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16.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67)
본문 : 행 13:8-12
제목 : 마술사 엘루마 2.
“8.이 마술사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지난주에 모처럼 부산에 가서 청년시절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몇몇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 때는 모두들 진리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그냥 교회에 다녔습니다. 교회에서 친구들도 만나고, 같이 놀러 다니고, 교회의 이런저런 행사들 계획해서 함께 하고, 그런 재미로 교회에 다녔던 친구들입니다.
그런 친구들이 지금은 신앙도 성장하고 교회의 중책들을 맡아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로 장로로 장립집사로 교회를 잘 섬기고 있습니다. 그 친구들 중에도 특별히 신앙생활을 비교적 더 잘하고 교회에도 더 충성을 잘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친구들 몇 명이 끝까지 남아서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아주 특별한 고난을 통과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사업이 잘못 되었거나 하던 일이 실패를 당하여 자살을 하고 싶은 충동을 낄 정도로 아주 막다른 골목까지 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신앙생활을 더 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그 때 그 고난이 없었다면 신앙생활을 포기 했든지 아니면 옛날처럼 그냥 교회나 다니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당할 그 때는 힘들었지만 그 고난을 통해서 정말 중요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인생사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소중한 신앙생활을 잘 함에 있어서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된 계기들이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좋은 경우는 이런저런 경험도 없이 고난도 당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성경말씀에도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이 더 복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 경우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책이나 여러 글들을 읽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음을 가지게 되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 보다 좀 못한 경우가 매를 맞아보고 고난을 체험하고 깨달아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경우입니다. 고난을 통해 체험을 통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아주 강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좀 못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고난을 당할 때 그 고통이 심하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지 않고 바른 신앙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런 고난의 경험도 없이 그냥 평생 늘 긴가민가하면서 겨우 교회에 출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되지만 늘 불안하고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신앙을 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사람입니다.
정말로 불쌍한 사람은 매를 맞고 고난을 당했으면서도 그 고난이 주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불평불만을 하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기쁨은 없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고생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더 불쌍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신앙생활 잘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셨는데 그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를 뛰쳐나가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는 기회를 붙잡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을 버리는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마술사 엘루마의 이야기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10절까지는 지난주에 살펴보았고 오늘은 11절과 12절을 중심으로 엘루마가 징벌을 받는 것과 그로 인해서 총독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부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보라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11절 말씀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술사 엘루마에게 벌을 주신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마술사 엘루마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손이 그의 위에 있다고 하신 말씀은 언뜻 보면 좋은 말씀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 위에 있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의지하여 힘을 얻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엘루마 위에 임한 주님의 손은 엘루마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한 손이 아닙니다. 엘루마에게 벌을 내리시기 위해서 임한 하나님의 징계의 손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여기서 손은 일격을 가하는 수단을 나타낸다.”라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네 위에”에서 “위에”라는 단어는 보통은 위에라는 뜻을 가지지만 때로는 반대하여 대항하여 라는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NIV 영어성경은 “against you”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거슬러 반대하여 라는 뜻입니다. 엘루마의 뜻에 반대하여서 그를 저지하기 위해서 임한 하나님의 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의 손이 마술사 엘루마의 못된 행실을 보고 그 못된 행실에 대항하여 징계를 하시기 위해서 그 위에 머물렀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엘루마의 죄상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였고 마귀의 자식이었고 모든 의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따르지 않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전하지 않는 거짓선지자라고 했습니다. 모든 학식에 능통한 지식인이라고 하면서도 꼭 알아야 하는 바른 진리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지 못하고 방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의 악행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시고 그의 못된 행위를 막으시기 위해서 주의 손이 그의 위에 그의 뜻에 대항하여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주의 손이 그의 위에 임했을 때 그는 눈이 어두워져서 맹이 되고 밝은 빛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을 의지해야 살 수 있는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징계하실 때 여러 가지 징계를 하실 수 있으시지만 다른 징계가 아니고 맹인이 되게 하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그가 누리던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어 가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밝은 태양 아래서 세상 만물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방해를 하는 사람은 참으로 악한 사람입니다.
또 세상의 모든 지식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잘 안다고 많이 배웠다고 교만하게 자기의 뜻을 내세우며 사는 그에게 그런 지식들이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잔뜩 안다고 해도 눈이 어두워져 버리니까 그 아는 것이 아무것도 이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가운데 작은 하나라도 거두어 가시면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게 됩니다. 평소에 그는 자기 스스로 사는 것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살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마술사 엘루마가 이런 하나님의 징계를 통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아니면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영원한 형벌을 받는 지옥으로 갔는지 성경에서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아서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본문 말씀에 그가 끝까지 맹인으로 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얼마동안 해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한 점을 보아서 그가 다시 회복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회개하여 믿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형벌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악한 일을 하여도 아무런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셨다가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바로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아무런 일이 없이 잘 사니까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하고 최후의 심판 이나 지옥의 형벌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눈앞이 캄캄해질 것이고 지난날의 삶에 대해서 후회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어려움을 당하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 잘못했을 때 즉각 매를 맞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어려움과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되고 예수님을 더 잘 믿게 되고 더욱더 충성스런 삶을 살게 되고 더 많은 칭찬을 하늘에 쌓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12절 말씀에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술사 엘루마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을 보고 총독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총독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막다른 골목에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눈물 콧물을 흘리는 고통을 당한 후에 겨우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총독은 아무런 고통도 당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쉽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입니다. 엘루마가 사도바울의 말 한마디에 맹인이 되는 것을 보고 쉽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복음을 바로 전하는 사람이 없어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기도해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믿으려고 해도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아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총독은 총독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쉽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뭔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믿는 것인데 이미 모든 것을 다 갖춘 총독이라는 사람이 체면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이것은 총독이 착하고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이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게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변화된 신분을 귀하게 여기시고 이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의 가르침이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징계를 통해서 가르치시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적절한 징계를 통해서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사랑하는 나머지 자녀들이 잘못을 해도 적절하게 징계를 하지 못해서 아이들을 불행으로 내모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이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징계를 하지 못함으로 아이를 불행하게 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이 아파도 징계를 해서 바른 길로 가게 하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또 주의 가르치심은 사도들을 통한 복음의 선포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것에 대해서 놀랍게 여겼다고 생각합니다. 총독 자신도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부하들에게 백성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교육이란 반 강제적인 교육이었을 것입니다. 명령을 내리고 불복종하는 사람은 벌을 내리거나 죽게 하여서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르침은 그런 억압적인 가르치심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사랑을 베풀고 그 사랑을 알게 하심으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주님을 따르게 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가르칠 때 구약의 율법을 지키게 하거나 예수님을 본받아서 선한 일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살아라, 이런 가르침이 쉽게 사람들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가르침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따르는 척 할뿐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생이 바른 삶을 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여 바른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십자가의 복음을 통하여 알게 될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참된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하는 가르침이 정말로 바른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우리교회에서는 늘 십자가의 복음으로 여러분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알고 느끼는 것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가장 바른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할 때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주시는 엄청난 축복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치심으로 우리가 깨닫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고난을 통하여 때로는 복음의 가르치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바르게 알고 그 가르치심에 놀라고 그 가르치심을 따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