성령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해주시고 점점 더 깨끗한 마음으로 살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조금이라도 들어가지 않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습니다.

 

과거에 천주교에서는 이 구원의 은혜를 절반공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스스로 좀 착한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 그 착한 마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요즘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인간의 행함을 고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 플러스 인간의 노력이나 행함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한술 더 떠서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가르침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항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올무를 놓고 방해물을 설치해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방해하는 나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부인하고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귀한 뜻을 방해하는 것이며 시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좀 다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나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는 것은 우리가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주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지 우리에게 멍에를 메게 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임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선한 일 좋은 일 많이 하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