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18)

본문 : 행 1:15-20

제목 : 베드로와 유다.

 

“15.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그 현장에 있었던 120명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성령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한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그들에게 오시는 것이 예수님의 약속이고 또 교회의 시작에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만사를 제쳐놓고 기도에 전념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기도했고 성령님의 강림하심을 위해서 기도했고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여야 하고 그들이 가는 방향이 우리가 가야할 방향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무리들이 모여서 교회를 시작한 것이 이 다락방이기 때문에 여기 모여서 한 일들이 우리가 계속해서 해야 할 일이고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기도만 한 것은 아닙니다.

기도할 때는 더불어서 마음을 같이해서 전적으로 오로지 기도에 힘을 썼지만 늘 그렇게 기도만 한 것은 아니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기도가 끝나고 그들이 제일먼저 한 일은 함께 일할 사람을 뽑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불러주셨는데 그 중에 한 사람 가룟인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한 사람이 떠났으면 11명으로 해도 될 것 같은데 야곱의 12아들이나 그들을 중심으로 한 12지파나 이런 12라는 숫자를 좋아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보충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한 사람을 보충하는 일에 주역이 된 두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이 일을 주도하고 있는 베드로이고 또 한 사람은 이 일이 일어나는 일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 즉 배반하고 떠난 유다라는 사람입니다.

 

그냥 보통으로 생각하면 베드로는 좋은 사람 유다는 나쁜 놈 배반자 이렇게 알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사람의 성향이 오늘날 우리의 교회 내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도행전의 서론격인 1장을 유심하게 살펴보고 있는 것은 여기가 교회의 시작이요 원형이기 때문이고 오늘날 교회가 이 원형에서 벗어난 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살펴보시고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시고 끝까지 바른 길을 가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본문 15절에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을 “형제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한 형제들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다 한 형제자매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형제자매들보다 더 친한 사람들이고 영원히 함께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 소중하게 여겨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서 베드로가 일어섰다는 것은 이미 베드로가 리더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도 베드로는 늘 앞장섰으며 제자들의 이름을 호칭할 때도 늘 제일먼저 불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처음부터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 모인 11명의 제자들이 대부분 갈릴리 사람들이고 거기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갈릴리 사람이라고 하자 사람들이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비웃었던 것처럼 별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성격이 좀 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잘 할 때는 참 잘하는데 잘 하려고 하다가 실수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칭찬도 많이 받고 책망도 많이 받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자 베드로가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고 말씀을 드렸다가 예수님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지 잘 몰랐을 때 예수님 편에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드린 말씀인데 그로 인해서 사탄이라는 말까지 듣고 참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는 또 모든 사람이 주님을 배반하고 떠날지라도 자신은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장담을 한 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끝까지 예수님 곁에 남아서 예수님의 제자 중에 수제자로서 사명을 다한 것은 정말로 귀한 일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예수님 곁에 남아서 충성을 다하고 특별히 중심역할을 감당한 제자가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그가 정말로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보면 그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 예수님께 있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맨 처음 신앙고백을 한 것은 그가 처음 예수님을 만난 갈릴리 바닷가에서였습니다.

그는 평소대로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탕을 쳤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그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였고 베드로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두 배가 잠길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자신이 다른 것은 다 몰라도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는 것은 제일 잘 하는 줄 알았는데 고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 하셨는데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생들이 제일먼저 고백을 해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초라하고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서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괜찮은 사람으로 알고 교만한 말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정말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두 번째 신앙고백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갔을 때에 한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멋진 신앙고백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줄 정확하게 안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정확한 신앙고백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시고 그 신앙고백 위에다가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니고 있는 이 교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을 기초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신앙고백이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니고 이 신앙고백이 없는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세 번째 신앙고백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예언하시면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에게 영생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엄청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 영생에 관한 말씀을 하시자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제자들만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열두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베드로가 이렇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실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은 예수님의 몸과 살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베드로는 정확하게 고백을 한 것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의 양식을 위해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따른다고 확실하게 고백을 한 것입니다.

 

교회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곳입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길이며 우리가 돌아갈 본향이 있으며 그 본향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지막 신앙고백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날 때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로 다시 찾아오셔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묻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21:17) 라고 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사랑의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주님께서 잘 아시는 대로 내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진심으로 고백해야 할 내용이 이 사랑의 고백일 것입니다.

예수님 정말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

오늘 본문 16-17절에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유다라는 사람은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아니라 가룟인 유다 즉 가룟 유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열두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나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은 30을 받고 길잡이가 되어서 예수님께서 잡혀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던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갈릴리 사람이 아니고 유다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고기나 잡던 어부가 아니라 꽤 배운 것도 있고 똑똑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재물을 맡아 관리한 것으로 보아서 믿음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다가 돈을 관리하다가 보니까 돈에 욕심이 있어서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 하면 우리도 예수님을 믿다가 잘 못 믿으면 예수님을 배반하여 딴 길로 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회계를 맡은 사람이 회계를 잘못하면 비참하게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그 믿음이 바른 믿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다가 변절을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잘못된 길을 갔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두”라는 신조어를 하나 만들어냈습니다.

이단은 처음에는 같다가 끝이 다른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두는 아예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을 말합니다.

 

가룟 유다는 아예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목적이 달랐습니다.

그가 바라는 것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 세상을 지배할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나라를 해방시켜서 왕이 되시고 이수라엘 나라를 다스릴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그 밑에서 중요한 자라 하나 차지해보려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영생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이 이 세상에서 좀 잘 살아보려고 출세해서 권력을 가져보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을 뿐이지 진정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라고 고백할 때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배반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6:70-71)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지만 그를 진정한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이미 아시고 그 일에 쓰임을 받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 내에도 이렇게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른 신앙고백을 알지 못하고 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교회에 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처음부터 우리와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가룟 유다의 최후

오늘 본문 18-19절 말씀에 가룟 유다의 최후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을 괄호에 넣어둔 이유는 아마도 이 부분은 베드로가 한 말이 아니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첨가한 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본문은 가룟 유다가 어떻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을 제의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에 동의하여 은 30개를 지불했습니다.

이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때가 오자 예수님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날 예수님께서 정죄를 당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뉘우치고 그가 받은 은 30을 제사장들에게 돌려주고 자신은 스스로 목을 매어서 자살을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돈을 다시 성전 금고에 넣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면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묘사는 마태의 기록과 조금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가 자살을 했다는 것과 자살 과정에서 창자가 흘러나오는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과 그가 받았던 돈으로 아겔다마 즉 피밭이라는 밭을 샀다

는 것입니다.

 

골짜기에서 올라가서 끈으로 목을 매었는데 그 끈이 끊어져서 땅으로 곤두박질쳐서 창자가 흘러나오는 비참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바른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다른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비참한 최후를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비참한 최후를 알지 못하고 가룟 유다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참한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너무나 떳떳하기 때문에 바른 길을 가고 있는 우리들이 혼란에 빠질 정도입니다.

 

우리가 뭐 특별하다고 저 사람들처럼 살지 않고 이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가? 왜 우리만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면서 가고 있는가?

우리도 그들처럼 이 세상에서 좀 잘 먹고 잘 사는 길을 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하면 가룟 유다의 길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고 있는 이 진리의 길 이 생명의 길이 얼마나 귀한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서로 상극의 길을 가고 있는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갔던 그 길이 우리가 가는 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에 유다의 길을 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