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2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11)
  본문 : 행 7:55-56  
  제목 :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옛날 사람들은 비교적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해버리는 것은 오히려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마음 깊숙이 간직하는 것이지 상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을 할 줄 몰랐습니다. 마음에는 있지만 그 진실한 마음을 표현할 말을 몰랐습니다. 좋으면서도 안 좋은 척 마음과 반대되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립서비스(lip-service)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립서비스는 “말을 그럴듯하게 해서 상대방이 공감하기 좋도록 하는 것”이라고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립서비스는 마음에 없는 것을 입술로만 상대방이 기분 좋게 하기 위한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진실 된 마음은 없이 그냥 기분 좋으라고 과장해서 말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말 해주고 칭찬해주는 말을 해주는 것이 좋다고 하니까 정말로 그 사람에게 있는 좋은 점을 발견하고 칭찬해주려고 하는 것 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상대방이 듣기 좋게만 하려고 거짓말하는 것을 연습합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착각 속에 빠져서 삽니다.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삽니다. 누군가가 곁에서 진정한 모습을 알려 주어야 하는데 욕먹으면서 그런 말 할 사람이 없으니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사랑은 그 마음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그런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을 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 것을 연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엄청나게 목숨 바쳐서 사랑할 것같이 말을 하지만 내일 보면 그 말이 아무 소용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다가 보니까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이 립서비스가 대세를 이룹니다. 교인들을 칭찬하는 연습을 하고 설교도 립서비스 차원에서 성도들이 듣고 기분좋아할 대목만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인기도 올라가고 그로인한 이익도 챙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찬해주고 좋은 말 해주어도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데 맨날 죄인이라고 구박이나 하고 잘못했으니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면 다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목사들이 돈을 많이 주고 설교 연습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를 바르게 전할까 어떻게 하면 진심을 공감하게 할까 이런 연습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방법만 배우다가 보니까 진심을 감추고 거짓을 이야기하는 기술자가 되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말들은 몰라도 설교에서만 진실이 있어야 하고 마음과 마음이 바로 전달되어야 하는데 립서비스와 같은 설교가 많아지고 있고 그것을 좋은 설교라고 듣고 있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문제입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 말씀은 진정한 설교자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사례를 받기 위해서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큰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대가나 이익이 되는 일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귀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설교를 합니다. 진리를 잘 못 알고 엉뚱한 길을 가고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중요한 진리를 전해주는 대가는 너무나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화를 내고 이를 갈고 돌멩이를 들고 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런 비참한 일을 스데반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육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고 설교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이 설교를 중단당하고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서 죽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위기를 맞으면서 스데반이 보여준 당당한 모습은 오늘날 진리를 말하는 설교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많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본문 55절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갑자기 왜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까요? 무슨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까요? 그냥 우연히 하늘을 우러러 볼 수도 있었겠지만 많은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본 이유는 이 땅에 기대하고 볼 것이 없어서였을 것입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스데반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들었으면 그 중에 한두 명이라도 스데반의 설교를 알아듣고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스데반을 변호해 줄만한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한 사람도 그의 편이 돼줄 마음이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한 결 같이 화만내고 이를 갈고 스데반을 죽이려고만 하지 누구 한 사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데반이 자기 육신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마음으로 하늘을 쳐다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하늘의 천군천사를 파송해서 이 못된 인간들을 바로 처벌해 달라고 하늘을 쳐다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이 로마병정을 앞세워 자신을 체포하러 왔을 때도 하늘의 천군천사 동원령을 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거셔서 죽음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도 이미 죽음을 당할 준비가 마쳐진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 다 포기하고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육신의 목숨 따위는 별 관심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가고 있는 그에게 이 세상에서 좀 더 사는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나라를 보기 위해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스데반이 이런 장면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전파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스데반이 전한 그 설교의 중요성 확인입니다. 그냥 유대교 율법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약간 우월한 정도냐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스데반이 목숨을 바쳐서 전해야 할 정도로 그 설교가 중요한 설교인가를 증명하는 것이 지금의 큰 문제입니다. 그 문제 앞에서 스데반은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한 목숨 바쳐서라도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이 복음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이 그의 설교의 목적입니다. 지금까지 한 설교가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민족의 구원을 위한 너무나 중요한 것을 선포했다는 자신감입니다.

 

2)자신이 전한 복음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자신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실성을 하나님께 확인하기 위함이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지금 제가 선포한 복음이 사실이지요? 이 사람들이 이렇게 화를 내면서 죽이려고 덤벼드는데 혹시 제가 잘못된 것을 말한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께 확인을 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실이기만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만 하면 그것이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할 핵심적인 복임이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스데반에게 있었기 때문에 스데반이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않고 왜 그렇게 뭘 모르느냐고 항의하지도 않고 화를 내며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주도 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3)성령님의 충만한 역사가 하늘을 우러러 보게 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는 것은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산다고 해도 이런 억울함을 당할 때면 당연히 화를 내고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다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그가 지금 성령이 충만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본 것은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에 충만하게 역사하심으로 세상의 일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실 때 악한 사람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심으로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스데반처럼 이런 엄청난 경우야 당하지 않지만 크고 작은 어려운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의 일을 가지고 해결하려고만 하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문제를 꼭 해결을 하고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려고 하지 말고 하늘을 우리러 하나님의 뜻을 한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한번 살펴보는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어서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 거기 아무것도 없었다면 실망이 컷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하게도 그런 스데반의 모습에 하나님께서 귀한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러러 하늘을 보았더니 거기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스데반이 감격스럽게 외칩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거기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셔서 초자연적인 능력의 눈으로 일반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영광스런 광경을 보게 된 것입니다.
 
1)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기록을 하고 있지 않아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사람의 언어로 기록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면서 가깝게 생각하고 삽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떼를 쓰기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르게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설 수도 없고 감히 어떤 말씀도 드릴 수 없는 너무나 엄청난 분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가 그동안 세상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섬기고 산 것에 대한 무한한 영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렇게 위대하신 분이시다니요 그 영광 앞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찝찝한 마음이 없도록 미리부터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너무 얕잡아보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2)거기에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외쳤던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님께서 거기에서도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만 구원하신 분이 아니라 이 우주 만물의 통치자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힘이 없으셔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힘이 없어서 사악한 유대인들에게 당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아시고 보고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이 마음 아파하는 것이 그런 부분입니다.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목사들은 교회도 부흥이 되고 자신들도 호화롭게 잘 사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은 왜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혹시 우리가 잘 못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닌가? 혹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볼 수 없는 곳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을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듣기 좋은 말을 한다고 교회로 가고 아무렇게나 해도 교회로 가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잘못된 복음을 듣고 모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탄의 종들이 자기들이 듣기 좋은 대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찾아서 가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의 생각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바른 복음을 따라 사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뭐가 잘 안 풀릴까 라는 생각을 하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 복음을 따라 주님의 곁으로 오고 있는 우리를 보고 계실 것입니다. 계획대로 잘 가고 있다고 박수를 치고 계실 것입니다. 그날이 되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래 수고했다. 내거 너를 다 보았다. 진리 따라 살기 위해서 고생하는 모습 다 보았다. 우리 눈에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셨다고 했습니다. 앉아계시지 않고 서 계신다는 말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이기 때문에 순교자를 맞이해주시는 예수님의 특별한 모습을 서계시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냥 성도로 이 세상을 살다가 주님 곁으로 가면 앉은 채 왔냐 하고 맞아주실 것이지만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순교까지 당하고 오는 순교자를 특별하게 맞이하시는 모습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순교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맞아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서 계신다는 것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아 계실 때는 심판주로 앉아계시고 예수님께서 서 계실 때는 변호자로 나타나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벌을 줄 사람이 오면 앉아서 심판을 하시고 상을 받을 사람이 오면 혹시 잘못 될까봐 서 계시면서 우리 편에서 우리를 변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서서 맞이해 주시든지 본척만척하시든지 쫓아내지만 않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뭘 한들 주님이 서서 맞이할 정도가 되겠습니까? 눈길 한번만 주신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큰 영광일 것입니다. 혹시 칭찬 한마디만이라도 해주시면 우리는 몸 둘 바를 모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우리러 하늘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그 우편에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서서 스데반을 맞이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다가 복음을 따라 살다가 어려움을 당하시고 힘든 일을 당하시면 우리러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를 맞이해 주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