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25.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86)
본문 : 행 6:1-2
제목 :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입니다.
“1.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제가 군대에서 먹던 건빵이 생각나서 가끔은 건빵을 사다가 간식으로 먹습니다. 이왕에 건강에 좋은 것을 먹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보리로 만들었다는 보리건빵을 사다가 맛있게 먹었습니다. 보리가 몸에 좋다고 하니까 좋은 것 먹는다고 기쁨으로 먹었습니다.
거의 다 먹고 나서 봉투에 인쇄되어 있는 성분 분석표를 보았는데 보고나서 실망을 했습니다. 실망정도가 아니라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보리건빵에 보리가 2.5% 들어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수입산 밀가루가 주성분이고 보리는 겨우 2.5%인데 그것을 보리건빵이라고 하고 팔고 그것이 보리로 만든 것인 줄 알고 먹었습니다.
그런 것이 어디 한 둘입니까? 전에 바나나 우유를 좋아했는데 바나나를 갈아서 만들었겠지 했는데 바나나는 하나도 안 들어 있고 맛만 바나나 향을 첨가하고 그것을 바나나 우유라고 했습니다. 소비자들이 항의를 하니까 이제는 바나나 맛 우유라고 이름을 고쳤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이런 비슷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무늬만 기독교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해서 사람들은 교인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그 마음에 믿음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믿음은 있는데 그 믿음이 그 사람의 삶에 보리건빵처럼 2.5%정도만 있고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에 있어서 믿음은 최하위에 속하고 이 세상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도 이름만 교회고 무늬만 교회처럼 보이면 안 됩니다. 건물 위에 십자가의 종탑은 웅장하게 세워져 있는데 십자가의 복음은 전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과 반대되는 것들을 설교라고 하거나 약간 가끔 복음을 설교하기는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을 주로 가르친다면 그것은 바른 교회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6장에 들어서면서 교회가 해야 할 다른 일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와서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을 구제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구제가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도들이 그 일을 하다가 보니까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소홀해져서 말씀 전하는 일을 제쳐놓고 구제를 일삼아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일꾼을 뽑아서 그 일을 하게하고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념했다는 것입니다.
그 서론이 오늘 읽은 1,2절의 말씀입니다. 왜 일꾼 즉 집사를 뽑는가 하니 구제하는 일들을 맡기고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구제는 교회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중심이어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1절과 2절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구제에 빠지므로 원망하니
본문 1절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자 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할 일들이 많아졌고 그 중에 가정이 어려워서 먹을 것을 공급해주어야 할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하다가 보니까 어떤 사람은 구제를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받지 못하기도 해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원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1)제자가 더 많아짐
본문에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라고 했습니다. 원래 제자란 예수님의 열두제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열두제자들의 할 일은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제자들 즉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의 수가 3천명이나 되었고 뒤에 가서 또 5천명이나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 5천명에서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3천명이나 5천명이나 더 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만방에 전하기 위해서 귀하게 준비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곧이어 일어난 박해를 피해서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되고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아주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단순히 사람의 수효가 많다는 것은 큰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복음전파를 위해서 어떤 일을 담당했느냐가 중요합니다.
2)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사람
그렇게 많아진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에 이주해서 살면서 헬라문화를 배우고 헬라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모든 나라들을 지배했지만 그보다 먼저 지배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헬라문화 속에서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파 사람들이란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본국을 떠나지 않고 이스라엘에 살면서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같은 믿음을 가지고 형제로 지내기는 하지만 그들의 생각 가운데 서로 이질감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고 서로를 경계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3)공평하지 못한 구제에 대한 원망
당시 유대교 내에도 구제 사업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곁에 늘 가난한 자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를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따라서 기독교에도 구제 사업이 있었을 것이며 특별히 예루살렘교회에는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세상의 것들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구제는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 중에는 특별히 먹을 것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고 또 모이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함께 식사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챙기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일이 식사를 공급하는 사람도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고 교회의 조직력도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로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은 타국에 살다가 돌아온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고향에 살던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잘 알았을 것이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좀 잘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파 유대인들은 일부러 차별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없을 때 자기들만 안 준다고 오해를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원망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공평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망이 나오고 불평이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이런 비슷한 현상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다 공평한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특권층이 있어서도 안 되고 푸대접을 받는 사람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매사에 이렇게 모두에게 공평하게 되지 않는 일이 많기 때문에 교회 안에 원망도 있고 불평도 많이 있고 이런 일이 커지면 교회에 분쟁이 일어납니다.
인간 사회의 일은 꼭 크고 대단한 일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큰일은 오히려 담대해지고 또 서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꼭 작은 일에 별 것 아닌 일을 가지고 큰 싸움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은 일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 합니다.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서로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작은 일을 가지고 오해를 하고 원망을 하는 일도 없도록 너그러운 마음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너무나 중요하고 위대한 일 때문에 교회에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관계 잘 하고 사람들에게 좀 칭찬이나 받고 그런 일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천국을 차지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일을 사소한 것들을 가지고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
본문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이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런 중요한 일을 제쳐놓고 사람들을 접대하는 일에 매달려 있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일을 할 것이 있는데 그 일을 하지 않고 그보다 중요하지 않는 일에 매달려 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1)사도들이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함
우리나라 말에서 ‘일삼다’는 말은 그냥 취미나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직업처럼 전념한다는 뜻입니다.
‘일삼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디아코네오(διακονέω) 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의 뜻은 먼지가 일어날 만큼 분주하게 움직인다는 뜻으로 섬기다, 봉사하다, 수종들다. 등으로 해석이 되는 단어입니다.
‘접대’라는 말은 옛날 성경에서 ‘공궤’라는 말로 번역했는데 잘 안 쓰는 단어이기 때문에 접대로 번역을 한 것 같습니다. 접대라는 말은 헬라어에서는 그냥 탁자라는 뜻인데 일삼는다는 말과 합하여 식탁 봉사를 한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특별한 것은 ‘집사’라는 말도 다아코네오에서 나왔고 구제라는 말도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사라는 말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데 봉사하고 구제하는 사람이 집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시의 구제는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었고 먹을 것을 대접하는 것은 당시의 최고의 대접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귀한 시대였고 먹지 못해서 죽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먹을 것이 귀한 시대이고 먹는 것이 목숨과 연결 된 시대였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도 중요하지만 우선 먹고 사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한 일입니다.
사실 복지나 구제들이 다 교회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하나님 사랑 다음으로 이웃 사랑이 중요한 것이었기에 교회가 이런 구제 사업에 나서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또 고아원이나 복지시설을 세우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런 일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제를 하는 일이나 사람들의 복지에 관한 일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이런 것을 일삼아서 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에게 있어서는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의 중요성
사도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러 제자를 삼으시고 훈련을 시키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그 소중한 일을 제쳐놓고 다른 일을 그것도 일삼아서 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였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란 성경전체의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예수님을 통하여 주시는 구원의 복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말씀이라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구원을 하셨는가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여기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을 해서 사도들에게 그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명령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나라 즉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가장 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인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당시의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채찍으로 때리고 협박을 하여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 복음을 전했습니다. 육신의 양식보다는 생명의 양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선 필요한 것은 육신의 양식입니다. 육신의 양식이 없으면 육신의 생명이 살 수 없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해서 먹고 살 양식이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을 위해서 산다고 육신의 일을 팽개쳐 버린다면 그것은 잘 못입니다.
우리가 모든 시간을 다 바쳐서 생명의 양식을 먹는 것은 아닙니다. 엿새 동안에는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이 먹고 살아야 하고 그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문제는 생명의 양식을 받는 그 시간까지 육신의 약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 앞에 와서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제일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재건교회나 고신의 교회들은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주일을 지키는 것을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주일날 세상의 일을 위해서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많이 무디어졌습니다. 복잡한 세상을 살다가 보니 어쩔 수 없이 주일날 교회에 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차가 다니지 못하고 전기 불을 켤 수 없고 물을 먹을 수 없고 갑자기 사고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할 수 없는 부득이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주일을 빠지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핑계로 교회에 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오지 않는 것은 생명의 양식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주일마다 부흥회를 하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하여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생명의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씀을 듣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일보다 영원한 천국의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현재 일어나는 일이 더 중요하게 생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나면 이 세상의 일은 영원한 천국의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원한 천국의 일에 비하면 이 세상의 일은 잠깐 하룻밤의 꿈과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눈 깜박하면 지나가버릴 짧은 시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천국을 말씀으로만 들었고 직접 가보지 않아서 믿음이 부족해서 실감을 하지 못해서 이러고 사는 것입니다. 한번 가서 보고만 오면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인데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긴가민가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제쳐두고 접대를 일삼는 것에 마땅치 않은 일이라고 했듯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영혼을 위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제쳐두고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천국을 향해서 가는 이 길을 떠나서 짧고 허무한 이 세상의 일에 목숨을 걸고 사는 것은 참으로 헛된 삶을 사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구제도 하고 접대도 하고 서로 봉사도 해야 하는 곳입니다. 세상의 일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만큼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일이고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듣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