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25.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28)
본문 : 행 9:6-9
제목 :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역사를 공부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끔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하여 큰일을 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변화 시켜서 사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가지고 그대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떤 사건을 통하여 완전하게 변화시켜서 사용을 하십니다.
사울은 그런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일을 감당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바꾸는 중대한 일에 그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훌륭한 유대교인에서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바뀐 사람입니다. 가식적인 종교인에서 참된 진리의 도를 따르는 신앙인으로 바뀐 것입니다.
제가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니까 혹시 여러분이 유대교는 참 나쁜 것이구나, 라고 오해를 하실까봐 말씀을 드리는데 유대교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유대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섬기고 또 말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들의 조상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도 지키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살다가 나라를 빼앗겼지만 지금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만 섬기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한 것도 인간인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니까 한분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죄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사울은 자신을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최고의 사상가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뭘 몰라서 아무렇게나 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뭘 알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진리를 알고 진리 따라 사는 대단한 사람이며 그런 일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문제는 그런 성경공부나 그런 율법을 잘 지킨다거나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세상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을 때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을 발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많이 배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정직하고 바르게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아 내가 부족한 사람이구나, 아 내가 뭘 잘 모르는 것이 있구나,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엄청 똑똑하고 엄청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보통 말로 해서는 자기의 생각을 바꾸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비추고 눈이 멀게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음성을 듣게 하여서 그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도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일반적인 종교인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들을 버려야 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남의 것이나 훔치고 나쁜 짓이나 많이 해서 회개를 하고 새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바르게 살고 성경공부도 많이 하고 알 것은 다 아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많을수록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는 장면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사울처럼 변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형식적인 종교인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 진리의 길을 몰라서 엉뚱한 곳으로 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바른 길로 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본문 6절 말씀에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시내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내란 다메섹 시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메섹 시내는 사울이 가고 있던 길이었습니다. 다른 길이 아니라 사울이 가고 있던 그 길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네가 길을 잘못 가고 있으니까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하실 만한데 가던 길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메섹이 아닌 다른 도시에 사람을 준비하시든지 하실 것인데 그냥 나쁜 짓을 하러가던 그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같은 장소이기는 하지만 가서 만날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가서 할 일은 다른 일입니다. 원래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오려고 했는데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한편이 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더 잘 믿게 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그들과 같이 삽니다. 짐을 꾸려서 세상 사람들이 살지 않는 다른 것으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살아가는 모습은 다른 모습입니다. 해야 할 일은 다른 일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과거에는 예수님을 몰랐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사울의 입장에서만 생각을 합니다. 그곳에 피난 와 있던 사람들 편에서도 이 사건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서 죽이려고 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한편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다가 유대인의 박해를 피해서 다메섹으로 피난 와서 살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렇게 변한 사울은 그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잡아가려는 사람이 자신들과 한편이 되고 자신들을 변호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저와 같이 복음을 이해하고 믿음의 위대함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로 기쁩니다. 동역자가 생기고 한편이 생겼다는 것은 외로운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의 목회자들 가운데는 예수님만 믿고 따르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똑바로 살아야 하고 충성을 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성공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피난 온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바르게 살 수가 없어서, 좋은 일만하며 살 수가 없어서, 충성하고 헌신하며 살 수가 없어서, 성공하면서 살 수가 없어서, 예수님께로 피난 온 사람들입니다. 나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 안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사울과 같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장사꾼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편이 되어서 우리를 위로할 사울과 같은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 그 복음으로 연약한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이 진정한 목회자입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7절 말씀에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라고 했습니다. 같은 장면을 22장 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이 두 말씀을 비교해보면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같이 가던 사람들이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22장에서는 소리는 듣지 못하고 빛은 보았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비슷한 말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사울과 같이 가던 사람들이 빛은 보았는데 그 빛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빛이 어떤 의미로 비추는 빛인지는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이 소리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가 의미하는 뜻을 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소리로만 들었지 그 속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음성은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만 자신을 보이시기 원했고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현상을 보고 들었지만 사울만 예수님을 보고 들을 수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아마도 사울과 같은 임무를 받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사울의 부하들이었거나 사울과 뜻을 같이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간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나중에 사울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사울은 배반했어도 그들은 끝까지 체포조로 활동했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사울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복음 사역자로 쓰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은 확실합니다. 사울은 이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며 준비한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장면을 보면서 아 나도 사울처럼 변화되기 위해서 사울과 같은 체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도 그런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에게 자주 이런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기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사람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은 우리도 그런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 자연적인 현상 가운데서도 비슷한 일들을 체험하면서 삽니다. 세상을 살아가다가, 성경 말씀을 읽다가, 설교말씀을 듣다가, 기도하다가, 묵상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사울과 같이 그렇게 만나고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고 예수님이 진짜로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그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으로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강하게 역사하시면 무엇을 하든지 거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큰 은혜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이 우리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한 이런 음성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지만 그 마음속에 있는 이 세상의 욕심들을 버리지 못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세상을 향한 욕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돈 벌어서 잘 살고 싶고 출세해서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싶은 욕망들이 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아는 것은 성령님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강권적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 귀한, 이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본문 8-9절 말씀에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사울이나 같이 가던 사람들이나 다 같이 빛을 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별 일없이 볼 수 있었지만 사울만 눈을 떴으나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강한 빛 때문에 눈이 멀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로 앞을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가던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을 보지도 못했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지냈다고 했습니다. 사흘 동안을 깜깜한 암흑 속에서 가만히 있어야 했습니다.
사흘 동안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그냥 단순하게 예수님의 만나고 난 후유증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엄청난 일을 당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훌훌 털고 바로 일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흘은 특별한 의미를 주는 사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3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두기도 합니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에 삼천만이 사는 나라였고 뭐든 삼세번은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달리기도 하나 둘 셋 하고 달립니다.
성경에서도 3이라는 숫자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 중에 우리 기억에 남을만한 3일은 요나가 고래 배속에 있었던 3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외치라고 했는데 그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을 가다가 바다에 던져지고 큰 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가던 요나를 하나님께서 물속에 던지게 하시고 큰 고기 배속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 사흘 동안 요나의 마음을 바꾸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유명해진 것은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자신에게 빗대어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와서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이시고 메시야가 되신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39-4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시다가 부활하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메시야가 되신다는 증거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 무덤에 머물러 계시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 사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과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가 되신다는 증거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무덤까지 내려가셔서 사흘씩이나 머물러 계셨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사실은 부활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삼일정도는 무덤에 있어야 죽음이 확인되는 것이고 죽음이 확인될 때 예수님의 부활도 확증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거치신 것입니다. 이 무덤에서의 삼일이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푸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도 이런 절차를 거치고 있는 것입니다. 깜깜한 암흑 속에서의 삼일이 그가 해야 할 엄청난 일의 준비기간입니다. 그런 흑암의 시간을 지나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깜깜한 암흑 속에서 삼일을 지낸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밝은 빛을 보게 됩니다.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새로운 사명을 가지고 새로운 진리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알고 있었던 잘못된 지식들을 이 암흑 속에서 다 묻어버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는 참된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메섹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으러 가던 사울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밝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명을 받은 새로운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외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외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복음이 우리가 가진 복음입니다. 그가 만난 예수님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알고 믿게 된 것이 너무나 귀한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