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7.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27)
본문 : 엡 2:13
제목 : 하나님께 가까이
병원에 가 보신 분은 잘 알겠지만 병원에 처음 가면 과거의 병력이나 생활상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 봅니다.
어떤 분은 의사가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우리 돈을 많이 받으면서 진단을 하면서 자기가 보고 척 알아야지 왜 우리에게 자꾸 물어 보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똑똑한 의사라고 해도 우리의 과거의 생활습관이나 병력을 통해 현재 상태를 더 잘 진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사주 팔자나 관상을 통해서 자신의 미래를 점쳐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주나 팔자도 과거의 통계를 통한 것이고 관상도 과거에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얼굴의 모습을 통해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취직을 할 때에도 과거의 우리 삶을 적은 이력서를 보고 취업을 경정을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어떤 가정에서 자랐는지 상을 받거나 벌을 받은 일이 있는지를 잘 살펴보고 앞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정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자신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자신의 지나온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고 학습하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과거를 돌이켜 봄으로써 현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우리가 구원 받기 이전에 어떤 상태였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현재의 삶에 감사할 수 있으며 미래의 소망으로 어려운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디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에베소서 2장에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너무나 정확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죽은 자였고 지금은 우리가 살리심을 받아 새 생명으로 살고 있고 미래에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과거의 우리와 현재의 우리를 핵심적으로 잘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과거의 우리 모습과 현재의 변화된 우리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심으로 큰 힘과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오늘 본문 말씀에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멀리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리 있었고 구원 받을 자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군에 가니까 저보다 한 달쯤 고참이 저를 불러 놓고는 하는 말이 새까맣다 그러는 것입니다.
뭐가 새까맣다고 하는지 몰랐는데 자기하고 나 사이에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군에 들어오고 나서 제가 군에 들어 올 때까지 그 사이에 군에 온 사람들을 순서대로 세워 놓으면 그 길이가 너무 길고 멀어서 새까맣게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살펴보면 하나님과의 거리가 구원받을 순서가 너무 멀어서 보이지도 않게 멀리 멀리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 살펴보셨지만 2장에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를 살펴봄으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2: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제일로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제일로 싫어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이미 그 형벌을 받아서 죽어 있는 사람이 하나님 가까이 올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2:3)라고 했습니다.
본질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대상으로 난 사람이기 때문에 가까이 오면 하나님께서 노발대발하시는데 감히 어떻게 하나님 가까이에 올 수 있겠습니까
"육체로 이방인이요,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2:1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래도 그 진노의 자녀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 이스라엘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오 약속을 받은 할례당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外人)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2: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기로 약속을 하신 그 언약의 백성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이요 소망도 없는 사람 하나님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우리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지금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와 있지만 과거의 우리 형편을 살펴보면 도저히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인 역사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본문 말씀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 가까이에 올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의 의미를 안다고 하지만 그 의미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는 사람도 왜 그렇게 하셨을까 하고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냥 다른 방법으로 죄를 용서 해 주시면 되지 왜 피 피 하면서 그 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가라고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돈을 많이 바치라고 하시든지 선한 일을 많이 하라고 하시든지 고행을 하면서 많이 깨달으라고 하시든지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용서를 해 주시고 구원을 해 주신다고 하시면 오히려 쉽게 납득을 하고 어렵지만 노력을 해 보겠는데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 용서를 해 주시고 구원을 해 주신다고 하니까 조금은 이상한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1)사람의 피가 상징하는 것
피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피는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서 자연사하는 그런 죽음이 아니라 산 사람이 그 죄값으로 인해서 강제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즘 이라크 알 자르카위 소속 무장단체에 의해 피랍되어서 살해당한 김선일씨 때문에 온 나라가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돈 벌러 외국에 나가서 죽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여기 저기서 죽어가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도 왜 김선일씨의 죽음에 이렇게 가슴 아파할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가 강제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말씀에서 사람의 피란 죄로 인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는 이렇게 반드시 죽임을 당하도록 하셨습니다.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것이 범죄한 인간의 처지인 것입니다.
2)짐승의 피가 상징하는 것
구약의 제사제도를 보면 거의 모든 제사가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나 이런 짐승의 피를 흘리면서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그들도 역시 인간 즉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한 방법을 제시해 주셨는데 그것은 자신이 죽을 대신 짐승의 피를 흘려 죽게하고 그 피로 일시적이지만 죄값을 지불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의 피를 흘려서 제사를 지내라고 하신 이유가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의 피를 좋아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실 것입니다.
짐승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작품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짐승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즐기시는 그런 분은 아니실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간들이 자신의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짐승을 잡을 때 죽기를 싫어하고 억지로 사지로 끌려 오는 모습을 보면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짐승들도 자기가 죽으러 간다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는 참 비참한 모습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칼로 목을 찌르고 피를 흘리게 하고 각을 떠서 불에 태우는 그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이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 제사의 의미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죄 때문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그 죽어가는 짐승의 모습이 바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냥 제사를 위한 제사만 드리게 된 것입니다.
전 세계 모든 나라에는 이 제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제사제도의 근원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에서 온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온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제사의 원 뜻은 변질이 되었지만 모습들이 비슷한 것은 그 근본이 하나님께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도 고사라는 것을 드리면서 돼지 머리를 놓고 고사를 드립니다.
너무나 많이 변질이 되어서 제사를 드리는 대상도 하나님에게서 잡신으로 바뀌었고 짐승도 정결한 소나 양이 아닌 부정한 돼지로 그것도 피가 없는 삶은 돼지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중국에도 옛 왕궁 터에 가보면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제단이 있다고 합니다.
그 형태가 성전의 것과 비슷하고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다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중국에 먼저 그 제사제도가 들어왔기 때문에 조금 덜 변질이 되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3)예수 그리스도의 피
이 제사제도는 장차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를 지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반드시 그 값을 치루어야 하는데 구약시대는 그 때 그 때마다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림으로 용서를 받게 하고 때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피를 흘리시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다는 것은 이런 중요한 의미를 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3.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까이 있기에 너무나 어려우신 분이십니다.
범죄한 인간이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간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자격을 주심으로 우리가 이렇게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는 이런 영광스런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좋은 특권을 거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는 것을 알면 서로 오려고 난리를 칠 것인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은행에 출입할 일이 별로 없지만 가끔 선교사님 생활비 송금하려고 은행에 가는데 좀 멀지만 서구 신흥동까지 갑니다.
은행사람들이 목사를 알기를 우습게 알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거기가면 장로님 한 분이 차장으로 계시는데 이 장로님은 장로님 중에서도 아주 훌륭하신 장로님이라서 저를 목사라고 잘 알아 모십니다.
그래서 거기 가면 밖에서 줄을 서는 일이 없습니다.
그냥 순서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앉아 있으면 차도 주고 일도 다 봐줍니다.
은행 고객 중에 V.I.P. 손님이 있는데 아주 돈도 만호 은행에 수입도 많이 올려 주는 특별한 사람만 그 자격을 주고 그 사람들이 오면 그렇게 특별히 대우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자격이 없지만 그 장로님이 목사라는 이유로 그렇게 특별 대우를 해 주니까 너무 좋습니다.
여러분 은행에 차장 한 사람도 이렇게 알고 가까이 지내니까 좋은데 은행지점장이나 아예 은행장쯤 알고 가까이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큰 회사 회장님이나 시장님이나 대통령쯤 안다고 하면 너무 좋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오 만 왕의 왕이시오 최후의 재판을 담당할 심판주가 되시고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신 전지 전능하신 그 하나님을 알고 가까이 지낸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가까이에서 함께 있는 사람의 차이라는 것은 설명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전에 교회에 와 있으니까 좋은 줄을 몰라서 감사하지 못하고 감격해 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도망을 갈까 궁리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37편에 보면 바벨론 강가에서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 놓고 우는 사람들의 시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시온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수금을 치며 찬양을 드릴 때는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 몰랐지만
이렇게 성전에서 쫓겨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보니까 그 때가 얼마나 좋았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수금을 가지고 뭐하냐고 그 노래를 좀 불러 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쫓겨난 신세가 된 이 마당에 노래를 부른다고 그것이 무슨 노래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73:27-2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멀리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 가까이 나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렇게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다시 한 번 기억을 하시고 날마다 날마다 더 하나님께서 가까이 나아오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마음껏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 엡 2:13
제목 : 하나님께 가까이
병원에 가 보신 분은 잘 알겠지만 병원에 처음 가면 과거의 병력이나 생활상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 봅니다.
어떤 분은 의사가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우리 돈을 많이 받으면서 진단을 하면서 자기가 보고 척 알아야지 왜 우리에게 자꾸 물어 보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똑똑한 의사라고 해도 우리의 과거의 생활습관이나 병력을 통해 현재 상태를 더 잘 진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사주 팔자나 관상을 통해서 자신의 미래를 점쳐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주나 팔자도 과거의 통계를 통한 것이고 관상도 과거에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얼굴의 모습을 통해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취직을 할 때에도 과거의 우리 삶을 적은 이력서를 보고 취업을 경정을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어떤 가정에서 자랐는지 상을 받거나 벌을 받은 일이 있는지를 잘 살펴보고 앞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정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자신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자신의 지나온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고 학습하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과거를 돌이켜 봄으로써 현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우리가 구원 받기 이전에 어떤 상태였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현재의 삶에 감사할 수 있으며 미래의 소망으로 어려운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디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에베소서 2장에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너무나 정확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죽은 자였고 지금은 우리가 살리심을 받아 새 생명으로 살고 있고 미래에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과거의 우리와 현재의 우리를 핵심적으로 잘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과거의 우리 모습과 현재의 변화된 우리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심으로 큰 힘과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오늘 본문 말씀에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멀리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리 있었고 구원 받을 자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군에 가니까 저보다 한 달쯤 고참이 저를 불러 놓고는 하는 말이 새까맣다 그러는 것입니다.
뭐가 새까맣다고 하는지 몰랐는데 자기하고 나 사이에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군에 들어오고 나서 제가 군에 들어 올 때까지 그 사이에 군에 온 사람들을 순서대로 세워 놓으면 그 길이가 너무 길고 멀어서 새까맣게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살펴보면 하나님과의 거리가 구원받을 순서가 너무 멀어서 보이지도 않게 멀리 멀리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 살펴보셨지만 2장에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를 살펴봄으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2: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제일로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제일로 싫어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이미 그 형벌을 받아서 죽어 있는 사람이 하나님 가까이 올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2:3)라고 했습니다.
본질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대상으로 난 사람이기 때문에 가까이 오면 하나님께서 노발대발하시는데 감히 어떻게 하나님 가까이에 올 수 있겠습니까
"육체로 이방인이요,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2:1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래도 그 진노의 자녀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 이스라엘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오 약속을 받은 할례당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外人)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2: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기로 약속을 하신 그 언약의 백성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이요 소망도 없는 사람 하나님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우리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지금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와 있지만 과거의 우리 형편을 살펴보면 도저히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인 역사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본문 말씀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 가까이에 올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의 의미를 안다고 하지만 그 의미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는 사람도 왜 그렇게 하셨을까 하고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냥 다른 방법으로 죄를 용서 해 주시면 되지 왜 피 피 하면서 그 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가라고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돈을 많이 바치라고 하시든지 선한 일을 많이 하라고 하시든지 고행을 하면서 많이 깨달으라고 하시든지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용서를 해 주시고 구원을 해 주신다고 하시면 오히려 쉽게 납득을 하고 어렵지만 노력을 해 보겠는데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 용서를 해 주시고 구원을 해 주신다고 하니까 조금은 이상한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1)사람의 피가 상징하는 것
피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피는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서 자연사하는 그런 죽음이 아니라 산 사람이 그 죄값으로 인해서 강제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즘 이라크 알 자르카위 소속 무장단체에 의해 피랍되어서 살해당한 김선일씨 때문에 온 나라가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돈 벌러 외국에 나가서 죽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여기 저기서 죽어가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도 왜 김선일씨의 죽음에 이렇게 가슴 아파할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가 강제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말씀에서 사람의 피란 죄로 인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는 이렇게 반드시 죽임을 당하도록 하셨습니다.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것이 범죄한 인간의 처지인 것입니다.
2)짐승의 피가 상징하는 것
구약의 제사제도를 보면 거의 모든 제사가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나 이런 짐승의 피를 흘리면서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그들도 역시 인간 즉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한 방법을 제시해 주셨는데 그것은 자신이 죽을 대신 짐승의 피를 흘려 죽게하고 그 피로 일시적이지만 죄값을 지불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의 피를 흘려서 제사를 지내라고 하신 이유가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의 피를 좋아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실 것입니다.
짐승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작품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짐승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즐기시는 그런 분은 아니실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간들이 자신의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짐승을 잡을 때 죽기를 싫어하고 억지로 사지로 끌려 오는 모습을 보면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짐승들도 자기가 죽으러 간다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는 참 비참한 모습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칼로 목을 찌르고 피를 흘리게 하고 각을 떠서 불에 태우는 그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이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 제사의 의미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죄 때문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그 죽어가는 짐승의 모습이 바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냥 제사를 위한 제사만 드리게 된 것입니다.
전 세계 모든 나라에는 이 제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제사제도의 근원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에서 온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온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제사의 원 뜻은 변질이 되었지만 모습들이 비슷한 것은 그 근본이 하나님께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도 고사라는 것을 드리면서 돼지 머리를 놓고 고사를 드립니다.
너무나 많이 변질이 되어서 제사를 드리는 대상도 하나님에게서 잡신으로 바뀌었고 짐승도 정결한 소나 양이 아닌 부정한 돼지로 그것도 피가 없는 삶은 돼지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중국에도 옛 왕궁 터에 가보면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제단이 있다고 합니다.
그 형태가 성전의 것과 비슷하고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다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중국에 먼저 그 제사제도가 들어왔기 때문에 조금 덜 변질이 되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3)예수 그리스도의 피
이 제사제도는 장차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를 지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반드시 그 값을 치루어야 하는데 구약시대는 그 때 그 때마다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림으로 용서를 받게 하고 때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피를 흘리시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다는 것은 이런 중요한 의미를 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3.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까이 있기에 너무나 어려우신 분이십니다.
범죄한 인간이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간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자격을 주심으로 우리가 이렇게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는 이런 영광스런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좋은 특권을 거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는 것을 알면 서로 오려고 난리를 칠 것인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은행에 출입할 일이 별로 없지만 가끔 선교사님 생활비 송금하려고 은행에 가는데 좀 멀지만 서구 신흥동까지 갑니다.
은행사람들이 목사를 알기를 우습게 알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거기가면 장로님 한 분이 차장으로 계시는데 이 장로님은 장로님 중에서도 아주 훌륭하신 장로님이라서 저를 목사라고 잘 알아 모십니다.
그래서 거기 가면 밖에서 줄을 서는 일이 없습니다.
그냥 순서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앉아 있으면 차도 주고 일도 다 봐줍니다.
은행 고객 중에 V.I.P. 손님이 있는데 아주 돈도 만호 은행에 수입도 많이 올려 주는 특별한 사람만 그 자격을 주고 그 사람들이 오면 그렇게 특별히 대우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자격이 없지만 그 장로님이 목사라는 이유로 그렇게 특별 대우를 해 주니까 너무 좋습니다.
여러분 은행에 차장 한 사람도 이렇게 알고 가까이 지내니까 좋은데 은행지점장이나 아예 은행장쯤 알고 가까이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큰 회사 회장님이나 시장님이나 대통령쯤 안다고 하면 너무 좋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오 만 왕의 왕이시오 최후의 재판을 담당할 심판주가 되시고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신 전지 전능하신 그 하나님을 알고 가까이 지낸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가까이에서 함께 있는 사람의 차이라는 것은 설명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전에 교회에 와 있으니까 좋은 줄을 몰라서 감사하지 못하고 감격해 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도망을 갈까 궁리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37편에 보면 바벨론 강가에서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 놓고 우는 사람들의 시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시온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수금을 치며 찬양을 드릴 때는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 몰랐지만
이렇게 성전에서 쫓겨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보니까 그 때가 얼마나 좋았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수금을 가지고 뭐하냐고 그 노래를 좀 불러 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쫓겨난 신세가 된 이 마당에 노래를 부른다고 그것이 무슨 노래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73:27-2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멀리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 가까이 나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렇게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다시 한 번 기억을 하시고 날마다 날마다 더 하나님께서 가까이 나아오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마음껏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