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5.2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21)
본문 : 엡 2:4-5
제목 : 그러나 하나님은
초등학교 3학년 국어책의 참고서를 보면 문장과 문장의 사이에 넣는 접속사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 문장이 원인을 말하고 다음 문장이 그 결과를 말할 때 접속사는 "그래서"입니다.
"철수가 나를 욕했다 그래서 한대 때렸다"
앞에 문장의 원인에 대해서 반대로 그 결과가 나올 때 쓰는 접속사는 "그러나"입니다.
"철수가 나를 욕했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문장의 내용을 이해함에 있어서 접속사를 잘 이해함으로서 그 문장이 말하는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접속사를 공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성경이 번역을 하면서 가끔 이 접속사 번역을 생략한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 접속사를 번역하지 않아도 전체적인 내용과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생략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접속사들을 앎으로서 그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잇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그런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번역되지 않은 접속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호 데 데오스(ο δε θεοs)"로 시작을 합니다.
번역을 하면 "그러나 하나님은"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그러나"는 앞에 나오는 1-3절까지와 4-5절을 연결해 주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나"는 앞의 문장의 원인을 뒤에 문장에 반대되는 결과를 나타낼 때 쓰는 접속사입니다.
1-3절의 말씀은 이미 여러분이 다 배워서 알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은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 가운데서 행하여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사탄의 지시를 따라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육체와 마음의 욕심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을 잘 됐다고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반항하고 범죄하여 진노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오히려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군에 가 보신 분들은 아마 다 당해 보셨을 것입니다.
입대한지 오래된 군인을 고참이라고 하는데 고참이 고참 대우를 받으려고 하면 마음이 착해서는 안됩니다.
가끔 후배들을 집합을 시키고 고약한 척 해야 후배들이 "아 이 사람은 잘 못 대했다가는 큰 일 나겠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잘 대접을 해 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잘 대해주면 오히려 뭘 모르는 순진한 사람으로 취급을 하고 아무렇게나 홀대하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이 순해서 졸병들에게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대할 때까지 제 빨래는 제가 했고 발 씻는 물도 제가 떠다가 씻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조물주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광을 받고 대접을 받기에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이 많으신 순하신 분으로만 생각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너무 크시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무서운 분이시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힘이 없고 순하기만 하시고 뭘 모르셔서 그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으로 대해주시기는 하시지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공의 하나님이시며 범죄하는 자에게 진노하시는 분임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1)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실까 할 때 제일 먼저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주권이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누구와 상의를 하거나 조언을 받지 않으시고 전적으로 하나님 뜻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는 일도 하나님의 법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절대라는 말은 상대적이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상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의무를 다했을 때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고
상대방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 자신의 행동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하든지 못하든지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왜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따질 수가 없습니다.
2)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고 할 때 우리 인간과는 뚜렷이 구별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죄에 대해서 말할 때 하나님은 죄가 조금도 없으시고 죄를 싫어하시고 미워하시고 죄지은 자는 반드시 심판을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말을 할 때는 나 자신도 죄를 짓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인 주제에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시고 또 죄를 미워하시고 범죄한 자는 꼭 벌을 받도록 정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범죄한 인간들을 처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하고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3)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
사람들이 죄를 지어도 죄지을 때마다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서 징벌을 하시거나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 정도로 죄지은 사람들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잘 사니까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아 죄를 지어도 괜찮구나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지 않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죄 지은 자를 무조건 용서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좀 시간을 주셔서 회개하도록 기다리기는 하시고 그 벌을 내리는 시기가 대부분 이 세상을 떠날 때 심판을 하시고 징벌을 하실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절대주권을 가지고 우리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죄를 무엇보다도 싫어하시는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범죄한 자에게 꼭 벌을 내리시고 진노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인생들이 하나님이 이러한 분이신 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너그러우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너무나 강력하게 진노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렇게 미워하는 죄를 지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은혜를 바르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2.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럴 만한 이유와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은 그 혜택을 받은 우리의 모습이 그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앎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거룩하심과 진노하심을 알면 알수록 더 큰 감동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알면 알수록 그 은혜가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1)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지은 죄와 허물 때문에 죽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은혜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은 사람이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자신을 되살리는 일이란 도무지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라야 투쟁도 하고 노력도 하고 안될지라도 몸부림이라도 쳐 보는 것이지만 죽은 다음에야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2)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은 그 마음에 죄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성은 사탄이 주는 것이고 죄를 많이 짓는 사람일 수록 그 마음은 이미 사탄의 노예가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유난히 바르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인간의 마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속에 사탄의 영이 자리를 잡고 그의 마음의 주인이 되어서 조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술이나 마약이나 주변환경이나 어렸을 때의 좋지 않은 경험이나 이런 환경들 때문에 죄를 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환경들 때문만은 아니고 그 환경을 통해 역사하는 사탄의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 마음에 성령님의 역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같은 환경 속에서도 범죄하지 않고 바르게 살기 때문입니다.
3)우리는 죄에 대해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죽었다, 죄의 노예가 되었다, 이미 죄에 대해서 사형언도를 받았다...이런 말들은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이며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신분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리에서는 이를 "전적인 타락"이라는 말로 쓰는데 마치 63빌딩 옥상에서 떨어져서 형체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비참한 모습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대한 것처럼 살지만 작은 병균하나에 시달리고 아프고 늙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서글픈 것이 인생일 뿐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본래의 신분을 아는 것은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알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살기 위한 것입니다.
3.왜 그렇게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을 가지시고 전지 전능하시며 거룩하시며 죄를 그렇게 미워하시고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철저히 타락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1)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긍휼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반대입장을 취하는 자에게 베푸는 은총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최소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에게 호의을 베풉니다.
그러나 사사건건 우리와 반대의견을 가지고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불순종하고 반대하고 반항하고 잘난 척하고 교만한 인생들을 그에 응당한 처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을 만한 여지가 조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 그것을 긍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의 속성으로만 보시면 모든 인간들이 다 진노의 대상이요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 크기로 말하면 한없이 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한량이 없으신 사랑 무한하신 사랑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가 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3)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바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말 중에서, 그가 우리에게 해 주고 싶은 말 가운데서 가장 으뜸을 차지하고 있는 말이 바로 이 은혜라는 말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물론이고 이후의 말씀에도 이 은혜라는 말이 아주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7절 말씀에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이라고 했습니다.
8절에도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했습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셔야 할만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거나 혹은 우리에게 좀 남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 원인을 나 자신의 잘남에서 찾아보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은혜란 말은 조금도 우리에게서 그런 공로나 잘난 점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사랑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가끔 어려움을 당할 때 왜 내가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데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일까 라고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 속에 나 자신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만 해도 감사할 일입니다.
만약에 내 자신의 공로나 어떤 자격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런 불평을 할 수 있겠지만 받을 만한 자격에 없는 처지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이상 더 하나님께 요구할 권한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후에 우리를 좋은 길로 형통한 길로 인도를 하시기는 하지만 그것이 보장이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죽었고 사탄의 노예가 되었고 이미 형벌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긍휼하심과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엡 2:4-5
제목 : 그러나 하나님은
초등학교 3학년 국어책의 참고서를 보면 문장과 문장의 사이에 넣는 접속사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 문장이 원인을 말하고 다음 문장이 그 결과를 말할 때 접속사는 "그래서"입니다.
"철수가 나를 욕했다 그래서 한대 때렸다"
앞에 문장의 원인에 대해서 반대로 그 결과가 나올 때 쓰는 접속사는 "그러나"입니다.
"철수가 나를 욕했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문장의 내용을 이해함에 있어서 접속사를 잘 이해함으로서 그 문장이 말하는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접속사를 공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성경이 번역을 하면서 가끔 이 접속사 번역을 생략한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 접속사를 번역하지 않아도 전체적인 내용과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생략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접속사들을 앎으로서 그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잇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그런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번역되지 않은 접속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호 데 데오스(ο δε θεοs)"로 시작을 합니다.
번역을 하면 "그러나 하나님은"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그러나"는 앞에 나오는 1-3절까지와 4-5절을 연결해 주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나"는 앞의 문장의 원인을 뒤에 문장에 반대되는 결과를 나타낼 때 쓰는 접속사입니다.
1-3절의 말씀은 이미 여러분이 다 배워서 알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은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 가운데서 행하여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사탄의 지시를 따라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육체와 마음의 욕심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을 잘 됐다고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반항하고 범죄하여 진노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오히려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군에 가 보신 분들은 아마 다 당해 보셨을 것입니다.
입대한지 오래된 군인을 고참이라고 하는데 고참이 고참 대우를 받으려고 하면 마음이 착해서는 안됩니다.
가끔 후배들을 집합을 시키고 고약한 척 해야 후배들이 "아 이 사람은 잘 못 대했다가는 큰 일 나겠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잘 대접을 해 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잘 대해주면 오히려 뭘 모르는 순진한 사람으로 취급을 하고 아무렇게나 홀대하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이 순해서 졸병들에게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대할 때까지 제 빨래는 제가 했고 발 씻는 물도 제가 떠다가 씻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조물주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광을 받고 대접을 받기에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이 많으신 순하신 분으로만 생각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너무 크시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무서운 분이시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힘이 없고 순하기만 하시고 뭘 모르셔서 그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으로 대해주시기는 하시지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공의 하나님이시며 범죄하는 자에게 진노하시는 분임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1)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실까 할 때 제일 먼저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주권이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누구와 상의를 하거나 조언을 받지 않으시고 전적으로 하나님 뜻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는 일도 하나님의 법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절대라는 말은 상대적이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상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의무를 다했을 때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고
상대방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 자신의 행동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하든지 못하든지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왜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따질 수가 없습니다.
2)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고 할 때 우리 인간과는 뚜렷이 구별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죄에 대해서 말할 때 하나님은 죄가 조금도 없으시고 죄를 싫어하시고 미워하시고 죄지은 자는 반드시 심판을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말을 할 때는 나 자신도 죄를 짓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인 주제에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시고 또 죄를 미워하시고 범죄한 자는 꼭 벌을 받도록 정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범죄한 인간들을 처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하고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3)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
사람들이 죄를 지어도 죄지을 때마다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서 징벌을 하시거나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 정도로 죄지은 사람들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잘 사니까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아 죄를 지어도 괜찮구나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지 않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죄 지은 자를 무조건 용서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좀 시간을 주셔서 회개하도록 기다리기는 하시고 그 벌을 내리는 시기가 대부분 이 세상을 떠날 때 심판을 하시고 징벌을 하실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절대주권을 가지고 우리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죄를 무엇보다도 싫어하시는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범죄한 자에게 꼭 벌을 내리시고 진노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인생들이 하나님이 이러한 분이신 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너그러우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너무나 강력하게 진노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렇게 미워하는 죄를 지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은혜를 바르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2.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럴 만한 이유와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은 그 혜택을 받은 우리의 모습이 그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앎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거룩하심과 진노하심을 알면 알수록 더 큰 감동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알면 알수록 그 은혜가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1)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지은 죄와 허물 때문에 죽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은혜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은 사람이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자신을 되살리는 일이란 도무지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라야 투쟁도 하고 노력도 하고 안될지라도 몸부림이라도 쳐 보는 것이지만 죽은 다음에야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2)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은 그 마음에 죄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성은 사탄이 주는 것이고 죄를 많이 짓는 사람일 수록 그 마음은 이미 사탄의 노예가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유난히 바르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인간의 마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속에 사탄의 영이 자리를 잡고 그의 마음의 주인이 되어서 조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술이나 마약이나 주변환경이나 어렸을 때의 좋지 않은 경험이나 이런 환경들 때문에 죄를 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환경들 때문만은 아니고 그 환경을 통해 역사하는 사탄의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 마음에 성령님의 역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같은 환경 속에서도 범죄하지 않고 바르게 살기 때문입니다.
3)우리는 죄에 대해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죽었다, 죄의 노예가 되었다, 이미 죄에 대해서 사형언도를 받았다...이런 말들은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이며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신분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리에서는 이를 "전적인 타락"이라는 말로 쓰는데 마치 63빌딩 옥상에서 떨어져서 형체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비참한 모습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대한 것처럼 살지만 작은 병균하나에 시달리고 아프고 늙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서글픈 것이 인생일 뿐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본래의 신분을 아는 것은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알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살기 위한 것입니다.
3.왜 그렇게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을 가지시고 전지 전능하시며 거룩하시며 죄를 그렇게 미워하시고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철저히 타락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1)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긍휼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반대입장을 취하는 자에게 베푸는 은총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최소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에게 호의을 베풉니다.
그러나 사사건건 우리와 반대의견을 가지고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불순종하고 반대하고 반항하고 잘난 척하고 교만한 인생들을 그에 응당한 처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을 만한 여지가 조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 그것을 긍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의 속성으로만 보시면 모든 인간들이 다 진노의 대상이요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 크기로 말하면 한없이 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한량이 없으신 사랑 무한하신 사랑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가 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3)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바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말 중에서, 그가 우리에게 해 주고 싶은 말 가운데서 가장 으뜸을 차지하고 있는 말이 바로 이 은혜라는 말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물론이고 이후의 말씀에도 이 은혜라는 말이 아주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7절 말씀에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이라고 했습니다.
8절에도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했습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셔야 할만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거나 혹은 우리에게 좀 남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 원인을 나 자신의 잘남에서 찾아보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은혜란 말은 조금도 우리에게서 그런 공로나 잘난 점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사랑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가끔 어려움을 당할 때 왜 내가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데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일까 라고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 속에 나 자신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만 해도 감사할 일입니다.
만약에 내 자신의 공로나 어떤 자격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런 불평을 할 수 있겠지만 받을 만한 자격에 없는 처지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이상 더 하나님께 요구할 권한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후에 우리를 좋은 길로 형통한 길로 인도를 하시기는 하지만 그것이 보장이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죽었고 사탄의 노예가 되었고 이미 형벌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긍휼하심과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