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1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39)
  본문 : 행 9:40-43 
  제목 : 다비다야 일어나라.    

 

  “40.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요즘 우리나라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이권에 개입을 하고 불법청탁을 하는 등의 소위 갑질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런 갑질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직장을 가거나 사업을 하고나 어떤 모임에 가도 자기 권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저는 이 세상을 살면서 힘이 있는 갑으로 살아본 일이 별로 없습니다. 늘 힘이 없고 연약한 을로서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힘없는 을로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참 서글픕니다. 될 수 있는 대로 힘이 있는 갑이 되려고 노력을 하십시오. 공부를 하는 사람은 열심히 공부하고 돈을 버는 사람은 열심히 돈을 벌어서 힘이 있는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단 힘이 있는 갑이 되었을 때 힘이 없이 을로 사는 사람들에게 갑질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내가 가진 힘으로 그들을 도와주면서 살면 정말로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갑중의 갑이십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갑질을 하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우리를 괴롭히신다고 하면 우리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다행인 것은 그런 전능하신 갑중의 갑이신 하나님께서 그 권능을 가지고 그 권한을 가지고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 능력을 가지고 연약한 우리들을 어떻게 하든지 도와주시려고 하고 이 힘든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런 좋으신 하나님시라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옛날에 섬기던 잡신들을 생각해 보세요 정말로 얄밉습니다. 별로 힘도 없으면서 갑질은 되게 많이 합니다. 조금만 잘못보이면 금방 해코지 합니다. 이사를 간다든지 집을 짓든지 심지어는 못하나 박는 것까지 시비를 해서 괴롭히는 것이 귀신들이 하는 짓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지난주와 연결된 말씀입니다. 다비다가 병이 들어서 죽었을 때 베드로가 가서 살려주는 장면입니다. 지난주에는 이 앞의 본문을 가지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다비다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큰 능력을 가지고 우리 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본문 40절 말씀에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다비다를 살려주는 장면입니다. 베드로가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했더니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이런 장면에서 사람들은 이런 기적의 원인을 사람의 편에서 생각을 합니다. 다비다의 선행에서 이런 기적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다비다가 착한 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이렇게 기적적으로 다시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베드로의 기도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보시고 다비다를 다시 살려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인간 편에서의 행동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서 우리는 선한 일을 더 많이 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선행이나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알량한 자기 권력을 가지고 갑질을 하는 사람들 같았다면 어찌되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비다가 좋은 일을 하였지만 그 좋은 일이 죽었다가 다시 살만한 좋은 일은 아닙니다.
  
  다비다가 나름대로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았다고 하지만 그 뒷면에는 잘못한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사람인 이상 항상 좋은 일을 하면서 살기는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은 잘했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잘못한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을 한 것만 살펴보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지만 나쁜 일을 한 것만 살펴보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됩니다. 항상 좋은 일만 할 수 없고 모든 일에 좋은 일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선한 것을 증거로 보인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악한 것까지 보신다면 오히려 벌을 더 받을 뿐이지 다시 살림을 받을 정도로 착한 일만 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비다의 선한 행위만을 보고 그녀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잘못한 일도 많았을 것이지만 잘못한 것은 언급도 하지 않으시고 선한 행위만 보시고 살려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선행을 평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녀의 선행이 얼마나 많았는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는지 선을 행하면서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차별한 일은 없는지 평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성도들의 증언을 들으시고 선한 일 한 것만 가지고 살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유대교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새롭게 기독교를 시작하셨는지를 여러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성전을 없애고 성전에서의 제사를 없애고 이스라엘을 아예 망하게 해버리신 이유들을 사도행전에서 말씀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유대교지도자들의 갑질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율법으로 정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 율법을 이용해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살려고 하지 않고 아주 자세한 세목까지 만들어서 율법을 지키게 하고 위반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을 정죄하고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협박을 하여 돈을 받는 일에 이용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유대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3,15)
 
  율법을 가지고 자기가 지켜서 하나님나라의 백성답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처럼 작은 잘못을 가지고 정죄를 하여 지옥백성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한다는 사람들이 아주 비열한 사람으로 돌변해서 하나님을 나쁜 신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를 폐지해버리고 은혜와 사랑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일부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율법을 악용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규칙들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하게 억압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고 공의의 하나님으로 억압하고 못살게 구는 하나님으로 알게 만들어버립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들이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서 좋으신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으로 느끼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율법에서 해방이 되고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신 것인데 오히려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권력을 가지고 우리를 못살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우리가 평안하게 잘 살게 하시고 죄의 종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온 욥바 사람이 주를 믿더라 

 

  본문 41-42절에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미 죽어서 시체를 씻어서 다락에 누인 다비다를 하나님께 기도하여 다시 살리고 일으켜서 다비다가 살아난 것을 성도들과 과부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실을 본 온 욥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성경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적들은 표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가 되시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진짜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치거나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은 거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기적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바로 앞에서 8년 된 중풍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리고 병으로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렸습니다. 이런 정도 되면 이것을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할 만 했습니다. 내가 명령만 하면 어떤 병이든지 고칠 수 있고 기도하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 이런 소문을 퍼뜨리면 베드로는 금방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병원을 세워서 돈을 벌든지 엄청난 교회를 지어서 많은 성도들을 불러 모으고 담임목사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그런 기적적인 일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베풀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 그런 기적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철저하게 이기주의입니다. 무엇이든지 거저 주는 것이 없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을 주면서 큰 것을 빼앗아가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항상 우리 편에서 우리에게 유리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하나님 편에서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오든지 극소수의 사람들만 하나님나라에 오든지 별로 상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들 모아서 이용하시려는 생각이 하나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으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나라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이지 그렇다고 하나님께 이익이 될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그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의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기적적인 일들을 보여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여기 다비다가 죽음에서 다시 산 것이 그냥 다비다 한 사람이 다시 살게 된 것이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다비다와 우리와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고 다비다도 또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비다가 다시 사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다비다를 다시 살리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사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이런 기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더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또 이 말씀에서 생각할 것은 우리가 부활할 때 하나님의 평가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서는 좋은 일 한 것만 보시고 천국백성이 되게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서는 나쁜 일 한 것만 보시고 지옥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 차이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가 믿지 않는 사람인가의 차이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자신이 죄인인 줄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구원이 있는 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의지한 사람은 이미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선한 일만 가지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인 줄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잘못 살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선한 일 조금 하고 그것으로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 된 줄로 착각하는 사람은 그가 청산하지 못한 죄 때문에 그의 잘못을 하나하나 지적하여 영원한 지옥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이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엄청난 은혜의 길을 주셨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시몬이라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본문 43절에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라고 했습니다. 욥바에서 다비다를 살려준 베드로는 그곳에서 여러 날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 있는 동안 자신과 이름이 같은 시몬의 집에서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그가 머문 집의 주인인 시몬이라는 사람이 자기와 다른 시몬임을 말해주기 위해서 그의 직업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시몬의 직업은 ‘무두장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성경에는 ‘피장(皮匠)이라고 했습니다. 무두장이나 피장은 같은 말입니다. 동물의 가죽을 가공하는 직업을 무두장이 혹은 피장이라고 합니다. 동물의 가죽을 가공하는 직업은 천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산 짐승에게서 가죽을 벗겨서 기름을 제거하고 말려서 가죽을 만들기 때문에 짐승을 죽이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백정(白丁)이라는 최하위 신분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짐승을 도축하여 판매하거나 대장간에서 무쇠로 농기구 등을 만드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는 일이 힘들고 짐승을 죽이는 잔인한 일을 하기 때문에 천민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에도 백정에 해당하는 무두장이의 직업을 아마 천한 직업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집이고 만나기를 꺼려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사람의 집에 들어갔다는 것은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졌던 유대인들에게 아주 파격적인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아주 특별한 신분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인 베드로가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물러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자기보다 신분이 낮거나 가진 것이 없는 천한 사람들과는 만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을 만나주시고 함께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여기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부자나 권력가만 인정을 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낮고 천한 사람들의 편이 되어주시고 더 쉽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진행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보면 정말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족한 사람, 겸손한 사람, 가지지 못한 가난한 사람이 예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그 힘을 이용해서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 많은 사람이 그 돈을 이용해서 차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머리 좋은 사람 공부 많이 한 사람이 그 지식으로 차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힘없는 사람 돈 없는 사람 똑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믿음으로 차지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죽었던 다비다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다비다를 다시 살려 줄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우리를 억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능력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부족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귀한 신분이 되게 해 주셨으며  우리도 죽은 후에 다시 부활시킨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늘 감사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