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5.2.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18)
본문 : 엡 2:1
제목 :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우리 나라에 유명한 대승이 한 분 있는데 이분은 이분은 30년 동안 면벽을 하면서 도를 닦았다고 합니다.
'면벽했다'는 말이 무엇인지 잘 모르시지요 면벽은 드러눕지도 않고 앉은 자세로 참선하고 벽만 바라보고 도를 닦는 것을 말합니다.
눕지도 않고 앉아서 밥도 먹도 잠도 잤다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도 힘들겠는데, 30년 동안 이 면벽 수행생활을 하면서 도를 닦았으니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의 어떤 유명한 종교철학자 한 분이 이 스님 만나기를 소원했습니다.
당신이 30년 동안 면벽하면서 깨달은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궁금해서 5년 동안이나 편지를 보내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계속 거절을 당했는데, 드디어 이 대승이 승낙을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반갑고 기뻤겠습니까? 5년 동안 만나기를 사모한 분이기 때문에 바로 통역을 데리고 비행기로 날아서 한국에 왔습니다.
그 절까지 걸어서 올라갑니다. 그런데 어떤 바위 위에 어떤 한 분이 앉아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분이라 생각한 그 박사는 가까이 갔습니다.
그랬는데, 그 대승은 돌아보지도 않고 한마디 말을 했답니다.
"당신도 죽었고, 나도 죽었소!"
그 말 한마디를 하고는 절 안으로 들어가서는 다시는 안 만나 주더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끼리 말해 봐야 무슨 소용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러나 그 철학자는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 인생은 죽는 것이구나!
여러분, 인생이 무엇입니까? 물으려고 뛰어온 사람에게 "인생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승이 깨달은 것은 진실입니다.
과연 그로서는 30년 동안에 연구하고 묵상하고 궁구하고 살폈지만, 얻은 진리를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 뿐입니다. 이것을 연구하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죽지만, 이 엄연한 사실, 죽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인생이 사망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욕심을 다 가지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 사망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왜 인생이 죽습니까?라는 질문 앞에 대답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30년 아니라, 인생 역사 수 천년 동안에 여러 종교, 사상에서 이를 알려고 했지만 이를 알 길이 없습니다.
더욱 이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길은 그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어렵습니다.
고민하고 애를 쓰지만, 아무도 이 원인을 알지도 못하고, 또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히 인생이 죽음문제를 가지고 논하는 것 자체가 짧고 덧 없는 인생을 더 슬프게 만들고 심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 사망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를 피합니다.
오직 사는 문제만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인생의 깊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작한 종교들이 이제는 어떻게 하면 복 받고, 이 세상에서 더 오래 살며, 더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영원을 해결하지 않고 인생에게 참된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 30년을 고행하지 않아도, 고행으로 수련을 하지 않아도 어린 주일학생이라도 이를 잘 압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의 해답이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이 한 절 짧은 말씀에 인생들이 그렇게 고민하고 궁구하던 문제 해결이 다 들어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은 보면서 불쌍한 생각을 갖지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의 연수가 얼마가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5-60년 남았습니까? 아니면 3-40년 남았습니까? 앞으로 10, 20년을 더 살 것 같습니까?
세상을 조금 길게 사느냐? 짧게 사느냐의 차이 뿐이지 우리 모두는 그리 길지 않은 생명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멀쩡하게 차려 입고 점잖은 것처럼 앉아 있지만 우리 속에는 죄가 자리잡고 있고 그 죄 때문에 하루하루를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죽게 된다는 것 그 죽음의 원인은 우리가 지은 죄와 허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1)허물과 죄로 인해 죽음이 왔습니다.
'허물'은 문자적으로 '정로'(正路)에서 떨어지다'라는 의미로 부주의하여 진리에서 떠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죄'는 문자적으로 '과녁에서 벗어나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생의 목표를 정확히 맞추지 못한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허물과 죄라는 말은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정도에서 벗어나고 목표에서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만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죽음이 인간들에게 찾아 왔습니다.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시고 인간들을 위하여 살기 좋은 우주 만물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대항하고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에 죽음이라는 비참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잘 읽어 보면 이런 죄와 허물 때문에 인간이 죽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 큰 사건이 노아홍수 사건입니다.
노아시대 때 사람들의 죄는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간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홍수로 죽임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살 던 사람들의 죄악상 때문에 그 성들이 불로 멸망을 당했던 것을 보아도 죄는 죽음을 가져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멸망을 당할 때도 말할 수 없이 비참했습니다만 남 유다가 범죄하여 멸망을 당할 때는 너무나 비참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 라는 사람이 유다의 왕이 되었는데 그가 왕이 되어서 한 행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라고 했습니다.
여호야김 이후에 그 아들 여호야긴과 여호야김의 조카 시드기야가 왕이 되었는데 이 두 사람 다 여호야김을 본받아서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바벨론을 이용해서 유다 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참으로 비참하게 망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과 왕궁 모든 귀인의 집들이 다 불타 없어지고 성벽도 무너지고 시드기야 왕의 아들들은 아버지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히고 쇠 사슬로 결박을 당하여 끌려가고 백성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 가는 참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비참한 역사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1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에 죽는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다 죄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로마서 5장 12절에도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그 형벌로 죽음이라는 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세 가지의 죽음
성경에서 죽음이라고 할 때 세 가지의 죽음을 말하는 것임을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우리 이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의 육신이 영혼과 분리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영혼의 죽음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고통스러운 지옥에 던져지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영과 육이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렇게 세가지로 볼 때 우리의 영혼은 이미 죽임을 당한 상태이고 육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으며 이 세상이 마감 되는 날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미 우리의 죄 때문에 영혼이 죽었고 육신도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에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고 영원한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모든 것이 죽은 상태였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와 허물로 인해서 이미 죽었고 죽어가고 있고 죽게 될 운명에 처한 불쌍한 인생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우리의 과거의 불쌍한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과거를 바르게 알 때 지금 우리를 살려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스런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바르게 알지 못하는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이 말씀을 이렇게 강조하는 의미도 거기에 있습니다.
뒤에 말씀을 드리겠지만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산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이렇게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렇게 비참한 상태로 죽어가고 마는 허무한 인생이었음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2.살리심을 받은 사람
본문에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던 너희를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렇게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들을 살리려 오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려 오심을 단적으로 잘 보여 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 12장에 기록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그것입니다.
베다니라는 동네에 오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오빠의 이름은 나사로였고 그 누이 동생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즉시로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기도 전에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들은 나사로를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곳에 오셨을 때는 이미 장사한지 4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집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기위해 모여들어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은 굴이었으며 그 문은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자 모든 사람들은 의아해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마르다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말씀 드리기를 "예수님 이미 죽은지가 4일이 되어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씀 드리며 돌을 옮기지 말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때까지도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실 것 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다시 마르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 말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라고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 하시자 마르다는 그제서야 돌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부르시니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얼굴은 수건으로 싸인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절을 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금방 죽은 자를 살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미 몸이 다 썩어서 흐물거리며 냄새가 나는데 그 온 몸이 회복 되어가지고 살아서 걸어 나오는 나사로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찌 기절할 정도로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나사로처럼 이미 죽어 썩어져 냄새가 나는 나사로처럼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죽고 썩어 가고 있는 나 자신이 살아나겠다고 몸부림을 칠 수도 없고 쳐 보아도 별 볼일이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살려 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이미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 앞에 절망하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내 말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신 것은 이미 죽어 있는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실을 믿는 우리를 살려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우리를 살게 하신 것이 아니고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스스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주시고 우리의 노력으로 생명을 찾게 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살려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 사랑하심과 은혜로 우리는 이미 사리심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혼이 새 생명을 받고 이미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도 죽기는 하지만 부활하게 해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나라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이미 죽은 우리를 살려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새로 받은 이 새 생명을 소중히 여기면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 엡 2:1
제목 :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우리 나라에 유명한 대승이 한 분 있는데 이분은 이분은 30년 동안 면벽을 하면서 도를 닦았다고 합니다.
'면벽했다'는 말이 무엇인지 잘 모르시지요 면벽은 드러눕지도 않고 앉은 자세로 참선하고 벽만 바라보고 도를 닦는 것을 말합니다.
눕지도 않고 앉아서 밥도 먹도 잠도 잤다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도 힘들겠는데, 30년 동안 이 면벽 수행생활을 하면서 도를 닦았으니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의 어떤 유명한 종교철학자 한 분이 이 스님 만나기를 소원했습니다.
당신이 30년 동안 면벽하면서 깨달은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궁금해서 5년 동안이나 편지를 보내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계속 거절을 당했는데, 드디어 이 대승이 승낙을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반갑고 기뻤겠습니까? 5년 동안 만나기를 사모한 분이기 때문에 바로 통역을 데리고 비행기로 날아서 한국에 왔습니다.
그 절까지 걸어서 올라갑니다. 그런데 어떤 바위 위에 어떤 한 분이 앉아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분이라 생각한 그 박사는 가까이 갔습니다.
그랬는데, 그 대승은 돌아보지도 않고 한마디 말을 했답니다.
"당신도 죽었고, 나도 죽었소!"
그 말 한마디를 하고는 절 안으로 들어가서는 다시는 안 만나 주더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끼리 말해 봐야 무슨 소용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러나 그 철학자는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 인생은 죽는 것이구나!
여러분, 인생이 무엇입니까? 물으려고 뛰어온 사람에게 "인생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승이 깨달은 것은 진실입니다.
과연 그로서는 30년 동안에 연구하고 묵상하고 궁구하고 살폈지만, 얻은 진리를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 뿐입니다. 이것을 연구하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죽지만, 이 엄연한 사실, 죽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인생이 사망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욕심을 다 가지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 사망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왜 인생이 죽습니까?라는 질문 앞에 대답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30년 아니라, 인생 역사 수 천년 동안에 여러 종교, 사상에서 이를 알려고 했지만 이를 알 길이 없습니다.
더욱 이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길은 그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어렵습니다.
고민하고 애를 쓰지만, 아무도 이 원인을 알지도 못하고, 또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히 인생이 죽음문제를 가지고 논하는 것 자체가 짧고 덧 없는 인생을 더 슬프게 만들고 심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 사망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를 피합니다.
오직 사는 문제만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인생의 깊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작한 종교들이 이제는 어떻게 하면 복 받고, 이 세상에서 더 오래 살며, 더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영원을 해결하지 않고 인생에게 참된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 30년을 고행하지 않아도, 고행으로 수련을 하지 않아도 어린 주일학생이라도 이를 잘 압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의 해답이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이 한 절 짧은 말씀에 인생들이 그렇게 고민하고 궁구하던 문제 해결이 다 들어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은 보면서 불쌍한 생각을 갖지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의 연수가 얼마가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5-60년 남았습니까? 아니면 3-40년 남았습니까? 앞으로 10, 20년을 더 살 것 같습니까?
세상을 조금 길게 사느냐? 짧게 사느냐의 차이 뿐이지 우리 모두는 그리 길지 않은 생명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멀쩡하게 차려 입고 점잖은 것처럼 앉아 있지만 우리 속에는 죄가 자리잡고 있고 그 죄 때문에 하루하루를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죽게 된다는 것 그 죽음의 원인은 우리가 지은 죄와 허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1)허물과 죄로 인해 죽음이 왔습니다.
'허물'은 문자적으로 '정로'(正路)에서 떨어지다'라는 의미로 부주의하여 진리에서 떠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죄'는 문자적으로 '과녁에서 벗어나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생의 목표를 정확히 맞추지 못한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허물과 죄라는 말은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정도에서 벗어나고 목표에서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만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죽음이 인간들에게 찾아 왔습니다.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시고 인간들을 위하여 살기 좋은 우주 만물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대항하고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에 죽음이라는 비참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잘 읽어 보면 이런 죄와 허물 때문에 인간이 죽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 큰 사건이 노아홍수 사건입니다.
노아시대 때 사람들의 죄는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간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홍수로 죽임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살 던 사람들의 죄악상 때문에 그 성들이 불로 멸망을 당했던 것을 보아도 죄는 죽음을 가져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멸망을 당할 때도 말할 수 없이 비참했습니다만 남 유다가 범죄하여 멸망을 당할 때는 너무나 비참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 라는 사람이 유다의 왕이 되었는데 그가 왕이 되어서 한 행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라고 했습니다.
여호야김 이후에 그 아들 여호야긴과 여호야김의 조카 시드기야가 왕이 되었는데 이 두 사람 다 여호야김을 본받아서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바벨론을 이용해서 유다 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참으로 비참하게 망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과 왕궁 모든 귀인의 집들이 다 불타 없어지고 성벽도 무너지고 시드기야 왕의 아들들은 아버지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히고 쇠 사슬로 결박을 당하여 끌려가고 백성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 가는 참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비참한 역사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1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에 죽는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다 죄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로마서 5장 12절에도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그 형벌로 죽음이라는 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세 가지의 죽음
성경에서 죽음이라고 할 때 세 가지의 죽음을 말하는 것임을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우리 이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의 육신이 영혼과 분리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영혼의 죽음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고통스러운 지옥에 던져지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영과 육이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렇게 세가지로 볼 때 우리의 영혼은 이미 죽임을 당한 상태이고 육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으며 이 세상이 마감 되는 날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미 우리의 죄 때문에 영혼이 죽었고 육신도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에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고 영원한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모든 것이 죽은 상태였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와 허물로 인해서 이미 죽었고 죽어가고 있고 죽게 될 운명에 처한 불쌍한 인생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우리의 과거의 불쌍한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과거를 바르게 알 때 지금 우리를 살려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스런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바르게 알지 못하는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이 말씀을 이렇게 강조하는 의미도 거기에 있습니다.
뒤에 말씀을 드리겠지만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산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이렇게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렇게 비참한 상태로 죽어가고 마는 허무한 인생이었음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2.살리심을 받은 사람
본문에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던 너희를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렇게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들을 살리려 오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려 오심을 단적으로 잘 보여 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 12장에 기록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그것입니다.
베다니라는 동네에 오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오빠의 이름은 나사로였고 그 누이 동생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즉시로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기도 전에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들은 나사로를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곳에 오셨을 때는 이미 장사한지 4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집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기위해 모여들어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은 굴이었으며 그 문은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자 모든 사람들은 의아해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마르다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말씀 드리기를 "예수님 이미 죽은지가 4일이 되어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씀 드리며 돌을 옮기지 말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때까지도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실 것 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다시 마르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 말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라고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 하시자 마르다는 그제서야 돌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부르시니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얼굴은 수건으로 싸인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절을 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금방 죽은 자를 살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미 몸이 다 썩어서 흐물거리며 냄새가 나는데 그 온 몸이 회복 되어가지고 살아서 걸어 나오는 나사로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찌 기절할 정도로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나사로처럼 이미 죽어 썩어져 냄새가 나는 나사로처럼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죽고 썩어 가고 있는 나 자신이 살아나겠다고 몸부림을 칠 수도 없고 쳐 보아도 별 볼일이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살려 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이미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 앞에 절망하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내 말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신 것은 이미 죽어 있는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실을 믿는 우리를 살려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우리를 살게 하신 것이 아니고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스스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주시고 우리의 노력으로 생명을 찾게 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살려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 사랑하심과 은혜로 우리는 이미 사리심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혼이 새 생명을 받고 이미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도 죽기는 하지만 부활하게 해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나라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이미 죽은 우리를 살려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새로 받은 이 새 생명을 소중히 여기면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