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05)
본문 : 엡 1:7
제목 :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영어로 역사를 히스토리(history)라고 합니다.
history는 Hi(his)+Story 합성어로 즉 '남자의 이야기' 입니다.
여기 남자로 표현된 'his'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역사 하시기 때문에 진정한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인간의 역사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BC와 AD로 나누고 있습니다.
BC는 'Before Christ'라는 영어의 약자로 '예수님 탄생 이전'의 뜻이고 이것을 '기원 전'이라 합니다.
AD는 'Anno Domini'는 라틴어의 약자로 예수님 탄생 이후라는 뜻이며 이것을 '기원 후'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원의 중심은 즉 역사의 중심은 예수님이십니다.
특별히 성경은 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특별한 이야기를 기록한 역사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여러 역사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중심으로 이끌어 나가시는 핵심적인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수 많은 시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조명으로 비추어주시는 스포트라이트로 특별히 비추어주시는 부분을 기록한 책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나가시는 이 세상의 역사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특별한 역사를 기록한 성경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구원이 성경 역사의 핵심주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구원+역사 즉 구속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의 중심은 구속사(성경)입니다.
그리고 세계사의 중심과 마찬가지로 구속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세계 역사의 핵심이요 성경 즉 구속사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인간의 구속사를 기록한 성경 역사 속에 그리고 세계의 역사 속에 빠지지 않고 많이 기록된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종 즉, 노예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의 중심을 이루는 이스라엘의 시작도 사실은 이 노예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은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때에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 그만 그 나라에서 400여년을 노예로 살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종살이하는 애굽에서 구원을 받고 탈출을 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민족으로서 나라로서 이스라엘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에베소서가 기록된 그 시대에도 이 노예제도는 공식적으로 인정이 되었고 수 많은 노예들이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인간 역사에 있어서 노예제도만큼이나 비참한 역사가 없었을 것입니다
똑 같이 사람으로 태어났는데도 어떤 사람은 개나 짐승같이 부림을 받고 팔려 다니고 비참하게 죽어가면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한번 해 보지 못하고 일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쟁에 나갔다가 패전 군이 되어서 포로로 잡혀 가서 노예가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빚이 많아서 그 빚을 갚지 못하고 돈 대신에 끌려가서 노예가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태어날 때 노예의 자녀로 태어나서 노예가 된 그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고대사회 뿐만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이 노예제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만 해도 100여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양반과 상놈이 있고 양반집에는 많은 종들이 비참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 이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왜 이런 비참한 노예제도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이 역사 가운데 있었을까요
그것은 욕심이 많고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 남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의 악한 마음의 소산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 노예제도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실 중요한 교훈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비참한노예들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중요한 교훈은 오늘 본문에 기록된 "구속"이라는 말입니다.
이 구속이라는 말이 성경 역사의 중심이 되는 말이기 때문에 그 구속이라는 말을 우리가 잘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이런 제도가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이런 비참한 노예제도를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라 노예제도 자체는 사악한 인간의 욕심으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노예제도와 이 구속이라는 말의 참된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그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계속해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씀은 우리의 구속이 "그의 은혜에 풍성함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인하여 우리가 이 구속함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강조할 때는 그 은혜를 받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죄가 많은 속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이 있는데 반대로 생각을 해 보면 은혜가 넘칠수록 우리의 죄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려고 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는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니 해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잘 살펴보고 솔직한 심정으로 나 자신이 참으로 연약하고 별 볼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악하고 추하고 도저히 하나님 앞에 맨 정신으로 서 수 없는 형편없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할 때 그런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풍성한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크고 풍성하다고 노래를 하는 것은 바울 자신이 한때는 꽤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잘 알고 보니까 얼마나 추한 죄인인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로마서 7장에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 가운데 살고, 죄의 얽매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절망적으로, 자신의 힘으로는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여기 죄인이라는 것은 마치 영적으로 사탄의 노예와 같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에서 사탄의 종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 종 이 사탄의 종 이 사망의 종 이 멸망의 종에서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그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될 수 없어서 비참하게 죽어갈 때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를 배경으로 삼은 이야기입니다.
"유다 벤허"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예루살렘의 제일가는 유태 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로마의 지배 하에 있던 이스라엘에 새로운 총독의 모함으로 재산은 몰수를 당하고 벤허는 노예로 팔려 갑니다.
노예함선의 밑 바닥에서 발을 쇠사슬로 묶인 채로 노를 젓던 그 노예의 모습을 여러분은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그는 우여곡절 끝에 노예에서 해방이 되고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사람을 찾아가 복수를 하게 됩니다.
뿌리라는 영화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쿤타 킨테"라는 흑인이 노예사냥꾼들에 의해 붙잡혀 미국에 끌려 와서 평생을 노예로 살면서 틈만 있으면 그 비참한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서 살았던 그 일대기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노예란 정말로 비참한 것이며 사람이 아닌 짐승보다 못한 비참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노예의 생활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을 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노예들은 자신들의 비참함에서 탈출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운명이려니 팔자이려니 하고 비참한 삶을 감수하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태어날 때부터 노예의 자녀로 태어나서 노예가 된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자신의 운명인양 그 생활에 자연스럽게 젖어서 살았습니다.
제가 이런 비참한 노예의 이야기를 이렇게 하는 것은 사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또 다른 면에서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종으로 태어납니다.
마치 노예들이 태어날 때 부모를 노예로 두면 자신도 노예로 태어나는 것처럼 조상들이 다 죄인이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고 죄에 얽매여 어쩔 수 없는 죄의 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이 죄라는 것은 우리를 속박하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안 지으려 해도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우리 자신, 이것이 우리의 죄의 종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늙어야 하고 아파야 하고 고통을 당해야 하고 결국 죽고 멸망 당하는 죄의 종 사탄의 종 죽음의 종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뭔가를 좀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은 우리가 왜 이렇게 노예로 살아야 되는가 이 노예의 신세에서 해방이 될 길은 없는가 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도를 닦아 보기도 하고 이것 저것들을 신으로 섬겨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죄의 종 사탄의 노예인지도 모른 채로 운명이려니 팔자이려니 하고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풍성한 은혜라고 노래를 하는 것은 그 은혜를 받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노예의 신세였었나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노예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봐도 그들을 부리고 있는 세력들이 너무 힘이 강했기 때문에 그 많은 투쟁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랜 세월동안을 노예로 살았듯이 우리 인간을 붙잡고 있는 죄의 위력이 사탄의 세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죄의 종 사탄의 노예에서 스스로 해방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풍성하고 크다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그의 피로 말미암아
오늘 본문 말씀에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아주 강하게 등장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피의 제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들에게 그 죄값으로 피로 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제도를 통하여 생명에 있어서 피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과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가르치고자 했을 것입니다.
범죄한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과 피가 그 생명의 중심역할을 한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 준 것입니다.
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의학적으로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지금당장 피가 공급이 되지 않으면 그 부분은 썩는 것을 봐서도 피는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데 내 자신이 피를 흘리면 죽고 마니까 짐승을 대신 잡아서 피를 흘리게 하여 죽임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제도는 이 피의 중요성과 범죄한 자는 이 피를 흘리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제사제도의 또 한가지 중요한 의미는 짐승의 피로 대신해서 임시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하신 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죄 대신 피를 흘려 주실 것을 미리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모든 나라에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종교 의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명절만 되면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돌아가신 기일이 되면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를 안 드리면 집안에 우환이 생기는 것 같고 조상에게 불효하는 것 같아서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이 제사만은 꼭 지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이 제사제도의 원래의 뜻을 잊어버리고 그 제사를 드리는 대상도 잊어버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자기 목숨대신 짐승의 피를 흘려서 먼저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 대신 피를 흘려 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 받게 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피는 그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죽을 대신 형벌을 받으시며 흘리신 그 보배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흘리신 보혈로 우리가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3.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구속이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하여 노예제도와 제사제도를 길게 설명을 했습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노예들이 자유를 얻거나 죄수들이 석방되기 위하여 돈을 지불하는 속전(贖錢)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로마제국에는 6백만 명이나 되는 노예들이 있어서 그들을 사고 파는 노예시장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의 친척이나 친구가 노예인 것을 보았다면 당연히 그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그를 위해서 반드시 몸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 때 노예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지불해 주는 돈을 속전이라고 했고, 또 그렇게 돈을 주고 사서 자유롭게 해주는 행위를 구속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도 다 노예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노예 사탄의 노예 죽음의 노예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하셨습니다.
또 롬 7:14에 보면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죄 아래 팔렸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죄의 노예상태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않고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롬 7:19)
그것이 다 죄 아래로 팔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노예를 사서 그를 자유케 해준 것처럼,
죄에 매여 살다가 죄로 멸망받을 수 없는 우리를 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더 이상 속박받지 않는 자유의 몸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속이란 곧 죄 사함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노예와 같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는 예수님을 보내 주시어 십자가에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의 값을 지불해 주시고 우리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 구속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