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7. 광성교회 부활주일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절기1603)
본문 : 요 21:17-18
제목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7.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한복음 20장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기사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제자 도마에게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시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보고 확인하고 믿는 자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하셨고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1장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0장에서 결론을 다 말씀을 하시고 난 후에 다시 21장을 기록하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추가로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1장의 핵심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신 예수님의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 사도에게 나타나서 이 질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사는 것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 성도들이 삶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부활하신 날을 맞이해서 이 질문을 우리 자신들에게 다시 한 번 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을 하시면서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시면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졌던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1장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 이름을 게바라고 지어주셨는데 번역하면 베드로라고 했습니다. 3년 동안 내내 베드로라고 부르시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다시 베드로의 옛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다시 만나는 장면도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만났을 때와 똑같은 장면을 만들어서 만나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한 그에게 고기를 잔뜩 잡게 해 주시고 만나 주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똑 같이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에게 나타나서 고기를 잔뜩 잡게 해 주시면서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만났을 때 그 사건을 다시 기억나게 하신 후에 베드로를 만난 것이나 만나서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고 원래의 이름인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뜻이 있어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1)부족한 우리 인간을 불러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기 이전에는 그저 시골 갈릴리 바닷가의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유대교 지도자도 아니고 무엇을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고 돈이 많은 부자도 아니고 이름난 좋은 가문에 태어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그저 이름 없는 어부에 불과한 그에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찾아와서 그를 불러주시고 베드로라는 그 특별한 이름도 지어주셨습니다.
그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가 그동안 배우고 경험했던 일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 배를 타고 그물을 내리며 고기를 잡았던 그를 창피하게 만들었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간단하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해 주시는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 무릎 앞에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자기가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던 그였지만 그런 그가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은 정말로 보잘 것 없으며 알고 있는 지식도 별 것이 아님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좀 독특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독특한 성격이 때로는 장점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단점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남들보다 성격이 급하고 강한 그는 늘 망설임 없이 무엇이든지 앞장서서 했습니다. 신앙고백도 남들보다 먼저 하고 무슨 일이든지 앞장서서 잘 해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보니까 실수도 많이 하고 큰소리도 잘 치고 좀 교만하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살피기보다는 자기의 뜻을 먼저 나타낼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베드로는 자신의 발은 절대로 씻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야 된다고 말씀을 하셨을 때도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다가 혼이 났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예언하시자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큰 소리를 쳤던 사람입니다. 그런 베드로의 성격을 아시고 베드로에게 다시 한 번 처음 그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겸손하게 엎드리고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나타내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 매를 맞고 망하게 된 원인은 그들의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별 볼 일 없는 그들을 선택해 주셨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구원을 해주셨는데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잘나서 똑똑해서 그렇게 해주신 것으로 알고 교만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평가는 유대인들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아 곧아서 교만하고 마음으로나 귀로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지 못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교회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와 사랑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신약교회의 핵심 인물인 베드로가 유대인들의 전철을 밟아서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안 되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기 전에 초라한 모습을 늘 기억하면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이런 엄청난 신분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에 오기 전에 우리는 사탄의 종이었고 멸망으로 달려가는 불쌍한 인생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2)과거에 지은 죄를 생각하고 그 죄 사함을 받았음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을 하실 때 그냥 아무데서나 아무렇게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을 드린 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 기적을 다시 체험하게 만드셔서 과거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했던 그 고백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나타나기 전에 거기에다가 숯불을 피워놓고 계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이 숯불 앞에서 기억하기 싫은 좋지 않은 추억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혀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셨을 때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다가 거기 마침 뜰 가운데 불을 피워놓고 있었는데 거기서 불을 쬐고 있다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때 돌이켜서 예수님을 보시던 그 눈빛을 베드로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정의 눈빛으로 이해의 눈빛으로 봐주시던 그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바로 그 숯불 앞에서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렇게 질문을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야 너 회개해 나를 모른다고 그것도 저주가지 하면서 부인을 해 당장 잘못했다고 회개하고 다시는 그런 짓 안하겠다고 빌어라 그러면 용서해주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그것도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을 하시면서 그 죄가 이미 다 용서가 되었다는 것을 무언중에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너무나 험하고 무섭고 우리들은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아서 엄청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지만 때로는 세상의 유혹에 세상의 협박에 넘어가서 성도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들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너무 자학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를 이미 다 아시고 깨끗하게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더러는 죄 가운데서 죄를 지으면서 살 수 밖에 없지만 늘 우리를 이해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본문 17절 말씀에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세 번째 이르시되”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서 앞에 이미 같은 질문을 두 번 더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신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위대한 믿음이며 오직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믿음이 진실한 고백이 되게 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이 진실한 믿음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 되는 것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 때 그 믿음은 그저 형식적인 믿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데 이 세 물음에는 약간의 차이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비교급으로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고 그 다음 두 질문은 이 사람들보다가 없이 그냥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은 몇 가지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으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또 여기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로 이해를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네 동료들 네 가족 형제들 네가 가장 가까이하는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이 아닌 물건으로 해석을 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으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 해석을 한다고 해도 큰 의미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최고의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경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을 하고 또 해도 부족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보다도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보다 우리의 부모님보다 아내보다 남편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돈이나 명예나 세상의 행복이나 그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먼저일 때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의 차이는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 쓰신 사랑이라는 단어와 베드로가 대답할 때 쓰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다른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으실 때 쓰신 사랑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가파오(ajgapavw)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대답할 때 쓴 사랑이라는 단어는 필레오(filevw)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를 다 사랑이라고 번역을 하지만 헬라어에서는 그 용도가 조금 다릅니다. 아가파오는 신적인 사람을 말하고 필레오는 친구 간에 사랑이라고 말을 하지만 꼭 그렇게 구별되지는 않습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는 이 두 단어를 아가파오는 100%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필레오는 60%정도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100%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예 60%정도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두 번이나 그렇게 대답을 하니까 예수님께서도 강도를 낮추어서 그래 그러면 네가 나를 60%정도로라도 사랑하느냐 라고 하자 베드로가 예 제가 그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은 예수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순도 100%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그렇게 100%의 사랑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런 100%의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능력도 없고 그런 사랑을 할 마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지만 부족한 사랑으로라도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그 부활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늘 그렇게 질문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기 때문에 거기 대답을 해야 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여기 내 양을 먹이라에서 내 양은 예수님의 양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너무나 연약해서 마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양 같아서 누군가는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서 교회라는 곳에 모아두셨습니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누군가는 무엇을 해야 합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누군가는 채워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할 때 단순히 목사가 되어서 영적인 말씀으로 그들을 먹이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영적인 말씀을 전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서로 맡아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설교를 하고 누군가는 장소를 제공하고 누군가는 돈을 내고 누군가는 서로에게 위로 자가 되고 누군가는 본을 보이고 누군가는 헌신을 하고 교회가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우는 일을 양을 먹이는 일에 속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은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을 하다가 주님나라에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길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따를 것인가를 마음에 결정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결정의 모범을 18절에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 사도가 어떤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교훈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대로 우리의 뜻대로 산다면 누가 주님의 나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헌신을 하고 희생을 하면서 주님의 양을 먹이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길이라고 해도 때로는 우리가 가기가 너무 힘이 들어 보이는 길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면 그 길을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힘든 길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고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따른다는 결심을 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 앞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도 주님의 양을 먹이는 길 즉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면 최선을 다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