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02)
   본문 : 엡 1:3
   제목 : 찬송하리로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그냥 우연히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만큼 살다가 죽는 것으로 알고 삽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며
  이 모든 일이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신 것을 안다면 
  그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안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을 값없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다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영광과 찬송만 돌리면 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이렇게 소홀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작년 11월쯤에 신문에 이런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식에게 “부모를 잘 봉양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재산을 물려줬습니다.
  아마 수 십 억대의 땅을 물려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유산을 물려받은 아들은 중풍을 쓰러진 어머니를 병원에 보내 버리고 병원비도 지불하지 않고 나 몰라라 하고 아버지도 모시지 않았습니다.
  아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한 아버지가 아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유산으로 물려준 재산을 돌려받게 됐다는 것입니다. 

  낳아 주고 길러 주고 먹여 주고 입혀 주고 공부시켜주고 많은 재산까지 물려 준 부모님을 나 몰라 하는 이런 불효자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낳아 준 것만 해도 감사하고 길러 준 것만 해도 감사하고 그늘이 되어 준 것만 해도 감사한데 더 많은 것을 해 주지 않았다고 부모에게 불평하고 원망하고 감사하거나 섬기지 않는 불효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몰라보고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찬송하리로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1:3절 말씀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찬송하리로다"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이 외침 속에는 가슴 벅찬 감격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은혜가 너무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바울이
  너무 놀라서 너무 흥분해서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심정을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그 내용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의 내용들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가슴이 벌렁벌렁 뛰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라톤 경기의 기원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옛날에(기원전 490년)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 광야에서 그리스군대가 침략해 온 페르시아군과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침략해 온 페르시아 군대는 막강했고 맞서 싸우는 그리스 군대는 매우 약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너무나 중요해서 만약에 그리스가 그 전쟁에 지면 온 나라가 망할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전력 면에서 약한 그리스군대가 열심히 싸워서 막강한 페르시아군대를 물리치고 승리를 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그리스군의 병사가 약 40km를 달려 “우리는 이겼노라”고 아테네 시민들에게 알리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옛 이야기에서 유래가 되어 그 병사가 죽을힘을 다하여 달렸던 42.195km를 거리로 해서 마라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병사가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얼마나 벌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달려갔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겼습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을 동포들에게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기 때문에 그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에 그만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중요성과 그 내용을 전하는 기쁜 마음을 이해해 보기 위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바울의 심정은 승전보를 알리려고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던 그리스의 병사보다 더 기쁘고 흥분이 된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그 기쁜 소식은 14절 말씀까지 계속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축복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시면서 우리도 바울과 같은 흥분된 마음으로 '찬송하리로다' 라고 외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
  오늘 본문 말씀에는 찬송받으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세가지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복은 헬라어 "엔(εν)"이라는 전치사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엔"이라는 말은 "...안에, ...위에,  ...말미암아"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입니다.

1)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지는 복입니다.
  사도 바울이 즐겨 사용하던 단어가 바로 이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아주 귀중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성도라는 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 '그리스도안에서' 신령한 복을 보고, 
  4절에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것을 보게 되고, 
  6절에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은혜를 받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 받은 것을 보고, 
  9절에서 '그리스도안에서' 예정되었고, 
  10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을 이루고, 
  11절에서는 '그 안에서' 기업이 되고, 
  13절에서는 '그 안에서' 성령으로 인치심을 입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는 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우리가 있다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큰 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을 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낭패와 실망뿐입니다. 
  좌절과 멸망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고, 또 풍성한 과실을 맺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큰 복을 알게 될 때, 찬송하게 되어있고, 또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그 자체는 찬송하는 삶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늘 찬송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이 복은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우리가 대통령에게 상을 받아도 저절로 노래가 터져 나옵니다. 기뻐서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이 학교에서 주는 상 하나만 받아 와도 기분이 좋아서 흥얼거립니다. 
  상의 가치가 크면 클수록 더 흥얼거립니다. 

  가치를 알아야 참된 찬송이 나옵니다. 
  이제 갓난 어린아이에게 대통령이 상을 준다고 뭐 그렇게 그 아이가 기뻐하겠습니까? 대통령이 뭔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 아이에겐 대통령이 주는 특별상보다 엄마의 젖꼭지가 더 좋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면 하나님이 주신 그 신령한 복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 복을 받고도 찬송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정말 바로 알 때, 그 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크게 다가오는 지는, 여러분이 얼마나 찬송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하면 됩니다. 


3)이 복은 신령한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복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복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으면서도 가장 확실하고 가장 영원한 복입니다. 
  땅에 속한 육신적인 복은 불완전하고 상대적이고 지나가는 복입니다. 

  건강, 재물, 자식이 잘되는 것 다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것을 간구할 때 역시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 땅에 속한 복은 낡아지고, 없어지고, 썩고, 늙어지고, 병들고, 불타고, 도둑맞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색깔도 변하고, 내용도 달라집니다. 값어치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낡아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 썩지도 않고, 도적 맞을 염려도 없습니다. 
  이 신령한 복, 이 하늘에 속한 복은 틀림없는 복이요, 확실한 복이요, 영원 무궁한 복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후4:18에서 무엇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그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신 것 때문에 찬송하라고 선언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3.찬송은 신령한 복을 받은 자의 제일가는 목표
  우리는 하나님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받는 은혜도 다 받았고 그리고 특별한 구속의 은혜까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찬송이 사라집니까? 
  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기억하지 못해서입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에는 관심이 적고, 땅에 속한 복만 받으려고 집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에게 땅에 속한 복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주시면 좋지요. 
  그러나 우리는 바울처럼 하늘에 속한 그 신령한 복 때문에 기뻐하고 찬송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왜 우리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때문에 찬송을 해야 합니까? 
  빌3:20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때문입니다. 
  이 신령한 복을 이미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찬송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남들이 가진 재물이 조금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늘 보고에 가득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남들이 누리는 건강이 조금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영원한 건강의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시는 아픈 것도, 저는 것도 없는 삶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인기도 없고 사랑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그 무엇과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면서 사랑해 주시고 계십니다. 

  남들이 먹는 좋은 음식이 없습니까? 
  가장 귀한 하늘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남들처럼 그렇게 값비싼 옷을 입지 못하셨나요? 
  사61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구원의 옷, 의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사61:3)"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의 옷을 입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왜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향하는 길에서 찬송할 수 있습니까? 
  왜 바울과 실라가 죽도록 두들겨 맞고 감옥 안에서 찬송을 부릅니까? 
  왜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제일 먼저 찬송하자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신령한 복,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고, 그 신령한 복중에 하나인 찬송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령한 옷, 찬송의 옷을 입은 자답게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삶 속에 이 세상에 속한 것 아무 것도 없어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것 때문에 늘 감사의 찬송, 늘 샘솟듯 하는 기쁨의 찬송, 늘 충만한 은혜의 찬송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권장로라는 분이 사업차 스위스의 제네바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어느 한 호텔을 숙소로 정하고 그의 여장을 풀었습니다.  
  호텔 주인과 인사를 나누면서 자기가 교회의 장로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랬더니 그 호텔 주인이 머리를 허리 아래까지 굽혀 인사를 하면서 반가워했습니다. 
  호텔 주인은 자신은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기독교 신자를 무척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날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었습니다.  
  한 쪽에서 교회로부터 차임벨 찬송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하더니 사방에서 차임벨이 울려서 온 시내가 다 깨어지는 듯이 소란했습니다. 
  교회의 차임벨 소리에 잠이 깬 권장로는 시끄러워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권장로는 호텔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새벽 종소리가 시끄럽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호텔 주인은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시끄럽다니요? 우리는 새벽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민족이 복을 받고 번영하게 된 것을 되새깁니다.'

  이러한 대답에 권장로는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합니다. 
  스위스 국민은 새벽에 울리는 그 찬송소리, 그 차임벨 소리가 울릴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깨닫고 심령을 새롭게 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새벽종소리가 공해문제로 되어 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새벽을 알리는 그 찬송소리를 시끄럽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진 시대입니다.  
  
  우리 성도의 다른 별명을 붙인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찬송하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범죄한 인간은 찬송을 잃어버렸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잘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된 사람들, 곧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분의 자녀된 자들에게 제일 먼저 회복되고, 죽음의 순간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찬양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식이 없어서 엘리 제사장에게 마치 술 취한 여인처럼 보일 정도로 기도했던 한나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무엘을 낳은 후에 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놀라우신 은총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찬송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주를 위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역시 찬송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바울은 감옥에서 이 에베소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했다고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잘 살기는커녕 오히려 싸늘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온 정성을 다해 진심으로 찬송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