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45)
본문 : 행 3:6-10
제목 : 하나님을 찬송하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제가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하면서 많은 책들을 참조합니다.
칼빈주석을 비롯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를 비롯한 여러분들의 강해설교를 참조합니다.
그 중에 한 분이 김홍전 목사입니다.
그리 많이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신학박사로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을 하시고 바른 믿음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사도행전 3장부터 시작되는 제 2권을 “순결하고 능력 있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출판을 했습니다.
교회가 능력 있는 교회가 되려면 순수하고 순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불신 사회의 존경은 고사하고 빈축을 사고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는 이유는 교회가 불순물을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순결해질 때 교회답게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순결은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성경의 핵심이고 교회의 핵심인데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없어지고 다른 잡다한 것들이 많이 들어와서 교회가 변질이 되고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능력도 없고 세상의 지탄이나 조롱을 당하는 이상한 단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짓선생들이 양의 탈을 쓰고 교회에 들어와서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서 성도들을 유혹하여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얼마나 교묘하게 속이는지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는데도 그 내용은 성경과 반대되는 것이고 우리가 가야 할 반대쪽으로 우리를 끌고 감으로서 교회도 망치고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도 망치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경의 핵심이 구원의 도리를 경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무시하고 엉뚱한 믿음을 가지고 엉뚱한 목적으로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진리를 바르게 알고 바른 목적을 가지고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날 때부터 서지도 걷지도 못하고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며 살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병자가 고침을 받은 사건이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잘못이해하면 교회를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나면서부터 걸을 수 없는 한 병자를 등장시켜서 그를 고쳐주는 과정을 통해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교회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에 잘 살펴보아야 할 사건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런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서 구제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차별대우를 받지 않게 해 주고 먹을 것이나 생활비를 받게 해 줌으로서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합니다.
교회가 그런 좋은 일을 할 때 세상 사람들은 좋아하고 박수를 보내주고 그런 일을 외면할 때 교회가 할 일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 선교사들을 통해서 많은 구호물자들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학교도 세워주고 병원도 세워주고 고아원 같은 복지시설도 세워주었습니다.
그 때는 우리나라가 정말 못사는 나라였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너무 필요했고 그런 사업들을 통하여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라고 하면 아 그런 일을 하는 곳이 교회이구나 하고 생각을 해버립니다.
그런 일이 교회가 하는 일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핵심은 아닙니다.
또 우리나라에 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병원에 갈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로 병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시작될 때 하나님께서 특별한 기적적인 역사로 병자들을 치료해줌으로서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도움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명령을 하면서 병자들을 기도로 고쳐주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기도를 받는 사람들이 다 고침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 두 사람 고침을 받고 좋아하지만 고침을 받지 못한 수백 수천 명들이 자신의 그러한 믿음이 없음에 대해서 오히려 더 실망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큰 흐름 즉 핵심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 해석을 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큰 틀을 놓치고 부분적인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 불순물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교회들이 많아졌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구속사이고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라는 순수한 복음이 교회 안에 있어야 순수한 교회이고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본문 7절 말씀에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병든 자를 향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 명령을 들은 병자가 자기 스스로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주니까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일어날 수 있게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하는데 쓰임을 받은 누가는 의사출신이라고 했습니다.
의사의 눈으로 그 환자가 나음을 받고 일어서는 장면을 보고 기록을 한 것입니다.
날 때부터 서지도 걷지도 못하고 40년이나 앉은뱅이로 지냈는데 일어나라고 한다고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줘야 일어날 수 있고 손을 잡고 일으킨다고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능이 회복되어야 하고 근육이 살아나야 하고 피가 돌고 신경이 돌아야 일어서는 것이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가 요즘 의사 같으면 좀 더 의학적으로 설명을 했을 것입니다.
뼈가 펴지고 근육이 살아나고 피가 돌고 힘이 생기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의사지만 옛날 의사였고 또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본문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에 간단히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간단한 기록이지만 이런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게 했습니다.
그가 간단히 명령만 내린다고 손만 잡아준다고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면서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뭐가 좀 잘 되어갈 때 인생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합니다.
돈이 많고 권력이 크고 주변에 좋은 일들이 많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한 사람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런데 인생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60대가 되면 많이 배우고 못 배운 사람의 차이가 나지 않고 70대가 되면 건강관리를 잘한 사람과 못한 사람과 차이가 없고 80대가 되면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이 차이가 없고 90대가 되면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차이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우리가 가진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배움도 돈도 건강도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성경을 통해서 알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토기장이가 흙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었다가 마음에 안 들면 깨어버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흙으로 만든 그릇과 같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연약한 존재가 잘난 척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고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없다고 하고 무시하고 멸시합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죽은 후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그동안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했던 죄에 대해서 엄청난 벌을 받을 저주와 형별의 대상이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인생이 조금 많이 배웠다고 조금 많이 가졌다고 선한 일 좀 했다고 큰 소리를 치면서 삽니다.
그런 인생들을 향해서 우리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이며 그 죄로 인해서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아야 하는 인생들이며 스스로 선한 일도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며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브라이언 채펠이라는 사람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라는 책을 썼는데 구속사적인 강해설교에 대해서 비교적 좋은 글을 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타락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The Fallen Condition Focus)가 설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이 구속사라고 한다면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인 책이라고 한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하는 타락한 인생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최악의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앉은뱅이를 볼 때도 그런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일어설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앉은뱅이로 태어난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이렇게 설수도 있고 걸을 수도 있는 사람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일어설 수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걸어올 수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스스로 일어설 수도 걸을 수도 없는 불쌍한 우리를 일어나서 걷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이나 철학이나 선행이나 고행이나 심지어 기도와 같은 신앙생활이라고 해도 그 자체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의 발과 발목에 힘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그가 믿음만 가지고 일어날 마음만 먹으면 일어날 수 있게 다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가 진리를 깨달아서 우리 스스로가 일어나고 주님께로 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믿음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일어나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서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우리들을 불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켜주셨습니다.
새 힘을 주셨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본문 8절 말씀에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라고 했습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주니까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뛰어 서서 걸으며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가 그를 고쳐준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고쳐주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평생 앉아 지내다가 갑자기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되었는데 그 성한 몸으로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우선 부모님에게 이 소식을 일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부모님이 불구자를 낳아놓고 그 죄책감에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눈물로 세월을 보냈는지도 모릅니다.
얼른 달려가서 이제 이아들이 서서 걷고 뛰게 되었으니 눈물을 거두고 기뻐하시라고 제일먼저 달려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동네에 예쁜 아기씨들도 많았을 것이고 특별히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불구자라고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여인들 또 자신 스스로 용기를 낼 수 없었던 사랑하고 싶었던 여인에게 찾아가서 내가 이렇게 건강한 사람이 되었노라고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불구자라고 손가락질하며 놀리며 조롱하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복수를 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디 하고 싶은 일이 그것뿐이겠습니까?
우리야 다리가 성하니까 늘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지만 40평생을 안자서 지내던 사람이 일어서서 걷고 뛰게 되었으니까 참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일들을 제치고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사도들이 했던 신앙고백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사도들이 들어갔던 그 성전으로 함께 들어가야 합니다.
물론 신약시대의 성전의 의미는 바뀌었습니다.
성전이 교회당이 되었고 성전의 제사는 예배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교회당에 함께 모여서 사도들이 고백했던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늘 교회당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전을 교회당이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몸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성령님께서 오셔서 계십니다.
성령님께서 그 안에 오셔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우리가 진리를 알 수도 없고 교회로 올 수도 없고 신앙을 고백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전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는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 안으로 성령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내 속에 오셔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을 따르려고 하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살려고 마음먹는 것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성령님을 의지하고 따라야 합니다.
내 생각과 내 모든 지식들을 내려놓고 나의 계획과 세상을 향한 소망들을 다 내려놓고 성령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살려고 다짐을 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바른 길로 가게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님께서 어려울 때 힘도 주시고 시험을 이길 힘도 주시고 사탄의 유혹에서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자기 자신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님의 임재를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사실로 받아드리고 그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 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타락한 본성이 주는 자기 생각대로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만 알고 그 임재 앞으로 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오신 성령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그 우리 성령님께서 내안에 충만하게 역사하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8절 마지막 부분에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일어서서 걷고 뛰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는 일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적적인 은혜를 체험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해야 할 그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찬송하지 않고 그저 마지못해서 형식적으로 찬송을 하거나 자기 기분에 맞추어서 찬송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바른 찬송을 하는 것이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도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해야 할 일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하면 바르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송할까를 늘 생각하고 연구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일까를 늘 연구하고 있습니다.
왜 찬송가를 많이 안 부르느냐 왜 악기를 많이 사용하느냐 왜 손을 들고 일어서라고 하느냐 이런 질문들은 이제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찬송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도 아직 그 형식이나 찾고 자기 기분이나 찾고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옛날 생각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찬송이 무엇일가를 늘 연구하고 늘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 때부터 걸을 수 없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서 걸으며 뛰며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일어설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우리들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셨고 걸을 수 있는 힘도 주셨습니다.
그 힘으로 우리가 죄악 된 세상에서 일어나서 주님께로 왔습니다.
죄에서 죽음에서 멸망에서 일어나 영원한 생명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있는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