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2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신경11)
본문 : 마 27:22-25
제목 :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심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특별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고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우주만물의 주인이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가 되십니다.
참 선지자시며 참 제사장이시며 만왕의 왕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엄청나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실 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죄 없는 몸으로 오시기 위해서 성령으로 잉태되셨지만 여자의 몸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는 것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고난의 삶이셨고 그 고난의 절정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입니다.
사도신경은 단순히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전 생애가 고난의 삶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은 꼭 필요했던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인류의 대표로 실패한 아담을 대신해서 인류의 대표로 완전하게 순종을 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사람의 몸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사람으로 오셨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오셔서는 왕들처럼 화려하게 사시다가 마지막에 할 일 하시고 가시면 될 텐데 처음부터 고난의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나실 곳이 없어서 마구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이가 난지 40일이 되면 정결예식을 드리는데 일 년 된 어린 양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데 돈이 없는 사람들은 그 대신 비둘기를 드려도 됩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가난해서 그렇게 귀한 아들이 태어났는데도 집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와서 정결예식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도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좋은 일들을 많이 하시고 그 정도로 기적적인 일들을 많이 하셨으면 여기저기서 헌금을 많이 했을 것이고 그 헌금으로 잘 살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예수님을 그런 일에 대가를 받지도 않으셨고 화려하게 살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마지막에 잡혀가셔서 조롱을 당하시고 온갖 모욕을 다 당하시고 상상할 수도 없는 고난을 받으시고 끝내 제일 비참한 죽음인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수모와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아무런 대항도 없이 그렇게 죽어가시던 분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은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만 하시면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이 내려와서 그 못된 사람들을 진멸할 수도 있으신 분이 그런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고난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합니다.
오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심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빌라도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1.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였는가?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본디오 빌라도는 그 역할의 일부를 맡았을 뿐이지 전적으로 빌라도에 의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1)가롯 유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한 일등공신은 가롯 유다일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핵심멤버로 돈 주머니를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믿을만한 사람이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중책을 맡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권세를 잡으면 한 자리 할 욕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돈이라도 벌어보려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하고 돈을 받았던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즈음에 예수님을 배반한 또 한 사람의 제자의 이야기가 그 사이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가롯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지는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했습니다.
두 사람이 다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두 사람은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다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막중한 임무를 잘 수행을 했지만 가롯 유다는 스스로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차이를 회개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면서 회개를 했고 가롯 유다는 후회를 하긴 했지만 회개를 하지 않고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두 사람의 범죄의 원인이 다릅니다.
베드로는 죽음의 위협이 두려워서 육신이 연약해서 어쩔 수 없이 배반을 했지만 가롯 유다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부러 스스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연약해서 저지른 어쩔 수 없는 실수와 일부러 고의로 저지른 죄는 엄격하게 다릅니다.
그 돈에 눈이 어두운 가롯 유다에 의해서 대제사장과 장로가 보낸 큰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붙잡히게 되었고 고난을 당하시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돈에 눈이 어두워서 욕심에 사로잡혀서 죄를 저지르며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탐욕을 내려놓지 않는 한 끝까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되고 예수님을 십자가를 배반하게 됩니다.
2)유대교 지도자들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빌미를 잡아서 죄를 뒤집어 씌워서 제거하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권력에만 눈이 어두워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빙자해서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만 애를 썼습니다.
오늘날 돈과 권력에 눈이 먼 일부 대형교회 지도자들이 그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복음 천국 복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누리는 권력과 부귀영화가 유일한 관심사입니다.
그것 빼앗기지 않으려고 수많은 백성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3)본디오 빌라도
빌라도는 로마 당국에서 이스라엘 지방에 파송한 총독입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침략을 받았을 때 총독부가 있어서 총독부에서 우리나라를 관리했기 때문에 총독이 뭔지를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사실 본디오 빌라도는 별로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 풀어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킬 것처럼 난리를 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 준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 아내가 꿈을 꿨는데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재판정에 앉아 있는 총독에게 사람을 보내서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총독이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나는 무죄하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하면서 자신 있게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억울하게 어쩔 수 없이 사형선고를 했고 그 죄로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못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유대 백성들에 의해서 고난을 받으셨지만 굳이 빌라도라고 그의 이름을 밝힌 것은 당시에 십자가의 형벌을 선고할 수 있는 결정 권한을 가진 최고의 책임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빌라도라는 그의 이름을 분명하게 밝힌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역사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현존 인물과 함께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우리의 죄와 허물
이사야서 53장은 마치 선지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그 장면을 보고 기록한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을 상세하게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4절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 핑계를 댈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나 조사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5)성부 하나님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 앞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성부 하나님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성부 하나님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이사야서 53장 10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 받기를 원하사”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상함 받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할 만하시거든 이 잔 즉 십자가의 고난을 내개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다시 받게 된 것입니다.
2.왜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면 그냥 말씀으로 선언만 하셔도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죄는 다 용서한다고 선포하시고 앞으로는 똑바로 살라고 하시든지 어떤 조건을 걸면 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든 방법을 택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속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이 길이 더 좋은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택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희생제물이 되시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사람을 창조하신 후 인간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그대로 이행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바로 죽이시지 않고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사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죄를 지은 후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림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피 흘림을 통해서 용서를 받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통해서 죄를 영원히 용서 받고 영원한 생명을 다시 받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영원한 죄에서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길이 우리 인간이 타락했을 때부터 주신 길이요 역사를 통해서 이 일을 진행해 오셨고 드디어 예수님께서 어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일을 해내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길이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2)고난당하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게 하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고난의 길입니다.
아무리 잘 사는 사람처럼 보여도 그 속에 들어가 보면 온갖 걱정들이 다 있고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런 고난을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고생하는 것을 잘 아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생각하기를 예수님 같은 분도 전 생애에 걸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우리 같은 인생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서 이런 고난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3)고난의 삶을 살라고 하심.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고난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는 고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라고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히 겸손과 희생과 고난의 삶이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 때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제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은 하기 싫어하고 쉽게 돈을 벌려고 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희생정신이 없어지고 이기주의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나를 희생하고 부지런히 땀 흘려 일하고 가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헌신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잘 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이라는 엄청난 일을 하셨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선한 일을 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 고난이 빌라도에게 받은 것이라고 고백하지만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허물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고난을 당합니다.
예수님도 전 생애에 걸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