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1 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12)
본문 : 행 1:8(히 12:1-2)
제목 : 고난의 증인.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지금 우리는 성경의 매우 중요한 부분인 사도행전 1장 18절을 계속해서 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약교회의 출발을 알리는 아주 중요한 시기의 말씀임과 동시에 신약교회의 성격을 알리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교회의 모습이 달라지고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에 정말로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심으로 신약의 교회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 개개인도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실 때 성도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생각나게 하고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왜 그런 일들을 하셨는지 알게 해 주심을 통해서 교회가 시작이 되고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지 않은 사람이 교회에 다니는 것은 힘이 드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그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비밀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안에 있는 진리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 교회에 다니는 것은 그저 형식적이고 가식적으로 교회에 다닐 뿐이지 성도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권능 즉 능력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능력을 이적을 행하는 능력으로만 생각을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은 이적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은 이 능력이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능력이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압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영원한 천국 하나님나라를 알고 그 나라를 향해서 가게 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성령님의 능력을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병고치고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녀서 우리가 가는 길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되리라”고 하신 말은 될 것임을 미리 예언하는 말씀임과 동시에 되어야 한다고 명령하시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을 하시는 말씀이지만 되리라고 예언을 하시는 형식으로 말씀을 하신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증인이 되게 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증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단어에서 “순교자”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로 고통과 괴로움을 동반하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목숨을 위협 받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고 우리 각 사람에게 능력을 주신 것은 이런 증인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령님을 받고 권능을 받는 것만 좋아하고 증인으로서의 삶을 외면하더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서 능력을 행하면서 사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능력이 무엇이지도 모록 그 능력을 왜 주셨는지도 모르고 그 능력을 엉터리로 해석을 해서 자기의 자랑, 자기의 영광, 자기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히브리서 12장 1-2절의 말씀은 증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증인의 삶을 살고자 하는 성도들은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증인으로의 삶을 살고자 할 때 우리의 삶은 오히려 더 고통스럽고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을 참고이기는 것이 증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오늘 함께 읽은 히브리서 12장 1절 말씀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아무 증거도 없이 그냥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우리를 둘러싼 구름같이 많은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허다하게 많은 증인들의 증언과 우리 각 사람이 살아가면서 받은 증거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고 우리도 증인이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 “이러므로”는 바로 앞장 11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 믿음의 사람들이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 때에 고난을 받으면서 살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증인의 삶이요 그들의 삶의 대부분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바른 제사를 드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그 형 가인보다 더 나은 제물로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은 이 바른 제사를 드린 것 때문에 형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형 가인을 따라 적당하게 제사를 드렸으면 잘 살았을 텐데 더 나은 제사를 드리려 하고 바른 제사를 드리려 한 것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하셨고 아벨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그 의로움으로 지금도 증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한 번도 비를 본 적도 없고 세상에 물이 넘쳐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생고생 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배를 만들어서 그의 집을 구원하고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 명령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여기저기 고생하고 다니면서 살았습니다.
장막에서 고생을 하면서 살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으실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던 것은 그 수모와 고난이 주는 하나님의 상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구약시대의 성도들도 그들이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고 그 은혜를 아직 받지 못했지만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이 세상의 안일과 평안함 보다 오히려 고난의 삶을 자처함으로 고난의 증인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더 적극적으로 고난의 삶을 자처했습니다.
고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5-38)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고난은 그냥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남들처럼 잘 먹지 못하고 잘살지 못하고 고생하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서 고난을 자처하면서 살았습니다.
조롱을 당하고 채찍을 맞으며 잡혀서 감옥에 갇혀서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으면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로 떠돌아다니면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자
우리가 함께 읽은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를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의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믿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도 십자가를 참고 부끄러움을 참고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는 영광을 누리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에게 잡히시고 조롱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제일 흉악한 죄인들이나 당하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말씀 한 마디만 하시면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이 내려와서 그 흉악한 무리들을 단숨에 다 없애버리실 수도 있는데 그 고난 그 수치를 끝까지 참고 끝까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왜 그런 고난을 당하셨는지 왜 끝까지 참으셨는지 우리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런 고난을 당하셨을까요?
범죄하고 타락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하는 악한 인생들을 뭐하려 구원합니까?
노아홍수 때처럼 몇몇만 남기고 싹 쓸어 없애버리고 다시 시작하셔도 되실 것인데 왜 그런 방법까지 동원하시면서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한 것일까요?
그로 인해서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큰 은혜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런 구원계획을 세우셨고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서 이런 고난을 당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왜 이런 방법까지 쓰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을까 하는 의문도 생기지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을 쓰셨기 때문에 이 방법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대신 죽어주심을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해도 믿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 스스로 죄의 짐을 지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했으면 한 사람도 구원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이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는 길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하나님의 법칙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쓰셨을 것인데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적용해야 하는 가장 좋은 법칙이라는 것을 빨리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고난이 없는 삶을 좋아합니다.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고생이 없고 고난이 없고 훈련이 없고 평안하게만 사는 사람에게는 영광이 없습니다.
서양속담에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왕관도 없다는 말입니다.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영광스러운 삶도 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도 고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증인으로서의 삶을 산다고 할 때 고난을 필수과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이 진리를 바로 지키고 보존하고 전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을 포기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히브리서 12장 1절 하반절 말씀에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증인이 되기 위해서 특별히 고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를 둘러싼 허다한 고난의 증인들을 바라보고 또 구원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고난의 증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목표를 향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달려가는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증인의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그 목적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목적지가 다른 사람의 증언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많은 간증들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 간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목적지가 다릅니다.
그래서 그들의 증언이 오히려 우리를 엉뚱한 길로 가게 만드는 일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해서 죽을병을 고쳤다고 간증을 합니다.
죽을병이 걸렸는데 기도를 해서 나았다고 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도 죽을병이 걸리면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많아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 해서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었다고 간증을 합니다.
그런 간증을 들으면 우리도 신앙생활 잘 해서 부자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잘 살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런 간증들은 우리가 목표를 정하고 끝까지 참고 견디며 달려 나갈 그런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고난을 당하면서 증언해야 할 그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목표를 흐리게 하고 우리가 가는 목적지를 바꾸게 하는 위험한 것입니다.
무거운 것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마라톤 시합에 나가는 사람이 옷을 두껍게 입고 등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나간다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못가서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경주를 하기 위해서 출전하는 선수는 짐이 되는 무거운 모든 것은 다 내버려야 합니다.
그런 무거운 짐을 지고는 끝까지 달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특별히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고 있는 무거운 것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기에 짐이 되는 것들은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무거운 짐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싶은 욕망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잘 살고 싶은 욕망
나는 이렇게 살더라도 내 자식은 공부 많이 시키고 출세시켜서 떵떵거리며 살게 하고 싶은 욕망 이런 것들이 우리의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돈을 많이 벌어서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굽실거리게 해야 하겠다. 언젠가는 힘을 길러서 사람들에게 기죽지 않고 살겠다. 이런 욕망들이 우리의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이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한 증인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죄는 우리를 사탄에게 얽매이게 하는 밧줄과 같습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제일 큰 장애물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를 그대로 두고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도 없고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이 나로 인함임을 인정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려서 과거에 지은 모든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흉악한 죄에 얽매이지 않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물론 타락한 본성을 가진 우리 인생이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삶을 살수도 없고 때로는 원치 않는 죄를 지으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 수 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죄를 지어도 용서를 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는 죄는 성령 훼방 죄로 용서 받을 수 없는 결정적인 죄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탄과 얽히게 하는 큰 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세상에서 잘 살고 싶은 욕심 때문에 가끔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신앙생활은 좀 잘 못해도 돈을 벌수가 있겠는데 하는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유혹을 받을 때 과감하게 물리치는 것이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가끔 범죄의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 별거 아닌데 조금만 눈을 감고 조금만 사람들을 속이면 돈도 벌고 편안한 삶도 살 수 있는데 하는 생각도 많이 드실 것입니다.
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손해가 와도 고생이 되어도 바르고 정직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증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불법을 행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고 보면 교회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충성을 하는 일이 힘이 들어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만 좀 아끼면 이 시간만 좀 아끼면 좀 더 잘 살겠다는 생각을 하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돈 쓸 일은 많고 빚은 점점 많아지고 할 때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을 줄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유혹을 이겨보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더 충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런 고난을 통해 증인이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더 드러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귀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신앙은 버리지 마십시오.
교회를 떠나고 진리를 떠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해서는 안 될 큰 죄악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2장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6-17)라고 했습니다.
그까짓 팥죽 한 그릇이 뭐라고 그것 때문에 그 엄청난 축복을 빼앗겼고 그 후에 다시 후회해도 되찾을 수 없었던 에서의 어리석은 행동을 기억하고 우리가 받은 은혜를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요 증인입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진리의 길 이 영원한 생명의 길에 증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진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평안한 삶을 스스로 버리고 고난의 길을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이 은혜를 받았음을 기억하고 우리도 고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