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18.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27)
  본문 : 행 9:3-5 
  제목 :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유대교가 기독교로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통하여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오시게 하셨습니다. 그 계획대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계획이 완성이 되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세상 만민들에게 적용시키기 시작을 하셨습니다.

 

  유대교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구약성경이지만)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위시한 각종 율법을 지켰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언약의 상징인 할례를 행하였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념하는 각종 절기들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을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오시게 하기 위한 것들이었고 예수님을 보여주는 예표들이었습니다. 그것들만 가지고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꾸 반복해서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교해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교회 안에 유대교식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생이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키고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면서 가식적으로 잘하는 척만 하는 유대교도들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다니는 목적을 죄에서 구원 멸망에서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좋은 일 많이 하고 착하게 살고 복을 많이 받고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완벽한 유대인이었다가 완벽하게 그리스도인으로 바뀐 사람입니다. 우리도 형식적인 종교인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바울이 유대교인에서 기독교인으로 바뀐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은 믿음이란 말로만 믿는다고 고백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고백에는 진실한 고백이 있어야 하고 진실한 고백을 하려면 엄청난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변화 정도가 아나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서 기독교인으로 변화되는 것과 같은 변화가 있어야 바른 고백 진실한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바울이 살기등등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이런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예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본문 3절 말씀에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전통적으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데 모든 면에 있어서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열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붙잡아오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다메섹 즉 지금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에 스데반의 순교이후에 기독교 박해가 심해지자 그곳으로 피난 온 기독교인들을 붙잡기 위하여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들고 가고 있었습니다. 거의 다 왔을 때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셨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만날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이나 천사를 통해서 다른 환상이나 상징물을 통해서 만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시거나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갈 때입니다. 사울에게 나타난 예수님도 아주 강한 빛으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자연현상이 아닌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동안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특별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야 하나님이신 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 나타난 모습은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고 했습니다.  아주 강한 조명 같은 불빛이 그를 비추었다고 했습니다. 눈을 뜰 수 없는 아주 강한 불빛이었습니다. 그 빛을 보고 난 후에 사흘 동안 앞을 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는 이 장면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다시 말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는 이 빛을 “해보다 더 밝은 빛”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가장 밝은 빛이라고 생각했던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당시 바울을 비추었던 이 빛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빛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빛으로 나타나시기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그 때도 빛으로 나타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빛으로 나타나실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빛으로 나타나시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빛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더 자세히 보게 해서 우리의 실상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두움 속에 있을 때는 나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밝은 빛 가운데로 나아가서 내 모습을 살펴보면 내 모습이 얼마나 지저분한 모습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추석에 큰 맘 먹고 사택의 제 방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소파를 들어내고 책상을 들어내고 보니까 먼지가 말도 못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들이 얼마나 지저분하든지 이런 곳에서 살았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지저분했습니다. 우리의 모습도 가끔은 하나님의 밝은 빛 앞으로 나와 봐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얼마나 지저분한 사람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죄들을 하나님의 빛 앞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동안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준으로 자신을 볼 때 정말로 바른 삶을 사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주기 위해서 앞장설 정도로 자신은 바른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울의 모습이 악한 모습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빛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빛은 또 바른 지식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섰을 때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이 얼마나 잘못된 지식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이 대단한 지식으로 생각하고 그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면 잘못된 생각이라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지식들이 잘못된 지식이요 부분적으로만 아는 불안한 지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지식이 참된 지식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잘못된 종교관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참된 하나님의 빛 앞에 서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두 가지 면에서의 실수를 범합니다.  하나는 어두움 속에 살기 때문에 자신의 지저분한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알량한 자신의 선행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빛 앞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지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서 배운 잘못된 지식이 최고인줄로 착각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들은 잘못된 세상의 지식이나 교회에서의 잘못 들은 설교를 진리로 알고 그렇게 사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착각 때문에 자신의 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무시하고 외형적인 종교적인 활동으로 자신이 의롭다고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밝은 빛 앞으로 나와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흉한 모습과 잘못된 지식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는 인생이 얼마나 흉악하고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사는 인생들이 얼마나 교만하고 얼마나 불행한 인생인가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형식적인 종교인에서 참된 기독교인이 되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본문 4절 말씀에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내려와서 사울을 비추었을 때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사람이며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은 그 앞에서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땅에 엎어져버렸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자신을 버리고 굴복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교만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그저 하나의 피조물일 뿐인데 그런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 서려고 하는 교만함이 문제입니다.

 

  그 교만의 극치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가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싫어하는 우상을 섬기는 것을 아주 쉽게 하고 하나님보다 자신의 욕심들이 우상이 된 것이 오늘날 인간의 모습입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것도 결국 이 교만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이 교만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함으로 교만함이 최고의 수준에 다다른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하지만 겉으로는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높여서 교만함을 나타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거부하는 악한 행동입니다. 이런 교만한 마음이 있는 한 참된 기독교인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알지 못하고 고개를 들고 있는 한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교만함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사람 만나서 좋은 점에 대해서 칭찬만 받고 살기 때문에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삽니다. 세상이 좋아져서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살 수 있고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자리에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자신이 좋은 사람인라고 착각하면서 삽니다. 옛날에는 어른들이 무섭게 조금만 잘못을 해도 야단을 치고 매를 들고 가르쳤지만 요즘은 인권이니 뭐니 해서 아무리 잘못을 해도 나무라지 않습니다.
 

  심각한 죄를 저질러도 그것이 정신병이라고 인정해서 처벌을 받지 않게 합니다. 남자가 여자가 되려고 해도 그것이 정신적인 병이라고 하여 동정하고 말리지 않습니다. 남자가 남자와 결혼을 하고 사람을 죽여도 그런 인간의 모습을 동정하고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 아니고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인간의 생각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런 교만함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함을 버리고 가난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손을 들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진정한 복음을 발견할 수 없고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4절-5절에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고 했습니다.

 

  밝은 빛 아래 엎드려졌을 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기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음성에 사울이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대답하기를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함으로 그것이 그가 섬기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임을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박해한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은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고 천국백성이고 너희들은 사탄의 종이고 지옥에 갈 사람이라고 하면 성질을 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말을 잘 안 듣고 안 믿기 때문에 이정도로 박해하지 정말로 우리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면 우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든지 우리를 시기하여서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을 박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사울이 자신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바른 일을 한다고 한 일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박해하는 일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교회에 잘 다니고 신앙생활 잘 하고 나름대로 바르게 살고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박해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교만한 마음으로 세상의 성공이라는 우상을 섬기면서 자신이 똑바로 잘 삶으로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같고 바르게 사는 사람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박해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며 자신의 알량한 선행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함의 극치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말씀이지만 영어성경 킹제임스 버전에는 번역이 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5절 뒷부분에 사울의 그런 박해 행위에 대해서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26장에서 바울이 이 장면을 회상할 때도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는 이 말씀을 넣고 있습니다.

 

  ‘가시채’란 소를 부릴 때 쓰는 가시가 있는 채찍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가 쟁기를 이끌고 갈 때 뒤에서 주인이 채찍을 가지고 바르게 가고 빨리 가라고 재촉을 하는 것입니다. 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기분이 되게 나쁠 것입니다. 부려먹는 것도 모자라서 좀 잘못 간다고 채찍으로 그것도 가시를 박아가지고 엄청 아프게 때리니까 기분이 나빠서 뒷발질을 해서 그 가시채를 발로 찹니다. 소가 자기 깐에는 방어를 하는 것이고 반항을 하는 것이지만 방어하면 할수록 반항하면 할수록 자신만 손해가 나고 자신만 아프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반항을 합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되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지시하는 대로 가면 될 것인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다가 채찍을 맞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바르게 가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시는가보다 라고 하면 되겠지만 그렇게 깨닫고 순종하기보다는 반항을 하고 발길질을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구원의 길을 허락하시고 그 구원의 길로 가도록 인도를 하십니다. 그 길로 가면 됩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기를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동을 합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엄청난 고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살기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다 지키고 선한 일을 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울은 잘못된 유대교인에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입니다. 태양 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서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발견하고 엎드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박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이 복음을 서계만방에 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착하고 바르게살기 위해서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멸망에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천국으로 가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종교인으로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