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6.6.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23)
본문 : 엡 2:7
제목 :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성경을 부분적으로 너무 깊이 파고들다가 보면 전체의 뜻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전체의 내용이 어떻게 흐르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요즈음 배우고 있는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10절까지는 함께 연결 지어서 해석해야 하는 단락입니다.
2장 1절부터 10절까지 전체의 내용을 대강 정리해 보겠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죄악된 인간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인생이었다고 했습니다.
죄와 허물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의 나쁜 풍속들을 쫓고
공중권세 잡은 사탄을 따라다니며 하나님께는 불순종하는 자가 되었고
육신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자기의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사람들이었다고 했습니다.
4-6절에는 인간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죄를 짓고 반항을 하고 불순종을 하고 미운 짓만을 골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푸셔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죄를 용서해 주셔서 다시 살리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10절까지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배은망덕 하여 벌을 받아야 마땅한 인생들을 예수님 안에 들어오게 하고 그런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7절 말씀에 보면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런 비참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면 모든 세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천하보다 더 귀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 은혜가 감사하다는 것을 늘 고백하고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1-6절의 말씀과 7-10절의 말씀을 이어 주는 접속사입니다.
문장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런 접속사를 잘 이해하는 것이 그 문장의 원 뜻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여기 "이는"이라는 접속사는 앞 단락의 목적을 설명하는 문장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신 목적은 이와 같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목적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불교용어에서 가장 많이 쓰는 용어 중에 하나가 자비라는 말일 것입니다.
불교에서 자비(慈悲)란 "남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자(慈),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을 비(悲)"라고 합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고 남들이 잘못됐다고 하면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자비로운 마음은 남이 기뻐할 때 진정으로 기뻐하고 남이 어려움을 당할 때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쓰는 자비란 조금 그 의미가 다릅니다.
물론 성경에서 자비라는 말도 우리 인간들이 자비롭다고 할 때는 나보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부드럽고 인자하고 친절하게 행동할 때 자비롭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비하시다고 할 때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베푸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불쌍히 여기다 라는 말은 남을 동정하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을 동정하는 것을 불쌍히 여긴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과 나인이라고 하는 성에 들어가셨는데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메고 나왔습니다.
그 죽은 사람은 그 동네에 사는 한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과부가 남편도 죽고 오직 외아들을 키우며 그 아들에게 소망을 두고 살았는데 그만 어먼 먼저 죽고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와 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살려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과부와 그 아들은 동정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부가 된 것도 잘은 모르지만 그 여자의 잘못으로 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들이 죽은 것도 자살을 한 것이 아니기에 일부러 죽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열심히 살고자 노력을 했지만 어쩌다가 불행한 사고를 당해서 그런 괴로움을 당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들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이럴 때 불쌍히 여긴다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둘째는 긍휼히 여기심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불쌍히 여긴다는 말보다 한단 계 더 깊이가 있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 대상이 동정의 여지가 있는 사람을 동정하는 것이라면 긍휼이 여긴다는 것은 동정을 받을 만한 여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고 다른 사람도 죽게하고 자신도 죽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 참 안됐다고 동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을 하면서 비웃으며 조금도 동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그런 스스로의 잘못에 의해서 남에게 피해를 입하고 자신도 피해를 입은 사람도 불쌍히 여기는 것을 긍휼히 여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때 쓰는 용어가 대부분 이 긍휼하심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조금도 동정을 받을 만한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주 악하고 아주 독한 아주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대하여 나쁜 사람인가를 알게 해 주는 예화가 성경에 소개되어 있습니다.(마21:33-)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설치를 하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가을이 되어서 세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더니 줘야 할 세는 안주고 오히려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쳐서 내어 쫓았다고 했습니다.
자꾸 종들을 보냈지만 보낼 때마다 그렇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종들을 보내니까 못 믿어서 그런가 보다 내 아들을 보내면 주인 아들이니까 설마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 하고 그 주인의 아들을 농장에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기를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인간들의 행위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예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 만물을 만들고 우리 인간들에게 맡겨 주셨는데
인간들이 이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는데 오히려 그 하나님의 아들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린 것이 인간들입니다.
아무리 변명을 하고 아무리 용서를 받으려고 해도 도저히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긍휼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가 오늘 본문의 자비하심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강도 만난 자의 비유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길을 가던 한 사마리아인이 그것을 보고 그냥 지나가지 않고 약을 발라주고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비를 대어주고 살게 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자비를 베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자비란 말을 우리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을 할 때는 범죄 타락한 우리 인생들에게 그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용서해 주시고 다시 그 지위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자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78편 38절 말씀에 보면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더 나아가서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셔서 죽고 멸망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지만 오히려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이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 즉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긍휼 그 자비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 백성이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지극히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범죄한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구원해 주신 것은 그 지극히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은혜란 말은 앞서 말씀 드린 불쌍히 여기심과 긍휼히 여기심 그리고 자비하심을 다 합한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은혜란 어떤 자격을 갖추고 어떤 목표에 도달하고 뭔가를 달성한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고 아무런 한 일도 없는 오히려 실패하고 좌절하고 범죄하고 낙망하고 아무런 공로도 한 일도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즉 아무런 한 일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비웃습니다.
아이고 저렇게 지질이도 못난 사람이 뭐 천당에 간다고 교회에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비웃습니다.
교회에 헌금할 돈이 있으면 부모님에게 효도나 하고 기도할 시간 있으면 열심히 노력해서 출세도 좀 하고 찬송 부르고 예배 드리고 그럴 시간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나 많이 해야 천당에 가는 것이지 그따위로 해 가지고 천당 간다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와 관계없이 베푸신 그 사랑을 알지 못해서 라는 것입니다.
3.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하심
오늘 본문 말씀에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타락하여 죽을 수 밖에 없고
죽은 다음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고 영원히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인생들 중에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은혜를 베푸셔서 다시 살려 주신 목적은
이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오는 여러 세대 사람들에게 나타내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교회 안에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처럼 부활 승천하여서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린다는 이 복음이 확고 부동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 복음이 변질이 되기 시작을 했습니다.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잡다한 교리들이 들어오기 시작을 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그저 명분만 있을 뿐이지 교회의 중심 교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노력을 하면 득도를 할 수 있고 고행과 수도를 통하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불교의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자 교회도 그들을 따르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뭔가 고행을 하고 수도를 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함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을 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를 무시하고 같잖게 여기는 아주 건방진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사람들이 양심을 가지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 부모와 자식간에 부부간에 가족간에 친구간에 할 도리를 다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라는 유교의 사상이 멀리 퍼지자 교회도 그런 인간관계 도덕 양심 이런 것을 중심으로 구원을 생각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물론 성경에 이런 인간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부모님을 치거나 저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도덕적인 삶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신비한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이상한 주문을 외우고 내일을 점치고 기적을 일으키고 하는 이상한 신비주의 종교들이 인기를 얻자 교회도 그들을 따라서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이적을 일으킴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을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비한 기적이나 이해할 수 없는 경이로운 현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나도 나도 특별히 잘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차별이 없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야 한다는 진보적 사회주의 사상이 판을 치자 교회도 어려운 이웃을 돕고 억울한 사람의 편에 서고 우리만 구원이 잇는 것처럼 잘난 척 하지 말고 모든 사람들을 인정하자 것이 교회가 할 일이다 라고 하기 시작을 합니다.
사람들은 별별 생각을 다하고
교회도 그들의 생각을 쫓아가는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진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는 죽어야 마땅하고 우리는 조금도 의로운 일을 하거나 선한 일을 할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한 인생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이 진리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족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지극하신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좋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엡 2:7
제목 :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성경을 부분적으로 너무 깊이 파고들다가 보면 전체의 뜻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전체의 내용이 어떻게 흐르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요즈음 배우고 있는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10절까지는 함께 연결 지어서 해석해야 하는 단락입니다.
2장 1절부터 10절까지 전체의 내용을 대강 정리해 보겠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죄악된 인간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인생이었다고 했습니다.
죄와 허물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의 나쁜 풍속들을 쫓고
공중권세 잡은 사탄을 따라다니며 하나님께는 불순종하는 자가 되었고
육신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자기의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사람들이었다고 했습니다.
4-6절에는 인간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죄를 짓고 반항을 하고 불순종을 하고 미운 짓만을 골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푸셔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죄를 용서해 주셔서 다시 살리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10절까지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배은망덕 하여 벌을 받아야 마땅한 인생들을 예수님 안에 들어오게 하고 그런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7절 말씀에 보면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런 비참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면 모든 세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천하보다 더 귀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 은혜가 감사하다는 것을 늘 고백하고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1-6절의 말씀과 7-10절의 말씀을 이어 주는 접속사입니다.
문장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런 접속사를 잘 이해하는 것이 그 문장의 원 뜻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여기 "이는"이라는 접속사는 앞 단락의 목적을 설명하는 문장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신 목적은 이와 같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목적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불교용어에서 가장 많이 쓰는 용어 중에 하나가 자비라는 말일 것입니다.
불교에서 자비(慈悲)란 "남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자(慈),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을 비(悲)"라고 합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고 남들이 잘못됐다고 하면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자비로운 마음은 남이 기뻐할 때 진정으로 기뻐하고 남이 어려움을 당할 때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쓰는 자비란 조금 그 의미가 다릅니다.
물론 성경에서 자비라는 말도 우리 인간들이 자비롭다고 할 때는 나보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부드럽고 인자하고 친절하게 행동할 때 자비롭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비하시다고 할 때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베푸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불쌍히 여기다 라는 말은 남을 동정하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을 동정하는 것을 불쌍히 여긴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과 나인이라고 하는 성에 들어가셨는데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메고 나왔습니다.
그 죽은 사람은 그 동네에 사는 한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과부가 남편도 죽고 오직 외아들을 키우며 그 아들에게 소망을 두고 살았는데 그만 어먼 먼저 죽고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와 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살려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과부와 그 아들은 동정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부가 된 것도 잘은 모르지만 그 여자의 잘못으로 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들이 죽은 것도 자살을 한 것이 아니기에 일부러 죽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열심히 살고자 노력을 했지만 어쩌다가 불행한 사고를 당해서 그런 괴로움을 당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들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이럴 때 불쌍히 여긴다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둘째는 긍휼히 여기심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불쌍히 여긴다는 말보다 한단 계 더 깊이가 있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 대상이 동정의 여지가 있는 사람을 동정하는 것이라면 긍휼이 여긴다는 것은 동정을 받을 만한 여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고 다른 사람도 죽게하고 자신도 죽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 참 안됐다고 동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을 하면서 비웃으며 조금도 동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그런 스스로의 잘못에 의해서 남에게 피해를 입하고 자신도 피해를 입은 사람도 불쌍히 여기는 것을 긍휼히 여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때 쓰는 용어가 대부분 이 긍휼하심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조금도 동정을 받을 만한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주 악하고 아주 독한 아주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대하여 나쁜 사람인가를 알게 해 주는 예화가 성경에 소개되어 있습니다.(마21:33-)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설치를 하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가을이 되어서 세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더니 줘야 할 세는 안주고 오히려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쳐서 내어 쫓았다고 했습니다.
자꾸 종들을 보냈지만 보낼 때마다 그렇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종들을 보내니까 못 믿어서 그런가 보다 내 아들을 보내면 주인 아들이니까 설마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 하고 그 주인의 아들을 농장에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기를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인간들의 행위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예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 만물을 만들고 우리 인간들에게 맡겨 주셨는데
인간들이 이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는데 오히려 그 하나님의 아들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린 것이 인간들입니다.
아무리 변명을 하고 아무리 용서를 받으려고 해도 도저히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긍휼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가 오늘 본문의 자비하심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강도 만난 자의 비유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길을 가던 한 사마리아인이 그것을 보고 그냥 지나가지 않고 약을 발라주고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비를 대어주고 살게 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자비를 베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자비란 말을 우리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을 할 때는 범죄 타락한 우리 인생들에게 그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용서해 주시고 다시 그 지위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자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78편 38절 말씀에 보면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더 나아가서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셔서 죽고 멸망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지만 오히려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이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 즉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긍휼 그 자비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 백성이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지극히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범죄한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구원해 주신 것은 그 지극히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은혜란 말은 앞서 말씀 드린 불쌍히 여기심과 긍휼히 여기심 그리고 자비하심을 다 합한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은혜란 어떤 자격을 갖추고 어떤 목표에 도달하고 뭔가를 달성한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고 아무런 한 일도 없는 오히려 실패하고 좌절하고 범죄하고 낙망하고 아무런 공로도 한 일도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즉 아무런 한 일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비웃습니다.
아이고 저렇게 지질이도 못난 사람이 뭐 천당에 간다고 교회에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비웃습니다.
교회에 헌금할 돈이 있으면 부모님에게 효도나 하고 기도할 시간 있으면 열심히 노력해서 출세도 좀 하고 찬송 부르고 예배 드리고 그럴 시간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나 많이 해야 천당에 가는 것이지 그따위로 해 가지고 천당 간다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와 관계없이 베푸신 그 사랑을 알지 못해서 라는 것입니다.
3.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하심
오늘 본문 말씀에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타락하여 죽을 수 밖에 없고
죽은 다음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고 영원히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인생들 중에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은혜를 베푸셔서 다시 살려 주신 목적은
이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오는 여러 세대 사람들에게 나타내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교회 안에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처럼 부활 승천하여서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린다는 이 복음이 확고 부동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 복음이 변질이 되기 시작을 했습니다.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잡다한 교리들이 들어오기 시작을 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그저 명분만 있을 뿐이지 교회의 중심 교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노력을 하면 득도를 할 수 있고 고행과 수도를 통하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불교의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자 교회도 그들을 따르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뭔가 고행을 하고 수도를 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함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을 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를 무시하고 같잖게 여기는 아주 건방진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사람들이 양심을 가지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 부모와 자식간에 부부간에 가족간에 친구간에 할 도리를 다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라는 유교의 사상이 멀리 퍼지자 교회도 그런 인간관계 도덕 양심 이런 것을 중심으로 구원을 생각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물론 성경에 이런 인간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부모님을 치거나 저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도덕적인 삶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신비한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이상한 주문을 외우고 내일을 점치고 기적을 일으키고 하는 이상한 신비주의 종교들이 인기를 얻자 교회도 그들을 따라서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이적을 일으킴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을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비한 기적이나 이해할 수 없는 경이로운 현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나도 나도 특별히 잘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차별이 없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야 한다는 진보적 사회주의 사상이 판을 치자 교회도 어려운 이웃을 돕고 억울한 사람의 편에 서고 우리만 구원이 잇는 것처럼 잘난 척 하지 말고 모든 사람들을 인정하자 것이 교회가 할 일이다 라고 하기 시작을 합니다.
사람들은 별별 생각을 다하고
교회도 그들의 생각을 쫓아가는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진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는 죽어야 마땅하고 우리는 조금도 의로운 일을 하거나 선한 일을 할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한 인생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이 진리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족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지극하신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좋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