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38)
본문 : 행 9:36-43
제목 :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6.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어떤 아동교육 전문가가 말하기를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기가 가진 힘이 커질수록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가장 중요하게 교육을 할 것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아이들 때부터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자라기 때문에 성인이 된 후에도 돈이 많거나 권력이 커지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자기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군림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맡겨보면 어떤 사람은 자기가 맡은 그 일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고 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 일을 가지고 어떻게 하든지 자신은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려고 합니다.
이런 차이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자기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도와주지 않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거나 돈을 많이 가지면 주변에 있는 사람은 오히려 착취를 당하고 손해를 봅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도우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돈이나 권력을 가지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행하여야 할 가장 큰 교훈을 꼽으라고 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입니다. 서로 사랑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누어주는 것, 다른 사람이 잘 되게 해주는 것,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것, 이런 것들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사역이나 제자들이 행한 치유사역에는 특별한 패턴이 없습니다. 고침을 받는 사람이나 고쳐주는 방법에 있어서 특별한 조건이 없습니다. 그것은 병을 고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 그 기적적인 일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그런 기적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도록 삶의 원리를 깨닫게 하는 일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런 의미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욥바에 사는 다비다라고 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주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비다가 평소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하고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그렇게 좋은 일을 한 사람을 다시 살려주시면서 우리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고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본문 36-37절에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유다지역에 퍼져 있는 교회들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의 사건은 룻다라는 지역에서 중풍병에 걸려서 8년 동안 누워있던 애니야를 고쳐주었고 욥바로 왔습니다. 여기 룻다나 욥바는 그리 멀지 않는 거리에 위치해 있는 도시입니다. 빌립의 순회 전도활동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들이 교회를 이루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다비다의 이름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도르가’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에는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그를 여제자라고 했습니다. 여자에게 제자라는 칭호를 최초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제자라고 호칭을 하기도 합니다. 성도나 형제자매 보다는 조금 더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라는 말은 스승에게서 배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보다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 배워서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본받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고 했습니다. ‘선행’이란 착한 일, 좋은 일, 친절하게 행하는 일, 옳은 일을 행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구제’라는 말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동정심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구제라고 합니다.
‘심히 많더니’라는 말은 어쩌다가 한두 번 선행이나 구제를 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녀의 삶 속에 선행이나 구제가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늘 항상 그런 일을 하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어쩌다 한두 번 생색내기 위해서 좋은 일 하고 사진이나 찍어서 올리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 늘 그렇게 좋은 일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가를 살펴보고 배우고 따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믿고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답게 사는 것이 믿음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믿음에는 ‘칭의’의 믿음과 ‘성화’의 믿음이 함께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믿음을 갖게 하시고 성화 즉 점점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 같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갖게 된 믿음이라면 동일하신 성령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삶도 바뀌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삶이 바뀌지 않는 믿음은 성령님의 역사가 없는 거짓믿음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내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목사님들은 성화나 믿음의 행위들을 강조합니다. 또 어떤 목사님은 복음을 강조하고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두 사람이 다른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는 같은 것입니다.
행위를 강조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선을 행하고 구제를 많이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을 강조하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선을 행하고 구제를 많이 할 줄로 알고 믿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에 속한 사람입니다. 제가 믿음을 강조하고 복음을 강조하는 것은 정말로 믿음이 무엇인줄 알고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마땅히 선한 일을 행하며 살게 되어 있고 선한 행위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목숨까지도 버리고 이 믿음을 지킬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좋은 것을 받고도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차지하고 남을 위해서 희생하거나 봉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그렇게 많이 이야기를 했는데도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은퇴한 목사님이 이럼 말씀을 합니다. 자신도 평생 성도들에게 정말로 좋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수십 년을 교회에 다니면서 그 설교를 들었는데도 전혀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기를 교회 안에는 정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어린아이와 같은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고 또 그 중에는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가짜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은 점차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지만 가짜 그리스도인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가 않고 믿음이 자라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에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다비다라고 하는 여제제와 같은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께서 그런 삶으로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여러분에게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세상의 축복만 가르치고 헌금만 요구하고 좋은 대접만 받기를 원한다면 그 목사는 가짜 목사입니다. 목사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복음을 전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목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그런 위대한 믿음을 선물로 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었다면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어쩌다가 한두 번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이 완전하게 바뀌고 언제나 어디서나 선한 일을 하고 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직 미성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일 수도 있지만 늘 그렇게 변함이 없으면 믿음이 가짜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본문 37-39절에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라고 했습니다.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칠 때도 “그 때에”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비다가 죽는 것도 “그 때에”라고 했습니다. 애니야가 고침을 받을 때 ‘그 때’는 베드로가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왔을 때이고 오늘 다비다가 죽을 때 ‘그 때’도 바로 가까운 도시인 룻다에 베드로가 머물고 있던 그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비다가 죽은 때를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를 살리실 계획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적인 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선한일이나 구제하는 일을 항상 행하던 사람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병들어 죽었다고 했습니다. 특별한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니고 누가 고의나 실수로 죽게 한일도 없었지만 자연적으로 늙고 병들고 죽에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디가 아프거나 병이 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을 주셔서 병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늙고 병들고 죽는 원인이 죄 때문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 한두 가지 더 지었다고 해서 더 빨리 죽거나 늦게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모든 인생들이 죄로 인해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시체를 씻어서 다락에 누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씻어서 집에 모셨다가 3일이 지나면 무덤에 장사를 지내는 것은 우리나라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사람이 죽으면 염을 합니다. 시체를 잘 씻어서 새 옷을 입히고 관에다가 넣어두고 삼일 후에 장례식을 치르고 무덤에 매장을 합니다. 요즘은 매장지도 없고 비용도 많이 들어서 화장을 많이 하지만 원래는 모두 매장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유대인들의 장례의식을 보면 다 같이 이 세상의 삶으로 끝이 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죽고 난 후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고 시체를 소중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장례식도 부활을 준비하는 장례식으로 행하여졌습니다.
시체를 깨끗하게 씻긴다는 것은 깨끗한 상태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체를 씻는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시체를 깨끗하게 씻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을 파고 시체를 묻지만 유대인들은 굴을 파고 굴속에 시체를 둠으로서 부활의 신앙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도르가가 죽자 제자들이 가까운 룻다에 와 있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서 빨리 욥바로 오게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욥바에 와서 도르가의 시체 앞에 왔을 때 평소 도르가의 도움을 받은 과부들이 도르가가 만들어 준 옷을 베드로에게 보이면서 도르가의 선행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한 사람이라고 해서 죽은 다음에 다시 살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성령님의 특별하신 역사로 사도들에 의해서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때였기 때문에 이런 선을 행한 도르가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도르가의 선행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르가가 많은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구제를 할 만한 부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도르가가 과부들에게 돈을 주었다거나 옷을 사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옷을 만들어서 준 것으로 보면 재산이 많아서 구제를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가지고 시간을 내어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할 때 꼭 돈이 많아서 큰일을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이나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베풀면 됩니다.
과부들이 이렇게 도르가의 선행을 증언하는 것은 도르가가 오히려 어려운 형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옷을 만들어 준 일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옷은 사치품이 아니라 생활하는데 있어서 있어야 할 필수품이었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도르가를 다시 살리는 사건이 우리가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예수님을 더욱 잘 믿게 하려는 뜻이 있다고 한다면 도르가의 선행도 그런 의미에서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혹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을 때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평생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살았지만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었는지 증명이 되어야 하는데 그 증명은 그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가가 증명이 될 것입니다. 말만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조금도 믿는 사람처럼 살지 않았다면 그 믿음은 거짓 믿음이고 우리의 삶에 증거가 있을 때 참된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확인 할 길이 없습니다. 시험으로 보거나 재판을 받거나 검증을 할 때 진실이 가려집니다. 세상 살 때 우리 모두가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진위가 가려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끝냈을 때 다른 사람들이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를 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 속에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 성령님께서 증인이 되어주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확실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증거들을 삶속에 많이 남기시기 바랍니다. 그런 증거들을 통해서 믿음이 확인되고 그 믿음으로 인해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선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가장 최선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해야 할 가징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런 참된 예배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고 이웃 사랑은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고 도와주는 일입니다. 이 선한 일이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날입니다.
성찬예식은 매주 행하여야 할 일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일 년에 두세 번 행하고 있습니다. 자주 하지 않는 대신에 성찬예식에 참여할 때 그 의미를 잘 알고 진실한 마음으로 참여를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의미하는 떡을 먹게 되고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시게 됩니다. 우리가 이 떡과 이 잔을 받음으로 피로세운 새 언약에 참여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산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자기중심으로 살고 온갖 세상의 우상들을 섬기고 살지만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삽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자기만 위해서 살지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어려운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죄가 하나도 없는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할 것을 약속하시고 의로운 사람만 갈 수 있는 영원한 천국에서 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바르게 잘 살려고 노력을 하지만 때로는 실수도 하고 죄도 짓고 남에게 못할 짓도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가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런 실수나 잘못들을 다 용서하신다고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의미 없이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예식이 이 피로세운 새 언약에 참여하는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언약에 신실한 실천자가 되기를 다짐하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비다처럼 다 죽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그 언약식이 오늘 성찬예식입니다. 이 약속을 꼭 붙잡고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