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22.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신경10)
본문 : 마 1:20-23
제목 : 성령으로 잉태되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나라가 세워질 때마다 그 나라를 세운 사람의 출생에 관한 신화가 하나씩 있습니다.
고조선을 세운 단군은 곰이 여자가 되고 신이 내려와서 그녀의 남편이 되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합니다.
고구려의 주몽이나 신라의 박혁거세나 가야국의 김수로는 다 같이 신비하게 알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왕을 신격화 하고 나라의 위대성을 알리고 백성들에게 자부심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들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탄생기사도 누군가가 만들어 낸 설화나 전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도 보통 사람들처럼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시기는 하셨지만 잉태되실 때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탄생기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허무맹랑한 전설이나 설화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렇게 특별하게 태어나시게 한 것도 단순히 위대성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라 꼭 그렇게 필요한 것이기에 그런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나셨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신경은 이 사실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신 대로 잉태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님이 되시는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을 한 상태이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마리아가 임신을 했습니다.
당시의 정혼은 보통 결혼하기 1년 전에 했는데 우리의 약혼과 비슷한 것이지만 그 의미는 더 강했습니다.
함께 살거나 동침은 하지 않지만 법적으로 부부로 인정을 했고 만약 정혼을 한 여자가 정혼하고 다른 남자와 간음을 했다면 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남편 될 요셉이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무척 나빴을 것입니다.
당장 고소를 해서 위자료를 받아내든지 사람들에게 알려서 처벌을 받게 할 것인데 요셉은 참 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파혼을 하고 끝내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서 말합니다.
네 아내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다.
구약성경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한대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고 그 아들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아들이다. 라고 하신 그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마리아를 데려왔고 동침하지 않은 상태에서 처녀의 몸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 전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 전능하신 힘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이런 정도야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라고 의심을 하고 이 사실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머리로 좀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못 믿겠다고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성령으로 잉태되심과 동정녀 탄생은 그래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기 위해서 그럴듯하게 꾸며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꼭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서 이런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1.어떻게 성령으로 잉태 되셨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라는데 관심을 가지고 읽으면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또 그 기사의 원래 목적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어떻게”에 대답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라는 질문에 답변을 주기 위해서 기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호기심이 많기 때문에 “어떻게”에 관심을 두기를 좋아합니다.
“어떻게” 즉 과학적인 해답을 주지 않으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매도를 해버립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정말로 과학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이라는 질서도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칙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기록도 정확한 질서 아래서 기록을 했습니다.
터무니없는 그런 거짓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세상에는 우리의 과학으로 아직 발견하지 못한 하나님의 질서의 법칙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법칙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질서의 법칙에 따라서 진실만 보도하고 있습니다.
1)성경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사람들이 만든 신화나 설화나 에피소드와 다른 점은 그것이 사람의 창작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서 역사와 함께 기록을 하심으로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인간나라들을 세운 사람들에 대한 신화는 역사성이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알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그 알이 어떤 역사 속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생겨났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알에서 사람이 태어나긴 했는데 그 알이 어떤 역사에 의해서 난 것인지를 말하지 않고 그냥 어느 날 알이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잉태되심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 일을 진행해 오시다가 드디어 때가 되어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잉태기사를 기록하기 전에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가 되는 요셉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족보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윗 왕을 거쳐서 요셉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족보는 요셉의 가문에서 태어나게 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곳에서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이 약속을 강조하고 있음을 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5-18)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2천여 년 전에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을 후손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2천여 년의 세월동안 그 일을 역사 속에서 진행해 오셨고 드디어 그 계획하신 때가 되어서 태어나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 많은 곳에서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오실 것임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다윗왕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고 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조를 다윗 왕으로 시작을 하셨습니다.
사울이 먼저 왕으로 선택을 받았지만 그것은 백성들의 생각으로 백성들이 세운 왕이었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이스라엘나라를 시작하셨고 그 왕조가 끝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다윗 왕조를 통해서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2-23절의 말씀도 이런 예수님의 출생이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예수님의 이런 탄생이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을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7:14절 말씀에 메시야의 탄생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 징조를 보여주실 것인데 그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인간들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기사는 어느 날 갑자기 쓴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서 그 일을 진행해 오다가 그 역사와 함께 기록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2)성경은 인간의 생각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만 최대한도로 인간들이 자신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기사도 인간들이 만들어 낸 탄생신화처럼 엉뚱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셨다든지 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으로 짠하고 둔갑을 하였다든지 여러 가지 이야기로 꾸밀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장면만 제외하고는 우리 인간들이 하는 방법을 최대한 활용하셔서 일을 진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과 이해를 최대한 활용하시고 인간들이 쓰는 법칙을 최대한 이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몸을 빌리는 일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는 일까지 최대한 그대로 하시되 인간의 씨 대신에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잉태시키는 일만 다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마저 인간들과 똑 같이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면 그분이 특별하신 하나님이실 수가 없기 때문에 잉태만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하셨고 그 외에 모든 과정은 우리 인간들이 태어나는 방법 그대로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어떻게 잉태하게 하셨는가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방법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는가는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듯이 성령님께서 그 능력으로 잉태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잉태하심을 어떻게 잉태되었을까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왜 성령으로 잉태되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나?
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을까 라는 질문은 왜 성령으로 잉태되셨을까 하는 질문과 같은 질문일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동정녀의 몸에서 나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항상 “어떻게”라는 질문보다 “왜”라는 질문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맹목적인 신앙을 가지지 않고 바르게 알고 믿는 신앙을 위해서 “어떻게”라는 것을 설명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 이 질문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1)인간이어야 하기에
예수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즉 사람의 몸에서 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가 참 인간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대표인 아담이 실수하여 이런 죄악 된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고 완전히 순종할 또 다른 인간 대표가 있어야 되기 때문에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인간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이단이 됩니다.
그 참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을 증명하는 일이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입니다.
2)죄가 없는 분이어야 하기에
만약에 예수님이 우리와 똑 같이 죄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면서 남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 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주장처럼 자신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아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지 우리의 죄와는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예수님은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서 나시되 동정녀가 아니라 요셉의 씨를 받아서 잉태된 아이라고 한다면 예수님도 모든 사람들처럼 죄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정모혈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다 아담의 피를 받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분으로 태어나시기 위해서 성령으로 잉태되셔야 했고 동정녀의 몸에서 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잉태하심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것은 이런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흥미를 돋우고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되는 이런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가지셔야 했기 때문에 마리아의 몸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은 사람이지만 우리와 다르게 죄가 없어야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잉태하심으로 통해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3)우리의 구원의 확실성 말씀하기 위하여
모든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역사 즉 구속사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구원이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만큼은 최고의 것으로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말씀할 때 언제나 최선의 것을 가지고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신 것이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참 사람으로 오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죄가 없으신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에 직접 개입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맡겨놓을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직접 개입하신 것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통해서 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믿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잘못될 수도 있고 가다가 엉뚱한 곳으로 빠질 수도 있고 아무 소용도 없는 헛일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한 구원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일이고 하나님께서 직접 사건 현장에 오셔서 진행하신 일입니다.
잘못될 일도 없고 실수할 일도 없고 중간에 변경될 일도 없습니다.
반드시 꼭 그렇게 되고 마는 너무나 정확한 일입니다.
그 확실한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오시면서 참 사람으로 오시고 죄가 없는 특별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습니다.
참 사람으로 오시고 그러면서도 죄가 없으신 분으로 오셔서 확실하게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신 것입니다.