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7. 2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25)
  본문 : 행 2:22-24   
  제목 :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신 일.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시는 기준이 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의로운 사람으로 칭함을 받고 믿음이 없을 때는 죄인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는 여러 가지 믿음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믿음 중에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믿음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십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반드시 가져야할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지적인 요소와 정서적인 요소 그리고 의지적인 요소가 그것입니다.

  믿는다고 할 때 그냥 사도신경 같은 고백문을 낭독하고 입술로 주여, 주여 한다고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에 지적인 요소 정서적인 요소 의지적인 요소가 다 들어 있어서 그 고백이 진정한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적인 요소 즉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믿는 것인지 그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이런 여러 가지 믿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서적인 요소 즉 그 믿음에 감격과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받은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감격하는 마음이 없고 뜨거운 마음이 없고 감격적인 찬송을 부르지 못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정서적인 요소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이런 정서적인 요소가 없는 믿음은 자칫 가석적인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의지적 요소 즉 그 믿음대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전혀 행함이 없이 지식이나 감정만 있는 믿음도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믿음을 고백하지만 과연 이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을까 하는 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정서적인 믿음과 의지적인 믿음이 동반하는 완전한 믿음이 되게 하려면 우선 지적인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것은 복음을 듣고 믿음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짐으로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가장 우선적으로 하시는 일도 이런 믿음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의 의미를 알게 하셔서 우리가 믿는 믿음의 참된 진리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들은 바를 설명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할 믿음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예언한 것들이 이루어진 것임을 말하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일들이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왕 교회에 다니고 이왕 예수님을 믿으려고 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된 믿음이 아닌 참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괜히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만 보내고 있다가 우리의 믿음이 정상적인 믿음이 아니고 가식적이고 형식적이고 그래서 죽은 믿음에 불과하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오늘도 말씀을 잘 들으시고 과연 그런가 하고 깊이 생각하시면서 우리가 믿는 믿음의 지식이 확실해져서 정서적인 믿음과 의지적인 믿음도 정상적인 믿음이 되셔서 구원에 이르는 참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행하신 기사와 표적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본문 22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해나가시면서 자연의 법칙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이미 그 법칙들을 만드셨고 그 법칙에 따라 그 질서에 따라 이 세상이 운행되고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이 지구가 돌아가고 그래서 밤이 되고 낮이 되고 또 봄이 되고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자연법칙에 의해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편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법칙 질서의 법칙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과학자들은 이 자연의 법칙을 잘 연구해서 그 법칙을 이용해서 편리한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새로운 것들이 인간이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칙 하나님의 질서를 잘 연구하여서 그것을 응용하여서 만든 것들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머리가 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이런 초자연적인 일들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은 사람들이 조작했거나 과장했거나 뭘 좀 잘못보아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초자연적인 일들은 제거하고 이해가 될 만한 일만 인정하고 읽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 베풀었다고 하셨습니다.
  권능이나 기사나 표적은 다 초자연적인 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이런 기적적인 일들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과 얼마 전에 그들이 사는 곳에서 일어난 기적적인 일들을 다 목격했거나 소문으로라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나사렛에서 예수라는 사람이 올라왔는데 그 사람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더라는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고
  바다로 걸어오기도 하고 풍랑을 꾸짖어서 잔잔케 하기도 하고
  불치병에 걸린 사람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한 것은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나사렛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사렛 사람이라고 한 또 하나의 뜻은 그냥 보통 촌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시에 살면서 무엇을 많이 배우고 스스로 연구하고 훈련해서 이런 기적적인 일들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촌에서 올라온 한 사람이 이런 엄청난 일을 행하였을 때는 이것이 보통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적들을 경험하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적 그 자체에만 관심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기적적인 일들을 체험하고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왜 이런 엄청난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배고픈 것을 해결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지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칙을 깨고 이런 특별한 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기 위해서 이런 일들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고 우리를 구하러 오신 하나님이심을 증언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통하여 그런 기적적인 일들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기적적인 일들을 만날 때 이건 말도 안 된다 거짓말이다. 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면 다 되는 것입니다.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못하시겠습니까?

  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도 연구해서 기적을 일으켜야지 혹은  나도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런 기적을 체험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시는 것도 잘못입니다.

  성경의 기적을 대할 때 여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계시는구나, 하나님께서 특별한 일을 우리에게 보이시려고 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났으며 그로인해서 그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신기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그런 기적적인 일들이 성경의 기록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기적 같은 일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 같은 일을 오랫동안 연마하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초자연적인 일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초자연적인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기적 같은 일들이 귀신의 도움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나 미신을 통해서도 병을 고치기도 하고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 신비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 종교가 진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귀신도 때로는 엄청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 같은 일은 눈속임으로 일어나는 일도 있습니다.
  마술을 하는 사람들은 다 우리의 눈을 속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해서 다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눈을 속이는 속임수나 가짜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하나님께서 행하셨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구별하는 방법은 그 기적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을 하는 것인지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려는 것인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그 일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게 하려는 것인지 이 세상의 욕심을 채우게 하는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나타내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연 법칙을 깨고 기적을 일으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입니다.
 

본문 23절에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의 죄를 탕감해주시고 용서해주신다고 선포하셔도 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야 했고 꼭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도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고 못하는 일어 없을 것 같은 분이 몇몇 대제사장의 군사들에게 붙잡혀 가고 반항도 대항도 못한 채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보고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웃으며 이야기합니다.
  네가 메시야라면 당장 너부터 그 죽음에서 빠져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머리를 씁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모함하고 끌려가게 하고 죽게 하지만 교묘하게 로마사람들을 이용합니다.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최후의 재판을 받게 하고 사형선고를 받게 만들고 로마 군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 메시야가 오시면 로마의 압정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여 나라를 세울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원수 같은 로마에게 예수님의 처형을 맡긴 것입니다. 
  그런 로마의 권력을 이겨야 메시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기대와 달리 예수님께서 아무런 대항도 없이 그냥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이시니까 실망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정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자들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제도를 통하여 대속의 법칙을 보여주셨습니다.
  죄를 범한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하지만 이렇게 짐승을 죽여서 용서를 받을 길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신 죽어주실 예수님에 대해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많이 예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가 다 이해를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미리 다 아시고 정하신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지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을 베푸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게 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는 것입니다.
  악한 일에 그들이 쓰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 악역을 그들이 맡았다는 것이 그들에게 큰 불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앞 절을 보면서 알았지만 그 죄악으로 인해 40년 후에 그들은 예루살렘이 초토화 되는 엄청난 비극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악역을 맡지 말고 좋은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고 있으며 교회에 다니다가 그만 두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들을 말하겠지만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떠난 것은 우리 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빌미를 제공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 한마디 잘못해서 그 사람이 교회를 떠나게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의리를 지키지 않아서 내가 효도를 하지 않아서 내가 의무를 다하지 않아서 친구가 가족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본문 24절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권능과 기사와 표적들을 보이시고 그냥 떠나버리셨다면 그것은 우리와 별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보통 일이면 뭐하고 기적적인 일이면 뭐하겠습니까?
  그 기적적인 일을 행하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엄청난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죽음 그대로 끝이 났다면 그것도 우리와 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희생적인 죽으심이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런 것도 다 감동적인 일이겠지만 그 감동적인 일이 나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풀어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죽을 죄 대신 죽으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시 사실 때 우리도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망의 고통 가운데서 삽니다.
  사망의 고통이란 죽을 때 당하는 그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사망의 고통에 시달리기 시작을 합니다.
  태어나서부터 온갖 질병들이 우리를 사망으로 끌어가고 그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게 만듭니다.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세월은 우리에게 사망의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죽어가고 있고 그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망의 고통이 없는 새로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망의 고통이 없는 신비한 몸으로 부활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그렇게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신 것은 예수님이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는 일시적으로 죽임을 당하실 수 있지만 그 사망의 세력이 예수님을 끝까지 붙잡고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육신은 일시적으로 죽임을 당하지만 그 죽음에 매여 있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도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이미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다시 살리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미 미리 살리셨고 우리의 육신도 다시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다시는 사망의 고통에 매여 있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시는 아픈 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나 사망이나 이별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과 구주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대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받게 하고
  그 믿음이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