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2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37)
  본문 : 행 9:32-35 
  제목 :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32.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사도행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주역 두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베드로와 바울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중심이 되고 또 많은 사람들이 동역 자가 되어서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사도행전 전반부에는 베드로가 그 주역이었지만 9장에서 들어오면서 후반부의 주역이 될 사울이 등장을 합니다. 1절에서 30절까지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32절부터는 다시 베드로의 활약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전도활동이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되는 것이 13장부터입니다. 그 때까지 사울의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 사도가 룻다 지방에 가서 중풍 병에 걸린 애니아라는 사람을 고쳐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내려갔더니

 

  본문 32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 때에’란 31절의 말씀과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하게 서 가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을 위로하던 그 때였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사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도망을 갔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사도들은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정하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세상 사람들이 어떤 짓을 해도 방해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진행하시는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에만 있지 않고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룻다에 온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기보다는 이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돌아보기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그 신앙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지 돌아보기 위해서 여기저기 다니다가 룻다에도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룻다라는 도시는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예루살렘 서쪽으로 지중해 쪽에 있는 한 도시입니다. 룻다라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룻다의 성도들은 신약의 교회가 시작되던 그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거기서 성령님께서 각 사람들에게 임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는 빌립의 전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빌립 집사가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에서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속해서 여러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행8:40)라고 했습니다. 

 

  남쪽에 있는 아소도라는 도시에서 북으로 올라가면서 가이사랴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있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룻다라는 도시는 빌립이 전도하며 올라가던 그 길에 있었던 도시입니다. 그래서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룻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전도를 해서 예수님을 믿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미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었고 베드로는 그들을 돌아보러 내려온 것입니다. 룻다라는 도시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다니다가 룻다에도 왔다는 것으로 보아서 온 유다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성도들을 돌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변화되는 장면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나왔다는 것과 유대교가 섬기는 그 하나님이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유대교를 전혀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과 전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성전이나 제사나 율법의 정신은 그대로이지만 더 이상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전혀 다른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성전을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믿지 않습니다. 더 이상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더 이상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또 하나는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외국에서 사는 유대인들이나 예루살렘이 아닌 지방이나 사마리아와 같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특별히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방의 나라까지에도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가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사방으로 두루 다녔다고 하는 것은 복음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방의 한 도시인 룻다에서도 예루살렘에서 행한 기적을 보여준 것은 복음이 온 세계에 퍼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만 거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동행하고 계시고 역사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본문 33-34절에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룻다에 갔을 때 성도들 중에 애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중풍병으로 8년이나 침상에 누워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베드로가 애니아에게 말합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그랬더니 애니아가 바로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애니아를 일어나라고 하면서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낫게 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말합니다. 당연하게 나을 것이니까 일어나서 자리 정돈하라는 것입니다.

 

  8년 동안이나 중풍으로 누워 있으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만 일어나서 자리정돈 하라는 말은 정말로 기쁜 말씀입니다. 본인도 그렇고 간병하던 가족들에게도 하늘을 날을 것 같은 기쁜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 사도가 앉은뱅이를 고쳐준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는 40년 된 앉은뱅이를 보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나서 40세가 될 때까지 일어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바로 일어서서 걷고 뛰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기적적으로 병자를 치료한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고 신약성경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병을 고치는 패턴을 살펴보면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습니다. 병을 고쳐주는 대상도 다르고 고치는 방법도 다르고 다 다릅니다. 어떤 때는 믿음이 좋은 신자를 고쳐주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믿음도 없는 사람을 고쳐주시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말씀으로 명령만 내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패턴으로 병을 고쳐주시는 이유는 병을 고치는 것은 병을 고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면 같은 방법을 가지고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을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 대상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거나 선을 행하는 사람이거나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거나 어떤 대상을 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쳐주는 방법도 요단강에서만 씻으라고 하든지 안수를 하든지 아니면 명령을 하든지 뭘 찍어 바르든지 어떤 한 방법을 제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을 고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대상이나 방법은 수시로 바뀝니다.

 

  구약시대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면면서 우리를 구하러 오신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주로 불치의 병을 고쳐주신 것은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을 단번에 고치시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병들고 늙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그런 질병이나 죽음이 없는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적을 행하는 목적도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주가 되심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고 복음을 아는 사람은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오늘날에 이런 기적적인 치료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가 아니면 사도시대로 그 기적이 끝났는가 하는 것은 논쟁으로 남아 있습니다. 순복음교회 계통이나 신비주의자들은 아직도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들이고 개혁주의자들은 사도시대와 같은 기적적인 치유사역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적적으로 치료해주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사용하실 때 아주 특별한 일에 제한적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한적으로 사용하시는 것을 가지고 늘상 모든 일에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게 하는 것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누구에게나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사도시대라고 해서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기적적으로 병이 고쳐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시대 때도 엄청난 환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는 오늘날처럼 의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원인도 모르고 치료조차 할 수 없는 병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수많은 환자들 가운데 몇몇 사람만 고침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사람들도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병을 고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그런 기적적인 치료가 계속된다고 해도 극소수의 경우에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일어나기 때문에 일평생 한 번도 볼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지금도 그런 기적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이런 치유사역보다는 야고보서에 나타난 치유사역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병든 자가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름을 바르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약을 바르고 치료를 하면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이가 들면 제일 괴로운 것이 육신에 병이 드는 것입니다. 병이 들면 육신도 괴롭지만 마음도 괴롭습니다. 병이 들면 치료비도 많이 들기 때문에 건강한 것이 제일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든 사람의 인사는 건강하지 건강이 제일이야 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을 당하면 무조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이 제일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도 늘 기도하면서 건강하게 살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몸이 아프고 특별히 불치의 병이 걸리면 나에게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으면 하고 기도하면서 기적을 기다리겠지만 누구에게나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망만 많이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노력하면서 살다가 또 아프면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타락한 우리의 육신은 언젠가 한번은 이렇게 병들어서 죽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몸이 좋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줄 알고 하나님 나라에 갈 준비를 더 철저히 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런 기적의 치유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모든 병이 다 고쳐지고 죽음이라는 것이 없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병들고 죽어갈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이런 아픔과 죽음의 고통이 없는 영원한 천국에서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이 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 세상에 살기 때문에 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35절 말씀에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라고 했습니다.
애니야가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자 애니야가 살고 있던 룻다는 물론 주변의 사론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이 소식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기적적으로 애니야를 치료한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성령님께서 그렇게 역사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성경말씀도 완성이 되어서 늘 볼 수 있습니다. 교회도 여기저기 많이 있어서 언제든지 교회에 가서 복음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2천년 동안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또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을 체험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우리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교회의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았고 주변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진리를 알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적적인 일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 중에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라고 하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자들은 기적을 보고 또 사실을 확인하고서라도 믿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런 확인이 없이도 믿을 수 있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이런 표적들을 행하고 성경에 기록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서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 사실을 믿는 자에게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하든지 이 사실을 알고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이런 기적도 행하시고 반대로 살아가면서 고통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애니아의 불치병을 고쳐주심으로 성도들이 더 예수님을 확실히 믿게 하셨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서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런 질병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천국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믿음을 주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