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21.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69)
  본문 : 행 4:32-35   
  제목 :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32.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나와 같이 한마음 한 뜻을 가진 사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과 한마음 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만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의 주변에는 그 사람을 좋아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내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없고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행복하게 살려면 내 생각만 하지말고 다른 사람과 한마음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는 진리의 길은 외롭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그런 외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과 한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은 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악 속에서 사탄의 사주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과 한마음 한 뜻이 되어서 먹고 마시고 죄를 함께 짓는다는 것은 멸망으로 달려가는 비참한 길이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한마음 한 뜻이 되자는 것이고 위대한 믿음을 알고 그 믿음을 진실 되게 고백하는 성도들과 한마음 한 뜻이 되자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힘없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힘없고 초라한 소수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그들은 막강한 세상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핍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하였습니다.
 

  그 원인은 그들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충만하게 역사하시고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한마음과 한 뜻을 가지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힘없는 소수였지만 성령님께서 함께 하실 때 한마음 한 뜻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매주 이렇게 우리가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의 위대함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우리 가운데 아직도 그 위대함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것을 압니다.
  열심을 내지 못하고 뒤에서 구경꾼처럼 서성거리기만 합니다.
  나름대로 자기를 합리화 하고 변명을 하기는 하지만 그런 자기 합리화와 변명들이 이 위대한 믿음을 알고 믿는 사람으로 보기에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아무 날 아무 곳으로 오면 조건 없이 그냥 100억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사를 제쳐놓고 그 시간에 맞춰서 그곳으로 가야 하겠지요?

  그런데 핑계를 댑니다. 제가 좀 바쁘니까 갖다 주시면 안 되냐, 장소를 좀 가까운 것으로 옮겨 달라, 현금은 세기가 힘드니까 수표 한 장으로 달라, 이런저런 핑계와 조건을 제시합니다.

  저 같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조건을 내걸다가 그 사람 마음이 바뀌어서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릴 수도 있고 아예 계획을 취소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아무 조건이나 핑계 없이 꼭 그 시간에 그 자리에 갈 것입니다.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거나 핑계를 대는 사람은 100억의 위대함을 잘 모르거나 그 사람을 믿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그런 일을 해 이는 분명히 나를 이용해서 뭘 빼앗으려는 사람일 것이야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서 그 자리에 가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의 위대함을 알지 못해서 믿지 못해서 저와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나를 이용한다는 생각을 하면 예수님을 믿지도 못하고 은혜도 받지 못합니다.

 (이상규 교수님 추천사에서 양목사 설교는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설교라고 평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계속해서 성령님이 충만하여 한마음 한 뜻이 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지난주에는 한마음 한 뜻이 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한마음 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힘 있게 전파를 하고 성도들은 그 전파되는 복음에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알고 전파하고 그 일에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들이 가진 믿음이 위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알고 고백하고 그리고 어떻게 그 고백의 진실함을 삶을 통해 나타내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본문 32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리고 34절과 35절의 말씀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한마음 한 뜻이 되어서 복음에 은혜를 받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힘 있게 하니까 삶의 변화가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이 물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물건을 통용하면서 자기 재물을 조금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밭이 있는 자와 집이 있는 사람은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다주었고 사도들은 그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니까 그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이 다 함께 잘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철저하게 개인주의이고 이기주의자들입니다.
  내 물건 내 재산 철저하게 챙기고 남에게 주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하거나 도와주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재물을 착취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종교를 이용해서 남의 재물을 빼앗아 부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은혜를 받고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고 믿음을 고백하고 나니까 사람이 180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재물을 교회 앞에 내어놓고 공동의 재물로 함께 사용하게 하였고 집이 있는 사람은 집을 팔고 밭이 있는 사람은 밭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집이 한 채 밖에 없는 사람이 자기 사는 집을 팔아버렸는지 밭이 자기 농사지을 밭 밖에 없는데 다 팔아버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자기가 살지 않고 더 가지고 있는 집을 팔았고 많은 밭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만 먹고 살기에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이 그 밭을 팔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살 집도 없이 농사지어서 먹고 살 기본 밭도 없이 다 팔아버렸다면 세상을 살기를 포기한 이상한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너무 많이 가짐으로 다른 사람이 가난해지고 먹고 살 것이 없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지나치게 자기의 재물을 많이 소유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니까 좀 마음이 놓이실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집을 두 채 가졌거나 땅을 많이 사 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있는 것 전부 팔아서 내어놓으라고 하면 신앙생활 할 사람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 남는 것, 없어도 될 것을, 욕심 부리지 말고 팔아서 내어놓으라고 하니까 마음이 좀 놓입니다.  

  그러나 여유가 있어서 남는 것이든지, 필요가 없는 것이든지,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서 내어놓고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함께 나누어  쓴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유무상통의 삶은 성도의 기본자세입니다.

 

  유무상통[有無相通]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있는 사람은 자기의 있는 것을 내어놓고, 없는 사람은 그 내어놓은 것을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도들이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있는 자들은 그것을 팔아서 가져오고, 없는 자들은 그것을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다고 했는데 그런 삶을 유무상통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어느 것 하나도 불필요한 말씀이 없고 어느 것 하나 덜 중요한 말씀은 없습니다.
  모든 말씀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보여줌으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되며 
  그 중요한 것을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에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유무상통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고
  또 바나바라는 사람의 경우와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라는 사람의 경우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이런 삶이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유무상통의 삶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기본자세라고 할 만큼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인 만큼 바르게 알고 바르게 실천을 해야 합니다.
  이 유무상통의 삶을 잘 못 이해하여서 잘못된 삶을 사는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1)유무상통이 시급한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원리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신다고 믿고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시면 새로운 세상이 되는데 그까짓 이 세상의 집이나 밭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여 다 팔아서 교회에 가지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는 그런 시급한 종말론을 가지고 이판사판으로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끔은 그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엉뚱한 일을 하긴 했지만 그런 사람이 주류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교묘히 이용한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데 재산 가지고 있어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니까 팔아서 교회에 바치라고 합니다.
  그 필요 없는 것을 자기는 받아서 무엇을 하겠다고 자꾸 쌓아두는데도 성도들은 그것을 모르고 팔아다 바쳤습니다.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아닌 이단들도 교묘하게 속입니다.
  교회에서 헌금을 하라고 하고 십일조를 하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헌금 안 받는다고 속여서 끌고 갑니다.
  헌금은 안 받는데 어떻게 꼬우는지 모든 재산을 다 바쳐버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이 유무상통의 삶은 가진 재산을 다 팔라는 것이나 이 세상의 삶의 터전을 없애버리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유무상통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자본주의에서 오래 살아보니까 자본주의 사회체계에도 많은 문제점들이 있음을 압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잘 사는 사회가 자본주의 정신인데 
  그것이 잘못되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오히려 못 살고 
  일을 하지도 않는 사람이 부모를 잘 만나서 혹은 머리를 잘 돌려서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정신으로 분배를 잘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공평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도 조사해보면 자기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별도의 공동체를 만들어서 함께 살려고 합니다.
  그런 공동체의 삶을 주장하는 이단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공동체나 이단 집단에도 결국은 교주나 주동세력은 잘 살고 일반인은 노동만 하고 착취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유무상통의 삶은 그런 체계를 가진 세상을 만들라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그런 세상을 만들어서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3)유무상통은 무책임하게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주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 중에는 몸이 불편하여 스스로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머리가 똑똑하지 못하여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보통 사람들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일시적인 실수로 이런저런 이유로 세상을 살기 힘든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멀쩡하게 건강하고 똑똑하고 노력만하면 살 수 있는 사람인 데도 불구하고 
  게으르고 힘든 일은 하기 싫어하고 남에게 도움만 받으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까지 피난처를 주고 도움을 주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자녀에게만 의지하고 도움의 손길만 바라고 자기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일마저 하지 않고 빈둥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무상통이 그런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들에게까지 혜택을 주고 잘 살게 해주어야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유무상통의 삶을 살라고 하셨으니까 나는 아무 것도 없으니까 나를 먹여살려주라고 한다면 그 공동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 시대 같다면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만 있어도 오천 명을 먹일 수 있으니까 염려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비상시대가 아니고 평상시대니까 없는 사람끼리 모여 서 남의 손길만 바라고 있으면 다 같이 굶어 죽는 것입니다.

 

  성경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개미에게 가서 배워서 열심히 일하라고 합니다.
  심지어 게으른 자를 악한 사람으로 취급을 합니다.

  부지런해야 먹을 것을 얻고 자기도 살고 
  부지런해야 남을 도와줄 것도 있고 
  부지런해야 주님의 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짐만 될 뿐이고 아무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4)유무상통은 가진 자들의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편한 대로 자기가 유리한 대로 해석을 합니다.
  유무상통의 삶을 살라고 하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남의 것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고 가진 자들이 내어놓지 않음을 공격하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훈은 평생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사는 사람들의 편에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자들이 그 가진 것을 사용할 때 어떤 자세로 사용을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자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들이 더러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이 든다는 말씀도 있고 자기를 위해서 쌓아둔 사람을 어리석은 부자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와 재물을 복으로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 부를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남의 것을 착취하거나 빼앗아서 부자가 되었다면 그 부자는 나쁜 부자입니다.
  그 부를 자기를 위해서만 사용을 할 때 사용하지도 못하고 쌓아두기만 할 때 그 부는 오히려 가난한 자보다 못한 부자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땀을 흘려서 부자가 되고 그 재물을 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부자는 복이 있는 부자입니다.
 

  이런 정직한 부자들의 삶을 이야기 할 때 유무상통의 정신으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부와 재물을 가지고 자기만 먹고 살겠다고 쌓아두었다가 쓰지도 못하고 죽는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필요한 곳에 적절히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교회를 위해서 교회 안에 어쩔 수 없이 가난해 진 사람들을 위해서 쓰라는 것입니다.
 

5)유무상통의 삶에서 오늘날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헌금생활일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에 보면 성도들이 교회에서 헌금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없는 가운데 억지로 인색하게 헌금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넉넉한 가운데서 너그럽게 연보를 하는 것을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넉넉한 살림 가운데서 즐거운 마음으로 헌금을 하는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헌금의 법칙을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농사의 법칙과 같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없으니까 헌금 안 해도 된다. 헌금은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 어려운 사람은 헌금 안해도 된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거나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자세는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을 해서 헌금 할 돈이 있게 하고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넉넉한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는 것이 복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넉넉함의 헌금이 심는 것만큼 더 많이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법칙이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지 않으면 그 사람은 농부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성도가 헌금을 하려고 노력을 하지 않으면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렵지만 헌금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더 많이 헌금하기 위해 돈을 벌려고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성도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런 노력이 없는 사람은 자신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남을 위해서 사는 일에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일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유무상통의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교회를 위해서 교회 안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거기에는 가진 자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남을 위해서 내어놓을 줄 아는 선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가진 넉넉함을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금하고 헌신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