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6.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70)
본문 : 행 13:17-19
제목 :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7.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서울대 공대 이정동 교수라는 분이 “축적의 시간”, “축적의 길”이라는 책을 쓰고 그것을 주제로 텔레비전에 나와서 특강도 했습니다. 우리 한국의 산업계는 ‘개념설계 역량’이라는 것이 부족해서 위기를 맞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개념설계 역량은 축적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축적의 길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개념설계란 무엇을 계획함에 있어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짜서 새로운 것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것을 더 깊이 있게 연구하여 강화시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 개념설계는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노력하고 또 노력을 하고 실패를 경험하고 또 도전하고 해서 기술을 축적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문제도 이와 비슷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어디서 새로운 것을 가지고 와서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을 알고 그것을 꾸준히 노력을 하고 또 노력을 하여서 축적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해서 새롭게 쉽게 빠르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을 노력을 통해서 체험을 통해서 실패를 통해서 이루어나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서 기발한 아이디어로 수많은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서 시행을 했습니다. 전도 프로그램, 성경공부 프로그램, 기도프로그램, 이런저런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서 실행을 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이런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참 좋아해서 우리나라에 개발된 프로그램은 다 그 세미나에 가서 교육을 받고 교회에서 실행을 했습니다.
세미나에 가서 교육을 받고 올 때는 이 프로그램이야 말로 최고의 프로그램이고 이 프로그램만 실행하면 교회도 부흥하고 성도들도 더 열심을 낼 것이라고 진행을 합니다. 그런데 조금 해 보면 생각대로 잘 안 되고 그냥 시들시들 해지고 또 다른 프로그램을 찾고 또 하다가 시들해지면 또 다른 프로그램을 찾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그런 프로그램만 개발을 하다가 보니까 정작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립니다. 교회가 왜 존재하고 있는지 교회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 근본적인 것을 놓쳐버리고 엉뚱한 일을 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교회에 옵니까? 왜 우리가 예수님을 믿습니까?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런 중요한 일 핵심적인 일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먼저 발견해야 할 것이 신앙의 근본개념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그 근본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것을 우리의 삶에 실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실패한 사람들의 경험들을 살펴보고 실패하지 않고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실패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에 실패를 통해서 경험을 쌓으면서 더 나은 신앙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새로운 활동을 개발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근본핵심을 바르게 알고 그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 시간부터 바울의 설교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1차 전도여행 중에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회당에 들어가서 그들이 읽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실패와 실패를 한 그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보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지난주에 살펴본 1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라고 했습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귀중한 일을 시작하셨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불러서 인류구원이라는 위대한 일을 시작하셨는데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는 위대한 일을 잘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가나안 땅에서 살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고 그 후손들이 아예 애굽으로 내려가서 거기서 살게 되었습니다. 흉년을 만나 그들이 생각하기에 살기가 좋아 보이는 애굽으로 피난을 갔다가 아예 거기서 살게 되었습니다.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이라고 했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 70여명이 가나안 땅의 흉년을 피해서 애굽으로 와서 살았습니다. 요셉을 미리 보내서 총리대신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쉽게 이주를 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애굽 땅에 와서 400여년을 사는 동안 그들은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애굽을 떠나올 때 장정만 60만 명이라고 했으니까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2백만 명이 넘을 정도의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와서 큰 민족을 이루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든지 애굽에 와서 그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200만의 큰 민족으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 성경들은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성장한 면을 강조합니다. ‘강대한 민족으로’(공동번역), ‘이 백성을 높여 주시고’(새번역). ‘큰 민족이 되게 하셨으며’(현대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가나안 땅에서 살지 않고 애굽으로 왔지만 애굽으로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강대한 민족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긍정적인 면으로 봅니다. 인간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의 업적을 높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애굽에 와서 큰 민족을 이룬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읽은 개역개정이나 이전의 성경 개역한글에서는 부정적인 면 즉, 애굽에서 나그네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래 헬라어성경에서도 나그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나그네로 번역을 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 와서 큰 민족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봤자 나그네와 같이 임시로 살았던 것이지 거기서 머물러 살 민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지금과 같은 민족을 이루었을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애굽으로 왔기 때문에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룬 것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라고 했습니다. 나그네 된 백성을 높였다는 것은 나그네 되었을 때 그들이 낮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출애굽기를 읽어보신 분들이니까 잘 아시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가를 아실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서 대우를 받고 산 것이 아니라 애굽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고 힘든 일을 하게하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 하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사내아이를 낳으면 나일 강에 던져서 죽게 하는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고된 노동과 비참함을 당한 후에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그 비참한 신분에서 높여주시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세워주시고 그 비참함에서 탈출시켜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불러내서 따로 구별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꾸 세상으로 나가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으로 나간 결과는 늘 뻔합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서 헤어나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삽니다. 그런 비참한 삶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또 건져내서 따로 세워두면 또 세상에 가서 사탄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참한 세상에서 영원히 멸망 길로 달려가는 인생에서 사탄의 노예가 되어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신세에서 우리를 높여서 다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게 해 주셨으면 그냥 세상 기웃거리지 말고 거기서 사세요. 왜 자꾸 세상을 보며 세상을 기웃거리며 사세요?
보따리 싸가지고 산속으로 들어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차피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이 세상에서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지 말자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도 모르고 이 세상만 있는 줄 알고 사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지 말자는 것입니다. 가는 목적지가 다르고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데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한 무리 즉 성도답게 살자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믿는 사람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지키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최선의 일로 여기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 하나님나라 교회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의 일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일에 앞장을 서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본문 18절 말씀에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 애굽에서 종노릇 하는데서 기적적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가는 길에 광야를 통과하게 됩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은 걸어서 일주일이면 갈만한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주일 길을 40년 동안 빙빙 돌아서 가게 되었습니다. 400여년을 하나님을 떠나서 살던 사람들을 다시 가나안으로 이끌고 가시면서 그들을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광야 길을 가는 동안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 알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시고 믿음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광야 같은 어렵고 힘든 길을 가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주실 가나안 땅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힘차게 가면 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를 읽어보시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치사한 인간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적들을 얼마나 많이 체험을 했습니까? 애굽 왕 바로가 안 보내주려고 몇 번이나 약속을 번복을 하고 붙잡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이적을 보여주시면서 바로의 강판한 마음을 꺾으시고 탈출을 시켜주셨습니다.
나가라고 해놓고도 금방 마음이 바뀌어서 군사를 이끌고 말을 달려서 뒤쫓아 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지의 길처럼 지나가게 하시고 애굽의 군사들은 물에 수장을 시켜버리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일을 체험을 했다면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보고 여러분 자신이 그렇게 구출을 받았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그 은혜를 평생 감사하고 그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즉각 따르고 그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좀 힘들고 어렵고 마음에 안 들어도 순종하면서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짓을 보면 정말로 한심합니다. 물이 없으니까 물이 없다, 먹으로 것이 없다, 나중에는 고기가 먹고 싶다. 별별 것을 다 요구하면서 원망불평을 합니다. 애굽에서 종노릇을 할지라도 거기서 고기라도 얻어먹으면서 살다가 죽었으면 좋을 텐데 왜 광야로 끓어내서 고생을 시키느냐 애굽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로 끌고 와서 죽이려고 하느냐 별별 원망을 다합니다.
광야에 물이 없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먹을 것도 없고 고기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면 하나님께 달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주실 텐데 원망부터하고 불평부터 쏟아놓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일주일만 참으면 광야 길을 벗어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거기 들어가면 남들이 지어놓은 집에 들어가서 살 것이고, 남들이 심고 길러놓은 나무의 과실을 먹게 될 것인데 그 조금을 못 참아서 원망하고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소행을 참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정도 되면 누구 말대로 막가자는 것이고 더 이상 하나님이고 구원이고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도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마음 같으면 구원이고 뭐고 다 취소해버리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뭐고 소용이 없습니다. 택한 백성이고 뭐고 소용없고 다 멸망시켜버리고 다시 시작을 하셔도 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행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이 소중한 일이셨기 때문에 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하셨기 때문에 참으시고 계속 그 일을 진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일은 포기하시지 않으셨지만 원망하고 불평한 사람들은 모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실 엄청난 복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구원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출애굽하여 광야로 온 사람들 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다른 민족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주로 원망이 시작됐습니다. 섞여 있던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고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과 고기를 먹고 싶다고 원망을 시작하자 이스라엘 백성들도 덩달아서 함께 원망을 했습니다.(민11장 참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입에서는 늘 감사와 찬양이 나와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은 선택을 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에게서나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위치는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서 살고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에서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탈출을 해서 영원한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광야와 같은 세상입니다.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고기는 더더욱 없는 곳입니다.
그래도 참고 이 길을 가는 것은 영원한 가나안 땅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배고프면 어떻습니까? 좀 목마르면 어떻습니까? 좀 즐거운 일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조금만 참으면 영원한 생명이 있는 나라에서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인데 나그네와 같은 잠깐의 세월 좀 못살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귀한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원망하고 불평을 합니다.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고, 좋은 차타고, 좋은 것 먹으며, 좋은 곳에 여행도 다니고 싶다고 하면서 그렇게 살지 못함을 불평하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큰 은혜를 거두어가시고 싶진 않으실까요?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그런 소행을 참으시고 영원한 가나안 땅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끝까지 붙잡고 그 나라까지 들어가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세상을 뒤돌아보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원망과 불평이 영원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련하게 가나안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가서 그들의 노예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잊지 않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은 계속을 하셨지만 계속해서 원망하고 불평하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사실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잊지 마시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광야처럼 어려운 세상이지만 참고 견디면서 영원한 가나안 땅 천국까지 끝까지 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