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1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02)
본문 : 행 1:1-2
제목 :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심.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호박벌을 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몸은 아주 뚱뚱하고 몸에 비해서 날개는 아주 작은 벌입니다.
과학적으로 분석을 한다면 이 호박벌은 몸에 비해서 날개가 너무 작기 때문에 절대로 날수가 없는 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호박벌은 그런 과학적인 분석을 무시하고 날고 있으며 제일 부지런하게 날아다니며 다른 벌들처럼 꽃에서 꽃가루와 꿀을 뽑아 나르고 있습니다.
무엇이 날기에 불가능한 호박벌을 날 수 있게 했는지 잘 모릅니다.
아마도 호박벌은 날 수 없는 것처럼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날 수 있는 벌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먼저하고 그냥 날았을 것입니다.
만약에 호박벌이 머리가 좋고 분석력이 있고 꾀가 있었다면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고 날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박벌은 그런 부정적인 것보다는 자신이 벌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날아버린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도들이 마치 호박벌과도 같다는 생각에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12명의 사도들 그것도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을 분석해 보면 그들은 도저히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돈도 없었고 권력도 없었고 지식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시고 세상에 안계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세력은 엄청난 힘을 가졌습니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유대교의 힘이나 로마 정부의 힘은 너무나 막강했기 때문에 연약한 12사도의 힘으로 이 복음을 세계만방에 퍼지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불가능한 현실을 계산하고 불가능하다고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령을 하셨다면 그것은 분명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고 그 명령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만방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머리가 좋아서 자기의 환경을 분석하고 불가능한 일들만 계산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가진 사람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는 일들도 실천에 옮기면서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도저히 주일을 지킬 수 없어 주일날 일을 하지 않으면 난 굶어죽고 말거야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주일을 지키지 못합니다.
나의 형편으로 도저히 남을 도와줄 수 없어 내먹고 살기도 힘이 드는데 어떻게 남을 도와주고 좋은 일을 하고 살아, 나는 할 수 없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을 위해서 살지 못합니다.
나는 전통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나는 점잖은 사람이야 옛날 하던 대로 해야지 어떻게 새 노래를 배우고 어떻게 손을 들고 어떻게 일어서서 찬송을 해 나는 못해 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10년 20년이 되어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이란 그런 인간적인 것들을 환경의 부정적인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긍정적인 것들을 생각하면서 무엇이든지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동행전을 공부하시면서 진정한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부정적인 것을 계산하고 앉아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신앙의 위대한 능력을 믿고 실천하는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볼 때 나 자신이 나를 볼 때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이길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을 행동에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행전의 서론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지난 시간에는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성경이 다 그렇듯이 사도행전도 사도들의 전기가 아니라 사도들 속에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도들을 통하여 어떻게 전해져 나가는가를 보여주는 복음의 전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행하시면서 그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셨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이론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알고 있는 진리를 행동에 옮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가르치시기 전에 자신도 몸소 실천을 하시면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행함의 뜻이 무엇인지도 자세하게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도 행함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실천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택하시고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사도들을 택하신 예수님
오늘 본문 말씀에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훈련시키시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셨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극히 일부를 선택하셔서 사용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시에 많은 민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갈대아 우르에 살던 이름 없는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아 이스라엘 조상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자손들 가운데서도 모든 자손이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들 중에도 이삭이, 이삭의 자녀 중에도 야곱이,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도 특별히 유다가 선택을 받아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열두 사람만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선택하심이 있다는 말은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다 버림을 받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버림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노아홍수 시대 때 노아와 그 가족만 구원 받을 사람으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노아와 그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 여덟 식구만 선택을 받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버림을 받아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소동과 고모라 멸망 때도 그 성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롯과 그의 두 딸만 선택을 받아서 살아났고 그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불에 타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선택하실 때 노아와 같이 비교적 의로운 사람을 선택하시기도 하셨지만 그러나 별 볼일 없는 사람도 의롭지 못한 사람도 선택하셨음을 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는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형편없는 사람들을 선택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어부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당시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세리였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고 의심이 많았던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선택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또는 지금 현재의 형편으로 볼 때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 같았지만 그러나 그들 속에 있는 특별한 것이 있었음을 주님께서는 보셨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비록 지금 현재는 보잘 것 없었지만 그들 속에 있는 재능을 보시고 가능성을 보시고 믿고 그들을 불러 주셨을 것입니다.
선택을 받고 부름을 받은 사도들이 그 믿음대로 엄청난 일들을 해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사람을 창세전에 미리 선택을 하시고 이렇게 불러주셨다고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는 오늘 이렇게 특별한 교회로 부르심을 받고 여기에 와서 특별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있는 비밀을 알고 구원받은 사람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을 제일로 알고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를 선택해 주심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죽고 또 지금 살고 있습니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소수인 우리들만 선택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우리나라 역사가 반만년인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태어나고 죽었겠습니까?
그 중에 백여 년 동안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만 예수님을 믿었고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 중에도 일부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바른 진리를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하는데 그 중에 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선택을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은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노아홍수 때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었고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더욱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비참함에서 구원을 받아서 이렇게 특별한 자리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 성도들입니다.
부족한 우리를 선택하여 불러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하필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들을 불러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여기 나와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울 정도로 우리는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창세전부터 특별하게 이렇게 선택하여 불러주셨음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선택하여 불러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고 계신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능력을 보시고 가능성을 보시고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가 별 볼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않는 그 어떤 재능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불러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그 능력을 발휘하여 우리를 불러주신 목적을 달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알아보지 못하고 땅에 묻어두는 게으르고 나태하고 어리석은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2002년 월드컵 때 박지성 선수는 외모로 볼 때 왜소하고 별 다른 특기가 없어보여서 다른 감독들은 그를 대표선수로 발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그에게 있는 가능성을 보고 대표선수로 발탁을 했고 박지성 선수는 그 감독의 믿음에 부응하여 대표선수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으시고 이렇게 선택을 해서 불러 주시고 성도라는 엄청난 자리에 앉게 해 주셨는데 우리가 그 자리나 지키고 그냥 앉아 있으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날 믿어 주시고 불러주신데 대한 보답을 해야 합니다.
날 불러주신 그 목적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최 우선순위를 두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불러 주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신 예수님
오늘 본문 말씀에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사도들에게 명령을 내리실 때 성령으로 즉 성령님을 통하여 성령님을 의지하여 명령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비록 사람의 몸을 가지고 계셨지만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자의로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셔도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령으로 명하셨다고 하신 것은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명하신 것은 기록된 말씀 즉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혹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을 하신 것도 있지만 간접적으로 또는 기록자들의 견해를 기록한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원 저자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성령으로 명하신 말씀은 넓게는 성경전체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된 성경전체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에게 행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여기 모인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주신 여러 가지 명령들을 두 가지로 집약을 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나타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최고로 삼고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 교회를 위해서 충성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웃 사랑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도움을 주고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는 일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도와주고 이끌어주고 손을 잡아주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의 부모가 어려움을 당하는데 나의 자녀가 어려움을 당하는데 나의 형제가 어려움을 당하는데 함께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어려움을 당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줄 줄 모른다면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우리노회의 임재규 목사님 아들 임찬양 군이 학교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넘어져서 뇌를 다쳐서 1년 넘게 식물인간으로 병원에 누워 있습니다.
아무런 보험 혜택이 안 되어서 한 달에 어떤 때는 천만 원이 넘는 병원비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지금은 작은 병원으로 옮겨서 목사님이 직접 간병인이 되어서 간호를 하니까 월 2-3백만 원 정도 든다고 합니다.
CTS 방송국에서 이 사실을 알고 며칠 전에 방송을 해주었는데 임목사님이 이런 말을 합니다.
“제가 노숙자가 되는 한이 있어도 이아들을 살리고 싶습니다.”
모든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이런 마음까지는 안 되더라도 조금은 희생하고 조금은 헌신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 할 것 다하고 내 쓸 것 다 쓰고 남을 돕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나의 소중한 것을 포기하다라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사랑일 것입니다.
성령으로 명하셨다는 것은 성경의 명령들을 자의로 해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을 할 때 반드시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기록하실 때 그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나에게 유리한대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서 바르게 해석을 해야 합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의 핵심적인 목적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말씀을 이용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명령은 반드시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을 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명하셨다는 것을 좁은 의미로 생각하면 우리가 다음에 배우게 될 8절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는 이 말씀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시고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당부하신 중요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도들은 그 명령대로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복음의 증인으로 그 사명을 다했습니다.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이 사실임을 증언하기 위해서 모든 삶을 바치고 목숨까지 바쳐서 그 복음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죽어도 다시 부활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들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삶에 급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이나 그 복음을 따르는 성도들은 그런 증인의 삶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사람들처럼 재물을 모으는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서 살고 있습니다.
부활도 영생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삶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삶은 그 때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까지 바쳐서 충성하는 그런 삶을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내가 사는 것을 보고 아 천국이 있구나, 영생이 있구나, 부활이 있구나, 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들은 예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하신 명령을 따라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최후의 명령을 따라서 복음의 증인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