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7.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91)

  본문 : 행 15:1-5 

  제목 :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라.  

 

 

  “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전쟁터와 같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살아가는 자체가 경쟁이고 상대방과 싸워서 이겨야 살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터에 크게 두 종류의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외부로부터 침략하려고 하는 적과 또 하나는 내부에 이미 들어와 있는 적입니다.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외부로부터 오는 적은 우리나라를 쳐들어왔던 북한이 주적이고 그들을 도왔던 중국이나 소련이 적대국가입니다. 우방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이나 미국도 때에 따라서는 우리나라와 경쟁상대국가이고 적군이 되기도 합니다.

 

  내부의 적은 간첩이나 살인이나 강도를 일삼는 악한 사람들이 될 것이며 그들이 아니더라도 보수나 진보를 나누어서 서로 적군이 되기도 합니다.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 가난한 사람과 부자 사용자와 노동자가 서로 겨루어야 하는 경쟁상대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직장이나 가정에도 외부의 적이 있고 내부의 적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외부의 적이 있고 내부의 적이 있습니다. 이런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 둘 중에 누가 더 위험할까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때로는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위험할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밖으로부터 오는 위험한 일을 당하면 그 어려움을 물리치기 위해서 힘을 기르고 훈련을 하고 노력을 해서 그 적을 물리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적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포기하고 항복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우리 속에는 뚜렷한 대적이 있습니다. 사탄을 따르려고 하는 타락한 본성이 우리 속에 있는 적군입니다. 이 타락한 본성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서 바르게 살려고 하는 우리들을 계속해서 괴롭힙니다.

 

  외부에서 오는 적은 무섭기는 하지만 항상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적, 즉 타락한 본성은 수시로 우리들을 괴롭혀서 바른 길로 가지 못하게 만드는 아주 무서운 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 수시로 기도하고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악한 본성과 싸워 이기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죽인다고 겁을 주는 외부의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있는 타락한 본성이 게으름을 피우게 하고 핑계거리를 찾게 하고 이런저런 사유를 만들게 해서 교회에 오는 일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금년에 우리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는 교회”라는 표어를 내걸고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믿음이 더 굳건해지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의 적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하고 타락한 본성과 싸워서 이기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배우게 될 사도행전 15장은 교회 내부에 들어와 있는 적들과의 싸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장까지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외부의 적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지만 15장에는 내부에 들어와 있는 거짓 선생들 때문에 그들과 싸우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있어서도 이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이 더 무섭습니다. 위부로부터 오는 핍박은 힘을 합하여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만 내분의 적은 서로 분열을 일으켜서 서로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본문 1절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일차선교여행을 마치고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와서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유대에서 내려와서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을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은 바나바와 바울이 가르친 복음과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거나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할례를 받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언약의 표시로 준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할례가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자꾸 반복해서 볼 수 있었던 것이 유대인들의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비방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말로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 엄청난 은혜를 받으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몰랐다는 것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나 스데반이나 바울이 설교를 통해서 구약성경의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말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설명을 해도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는데 유독 유대인들이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고 제사를 드려야 하고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너무나 오랫동안 그들의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기가 쉽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전통적으로 그렇게 알고 지켜왔던 것을 하루아침에 누가 몇 마디 한다고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교의 지도자들이나 존경받던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다면 또 몰라도 유대인 중에 천대를 받던 베드로 같은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고 선뜻 그 말을 따른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도 유대인들의 그런 전통에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식이 아니라 유대교식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율법을 지키거나 선한 일 좋은 일 많이 하는 것 나쁠 것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 하고 그 기준은 율법이라는 것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다시 말하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는 것도 소용이 없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가 다 용서 되니까 앞으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말했습니까? 아니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엄청난 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다 용서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 대해서 더 무섭게 생각하고 더 바르게 잘 살려도 몸부림을 쳐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타락한 습성을 가진 우리의 몸을 가지고는 스스로 바르게 살아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속에는 흉악한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 착한 척 하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선한 일 좀 하고 자기가 의롭다고 착각하면서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스스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의의 경지에 오를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의롭게 되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나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없음을 고백하는데서 시작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믿고 나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나서도 그 고백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착하게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본문 2절에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유대에서 내려와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과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바울 및 바나바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누가 양보할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핵심이 걸린 아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누가 양보할 만한 그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대로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 나름대로 그들이 알고 믿는 최고의 것이 구원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은 분명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투기도 하고 서로 변론을 하기도 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가서 자문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몇몇 사람을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내서 누구의 말이 옳은가를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이 문제로 결국은 예루살렘에서 종교회의가 열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이미 아는 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게 됩니다.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는 계속해서 다툼과 변론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장로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결론을 내린 문제를 가지고 지금도 다투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오히려 사도들의 결정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 사람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론은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 더 그럴듯합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들보다 머리가 더 좋고 공부도 더 많이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제일 큰 이유는 사람들이 좀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좀 많이 배우고 돈도 좀 있고 비교적 바르게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만해서 그런 주장을 합니다.

   

  자신들이 엄청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속에는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착한 척 바르게 사는 척 하면서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아주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 대지 않으면서, 원수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속으로는 형제까지도 미워하면서, 좁을 길로 가지도 않으면서, 세상 욕심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벗어주지 않으면서, 돈을 보면 좋아하고 예쁜 여자를 보면 좋아하면서, 율법의 일점일획까지 다 지키지도 못하면서 알량한 선행 한 두 가지 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족한 오른 눈을 빼어 내버리지 않으면서 실족한 오른 손을 잘라버리지 않으면서 스스로 선을 행하여 의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흉악한 죄악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죄를 무서워하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주장이 먹혀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잘 살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그런 사람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을 것입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4-5절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이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앞에서 본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고 그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일들을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보고를 하는데도 여전히 자기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이 일어나서 자기주장을 말했다고 했습니다.

 

  바리새파라고 하면 유대인들 중에 가장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나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이나 어떤 일이든지 최고로 잘하는 사람들이 바리새파였습니다.

 

  그 바리새파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 사람도 역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 한 말이라 설득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열심히 살지도 않고 바르게 살지도 않는 사람이 말을 하면 그 사람의 말이 좋은 말이라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있었던 사람이라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할례도 받고 율법도 행하여야 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거부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현상이 교회 내에 있습니다. 전도를 많이 하고 교회도 엄청나게 부흥시킨 목사가 하는 말을 사람들은 무시하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헌금도 많이 하고 충성을 많이 한 사람의 목소리는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사람들이 교회 내에 있는 적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부인하고 행함이나 다른 복음을 강조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어떤 역량을 가졌건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건 상관이 없이 우리의 적입니다.

 

  다른 것 다 잘한다고 해도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 침투하여 거짓복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조심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교회 안에서 복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고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거나 소홀히 여긴다면 그 사람은 우리의 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